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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43화 (43/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43화

에르안이 공작성에 도착했을 때, 이미 서쪽 하늘에서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어, 어?”

공작 부인은 리체가 올 시간이 라며 한스와 에스더의 시체를 거두라고 명령했다.

성문에서 기사들을 시켜 두 구 의 시체를 내리고 있던 호아킨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공……작님?”

그럴 리가 없는데, 흑마를 타고 달려오고 있는 남자는 선대 공작을 쏙 빼닮아 있었다.

큰 키와 단단한 골격에 준수한 이목구비까지.

“호아킨 경.”

붉게 타오르는 석양을 뒤에 두고, 청년은 그를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낮고 굵은 목소리가 울렸다.

“오랜만이야.”

호아킨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익장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놀라서 입이 벌어지는 것올 어쩌지 못했다.

선대 공작을 닮았지만 짙은 눈썹 밑에 자리 잡은 서늘한 분위기의 눈매는 공작 부인을 닮아 있었다.

“서, 설마…… 혹시……”

누군지 머리로는 알면서도, 가 슴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다.

“에르안 님이신가요?”

에르안은 흑마 위에서 성의 없게 고개를 끄덕했다.

호아킨의 동공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5년 전만 해도 그의 어깨에도 못 미치는, 비실비실하면서도 귀여운 꼬마였다.

그런데 지금은 선대 공작보다도 위압감을 풍기는 청년이 되어 있었다.

“왜 혼자 오셨습니까? 나, 나머지 기사단들이나 사용인들은......”

“오랜 항해에 지쳤다고 징징거려서 두고 왔어.”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낮게 말했다.

호아킨은 그의 완전히 달라진 선득한 말투에 몸이 굳어 버릴 것 같은 지경이었다.

“어차피 빨리 오는 데 방해나 될 뿐이지. 그런데……”

에르안의 눈이 에스더와 한스의 시체를 향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창 혼 란스러웠던 날들 이후 아주 오랜 만이군. 시체를 성벽에 걸어 두 는 것 말이야.”

담담한 표정의 에르안이 고개를 모로 꼬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나?”

“그게……”

호아킨이 자신도 모르게 공손하 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이 남자의 시체는 리체의 친부모를 사칭한 자고, 거기에는 하녀인 이 여자의 도움이 있었다는......

이유나 배후는 모르지만, 일단 공작성에서 잘 살고 있는 리체의 재산을 노리고 벌인 사기 행각이 라고 결론을 내렸다는 것까지.

그동안 리체에게 있었던 일을 들은 에르안의 눈빛이 차갑게 번득였다.

고삐를 말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잔근육이 자리 잡은 팔에 핏줄이 섰다.

거의 넝마가 되다시피 한 시체 를 내려다보며 에르안이 중얼거렸다.

“……너무 곱게 죽이셨군.”

“네, 네?”

호아킨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가뜩이나 무거웠던 분 위기가 순식간에 더 가라앉았다.

“사지가 멀쩡하잖아.”

툭 내뱉은 말이었으나 못마땅함이 가득 담겨 있는 어조였다.

호아킨은 자신도 모르게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뻔했다.

그런 잔인한 말을 하면서도 눈매가 관능적으로 휘는 그를 보고 숨이 막혔다.

이 청년이 5년 전에 자신에게 검을 배우고 싶다며 찾아온 그 작은 소년이 정말로 맞는지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벌레 하나도 못 죽일 것 같았던 의기소침한 소공자님께서 지금 대체 뭐라고…….

친모인 공작 부인조차도 쉽게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은 괴리감 이었다.

붉은 하늘을 향해 선 그의 뒤에 그림자가 길게 걸쳐졌다.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해.”

에르안은 호아킨에게 던지듯 말 한 후에 성 안으로 말을 몰았다.

왠지 뒷모습이 급해 보였다.

***

예상치 못한 그의 이른 등장에 당황한 사람은 호아킨뿐만이 아 니었다.

“아, 그렇군요.”

공작 부인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에르안의 얼굴을 보며 괴리감에 휩싸여야 했다.

기사단과 사용인들을 모두 항구 에 놔두고 혼자 말을 달려 하루 만에 공작성에 온 아들과 단둘이 저녁 식사를 하며, 공작 부인은 어딘지 모르게 당혹스러움을 느 꼈다.

“그러니까…… 자유 도시에 갔다고요.”

“그래. 지금쯤 올 때가 되어 시 체를 치우라고 명령한 거란다. 리체에게 보여 줄 꼴은 아닌 것 같아서.”

유려한 이목구비와 어딘지 모르 게 풍기는 퇴폐적인 기운은 친아들이라고 해도 낯설었다.

분명 자신의 바람대로 선대 공 작을 꼭 빼닮게 큰 것 같은데 어린 시절과 괴리가 너무 커서 적 응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뭔가 공작 부인이 그린 재회의 그림과 한참 멀었다.

그녀가 생각한 5년 만의 재회는, 기사단과 사용인들 사이에서 돌아온 그녀의 연약한 아들올 끌어안고 ‘고생 많았다, 그동안 외 로웠지? 하지만 잘 컸구나.’라며 토닥여 주는 것이었는데…….

‘잘 컸지. 그런데 잘 큰 것 맞나?’

에르안은 별로 고생한 것 같지도 않았고, 옛날처럼 외로움을 느끼는 처연한 얼굴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렇게 건장하게 컸을 리가 없었다.

“결국 입을 못 연 겁니까.”

“하나는 죽어도 모르겠다고 하고, 하나는 뭘 하기도 전에 혀를 깨물어서 방법이 없었단다.”

“관계자들은 다 찾아보셨습니까.”

공작 부인은 이상하게 아들에게 추궁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은 그녀 뿐만이 아닌지, 그의 낮은 목소 리에 요리를 내오던 시종들마저 도 잔뜩 긴장했다.

“하나는 부랑인이라 가족이 없고, 하나는 외국 출신이라 더 이상 추적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 어.”

“아, 그래서 둘만 뒈지고 끝난 건가요.”

에르안은 스테이크를 썰며 낮게 말했다.

“상당히 치밀하군요.”

그가 거침없이 나이프를 움직이자 스테이크 사이로 붉은 핏물이 배어 나왔다.

“공작성의 사랑받는 고용인을 둥쳐 먹기 위해서라는 간단한 이 유로 얼버무리기에는.”

“그, 그렇지.”

공작성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 의 에르안에 대한 기억은 5년 전 에 멈춰 있었다.

그래서 식당에서 대기하고 있는 하녀들조차 바짝 얼어서 서로 눈빛을 주고받기에 급급했다.

식사도 제대로 안 하고, 비쩍 말라서 시무룩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내리고 있던 아기 도련님 의 말투가 어떻게 저렇게 변했는 지…..

하녀들 역시 처음에 에르안을 봤올 때에는 너무 잘생겨졌다며, 안구가 호강한다며 호들갑올 떨었다.

그러나 그가 섬뜩한 표정으로 입을 열기 시작하자 모두 얼음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다 내가 적이 많아서 생긴 일 이란다. 리체는 아마 자신의 자리에 누군가 다른 첩자를 밀어 넣기 위함이 아니냐고 하던데……”

“합리적인 추론이네요.”

식사 중 처음으로 에르안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걸쳐졌다.

“리체는 잘 지냈나요?”

“그럼. 정말 예쁘게 잘 자랐단다. 여전히 영리하고, 귀엽고.”

대화의 분위기가 드디어 부드러 워졌다.

“우리는 사흘 뒤에나 네가 도착 할 줄 알고 있었으니 리체도 돌아오면 많이 놀랄 거야. 이제 곧 돌아오겠구나.”

“그렇군요.”

“늦더라도 꼭 인사하렴. 네가 어렸을 때, 리체가 많이 돌봐 주었잖아.”

“예.”

대답은 짧았지만 그의 표정이 밝아진 것을 보고, 공작 부인은 안심이 되어 살짝 웃었다.

“성년을 혼자 맞게 해서 어쩌지. 성년식도 직접 못 챙겨 주고……”

“뭐 그런 게 의미가 있습니까.”

리체에 대한 화제가 끝나자, 그 가 눈을 내리깔며 다시 무심하게 말했다.

“제가 성년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래. 별다른 일 없으면 이제 공작 위를 물려받아야지.”

공작 부인은 반밖에 비우지 못한 접시에 포크를 내려놓고, 자신과 똑같은 눈매를 가진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전에 의논하고 싶은 것이 있단다.”

그녀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 앉았다.

“원래 천천히 얘기해도 되지만, 화제가 나온 김에.”

“말씀하세요.”

“리체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살 아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란다. 네가 없는 5년 동안도 정말 리체 가 없었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몰라.”

“그거야 저도 마찬가지죠.”

“이번 사건으로, 나는 정말로 리체를 가족처럼 여기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

에르안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 였다.

어쨌든 리체의 화제가 나온 뒤 대화의 분위기는 대체적으로 부 드러웠다.

“뭐든 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지 만, 더 해 주고 싶어졌어.”

“예, 다 해 주세요.”

“그래서 말인데……”

공작 부인은 물을 한 모금 마시 고 말을 이었다.

“리체를 양녀로 삼고 싶구나.”

에르안이 나이프를 그대로 내려 놓았다.

“그 애에게 귀족의 성을 주고 싶어. 세르이어스에 그만한 공은 세웠다고 생각한다.”

에르안의 눈빛이 완전히 돌변하 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공작 부인이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라도 그 누구보다도 귀하게 키우는 건 물론, 남부럽 지 않은 다른 귀족과의 혼약도 내가 직접……”

“안 됩니다.”

에르안이 싸늘하게 자신의 모친을 노려보았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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