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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42화 (42/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씀니다 42화

제이드는 리체를 뒤에 두고 위엄있게 어깨를 확 펴고 가게를 나선 뒤, 그대로 옆 가게에 들어섰다.

“후…… 후아……”

또 다시 구석에 앉아 책을 펼쳐든 그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케인즈가 즉시 허리를 숙였다.

“저희의 불찰로 전하를 잘 모시 지 못하여 큰일이 날 뻔……”

제이드는 케인즈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 나 실수한 거 없지?”

“예?”

“여, 여자랑 말했다고. 자연스러웠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제이드가 열심히 읽고있던 책의 제목은 「연애에 서룬 복귀 군인을 위한 백서」였다.

이 책은 요즈음 해군들 사이에서 굉장한 인기를 얻고 있었다.

“최대한 말을 적게 하고, 버벅 거릴 것 같으면 추한 꼴 보이기 전에 먼저 일어나라.... 이 책대로 했는데.”

케인즈는 그제야 왜 제이드가 멀쩡히 잘 있던 카페를 나가 버린 건지 눈치첼 수 있었다.

실제로 그가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 분위기가 비슷한 바로 옆 카페로 향하자, 황태자를 모시던 모든 수행인들이 상당히 당황했다.

“황후 폐하께서 전쟁만 이기고 돌아오면 수도의 여자들이 다 줄을 설 거라고 하셨지.”

제이드에게는 어릴 때부터 두어 번 얼굴만 본 것이 전부인 약혼녀가 있었다.

여러모로 훌륭한 후작가의 여식이었으나 몸이 약하여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변경에서 요양 중인 영애 였다.

그는 아픈 약혼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귀족 영애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는 유년기를 보냈다.

그 와중에 귀족 영애들을 중심으로 암암리에 소문이 이상하게 났다.

그가 여자를 별로 좋아하 지 않는다고.

그리고 그 후 성년이 되자마자 남부 해안 지역으로 해적 소탕을 나가버린 것이다.

물론 간단할 줄 알았던 해적 소탕이 5년이나 걸릴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그리고 해적 소탕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이 약했던 약혼녀가 죽었다.

짧게 인연이 있었던 지라 조금은 애도했지만 시간이 5년이나 흐르며 다 옛날 일로 잊혔다.

그리고 황후의 마지막 편지에는 [수도에 돌아오면 새로운 약혼녀를 찾아야지. 네가 승전만 하고 오면 여자들이 줄을 설 거란다.] 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문제는 그가 지금까지 그의 또 래 여자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무작정 돌파하는 성향의 전투를 선호하여 작전이나 회의를 싫어했다.

소문은 또 이상하게 퍼져, 여군들은 그가 여자를 싫어하는 줄 알고 아예 말을 걸지 않았다.

그래서 여군들과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 나도 지긋지긋한 전쟁터를 벗어나 여자랑 말이라도 한 마디 할 수 있겠지…’

큰 맘 먹고 놀러 온 자유 도시 에서는 귀족 영애들이 가득한 카페에 자리를 잡았으나 아무도 그 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사실 다들 그가 먼저 말을 걸어 주길 기다리고 있었으나 제이드가 눈치채지 못한 것이었다.

“정말 황태자님은 여자를 별로 안 좋아하시나 봐……”

“눈길 한 번 안 주시네.”

“해적들을 잔인하게 도살하신 분이야. 역시 무서워……”

제이드는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그런 소문이 도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다들 감히 앉지 못했던 그의 바로 옆 테이블에 초록 빛 드레스의 아가씨가 앉았다.

안 그래도 잔뜩 긴장하고 있는 데 그와 케인즈가 계속 고민하고 있던 그의 눈병 증세를 완벽하게 읊는 것 아닌가.

정신을 차려 보니 그는 그 아가 씨 앞에 앉아 중상을 말하고 있 었다.

“잠시…… 제가 확인해도 될까요? 실례하겠습니다. ”

그녀가 가만히 다가와 그의 눈을 들여다보자 그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여자와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이 처음이었다.

그의 눈을 짚어 보는 부드러운 손짓에서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 만 같았다.

그녀의 동그란 초록색 눈을 바 라보고 있자니 덜덜 떨렸다.

그리고 고마워서 부탁을 들어주 겠다는 말에 그녀는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굉장히 기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여자, 나한테 호감 있나?’

이것이 바로 「연애에 서툰 복 귀 군인의 백서」에 나오는 ‘초록빛 신호’인가!

“나중에, 조금 시간이 흐른 뒤 제가 황태자님을 한번 알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 면 합니다. ”

‘맞나 봐!’

제이드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간신히 누르며 최대한 멋있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뭔가 상황을 악화시킬 것 같아 그대로 카페를 나온 것 이었다.

태연하게 바로 옆 카페에 자리 잡은 그는 부관에게 말했다.

“세르이어스 공작성에 사는, 리체라는 이름의 아가씨가 어느 가문 소속인지 알아 와.”

“리체요?”

“응, 그 영애 이름이야.”

어쩌다 보니 갑작스레 대화를 시작한 터라 가문은 못 들었지만, 이름은 엿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 싹싹한 분홍색 머리의 하인이 ‘리체 님’이라고 부르던 것을 기억했던 것이다.

“나를 만나고 싶어 하니, 부탁 을 들어줘야지.”

“네?”

제이드는 전투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장이었다.

하지만 그 외의 분야에서는 좋게 말하면 단순하고 나쁘게 말하면 생각이 짧은 편이었다.

그런 주군의 성향을 잘 알고 있 는 케인즈가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당연히 승전 연회 때 오겠지? 혹시 한미한 집안의 여식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직접 초대장을 보내겠어.”

난생처음으로 여자의 호의를 받아 본 제이드의 얼굴이 희망으로 반짝거렸다.

“음……. 직접 초대장이라 하시면..........”

“전쟁 이후, 나와 처음으로 말을 섞은 여자라고. 심지어 내게 좀 반한 것 같기도 해.”

그는 뿌듯하게 웃고 다시 「연 애에 서툰 복귀 군인의 백서」를 펼쳤다.

책이라면 지루해서 잘 읽지 않 았지만 억지로 읽기 시작한 보람이 있었다.

때마침 그가 읽어야 할 챕터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금방 사랑에 빠지는 성향의 사람’

***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어요. 대 부님이 되어 주세요.]

제이드 황태자가 떠난 후, 나는 짧은 서신을 써서 즉시 페렐르만 자작에게 보냈다.

이로써 ‘페렐르만 자작님은 제 대부님을 해 주시기로 하셔서요.’ 까지 진실로 만들었다.

완벽하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자유 도시에 온 가장 큰 목적은 이룬 셈이었다.

“리체 님, 대체 어쩌시려고요.”

거리로 나서자 디엘이 빈정거렸다.

“황태자님에게 뭔가 큰 도움이 된 건 알겠어요. 혹시 평민이신 걸 정말로 잊고, 황태자비라도 되시려는 큰 그림은 아니시죠? 그건 불법입니다. 그렇다고 측실 로 가시기엔..

“네가 계속 그따위로 말하면 정말 평민이라는 걸 잊어버리고 너를 매우 칠 테니 그리 알아.”

내가 정색을 하며 쏘아붙이자 디엘은 금방 꼬리를 내렸다.

“……이런 위험까지 무릅쓴 이유가 뭐야?”

“위험이라니.”

나는 어깨를 으쏙했다.

“그냥 그 가게가 평민을 출입금 지 시키는 줄 몰랐을 뿐이야. 내 가 거짓말 한 거 있어? 아, 물론 조금 숨긴 건 있지만.”

“하, 하지만……”

“자유 도시의 뜻이 뭔데. 평민 이든 귀족이든 황족이든 자유롭 게 대화를 나눠도 법에 걸리지 않는 곳이잖아.”

“뭐, 그렇긴 하지만 말이 그렇지 현실은……. 아냐, 됐다.”

“처벌만 안 받으면 됐지, 뭐.”

설마 실명을 막아 준 은인에게 단순히 가게의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뭐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제이드 황태자는 가게에서 평민을 막고 있었다는 것조차 몰랐올 가능성이 컸다.

그런 건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하는 거니까.

“원하는 시간에 황태자님을 알 현할 수 있는 알현권, 이런 게 있는 줄 알았는데.”

나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급할 때가 되면, 그때 눈을 고쳐 준 애라며 대화를 나 눌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수도 있 겠지.”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만들어 뒀으니 아예 소득이 없는 건 아 니었다.

“이제 슬슬 가자. 아, 에르안 님 선물만 하나 사고.”

“선물?”

“응, 오랜만에 오시니까 환영의 의미에서 말이야. 돈은…… 500 골드쯤 있는데.”

디엘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내가 5000골드 주지 않았어?”

“근데 어디다가 좀 쓰고 그것밖에 안 남았어.”

나는 귀족이 아니라 함부로 수표를 쓸 수도 없었다.

“에르안 님은 돈이 없어서 뭘 못 사는 분은 아니니까, 그냥 마 음의 표현이면 되겠지……. 뭐 괜찮은 거 없을까, 디엘?”

“하인이 대체 뭘 알겠습니까. 안목도 미천할 텐데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알잖아.”

“네, 하인이 당연히 이해해야죠”

다시 조금 전의 속상함이 떠올랐는지, 디엘은 입을 비쭉 내밀고 툴툴거렸다.

‘아, 아무래도 오래 갈 것 같다.’

나는 열은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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