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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41화 (41/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41 화

대충 하녀에게 예법을 배워 오기는 했는데, 아예 평민 출입 금지를 당할 줄은 몰라서 다소 혼란스러웠다.

다른 가게들처럼 대충 옷차림만 보고 걸러 낼 줄 알았던 것이다. 게다가 대화 중간에도 가게 웨이터에게 평민인 걸 들키면 바로 쫓겨날 분위기이니…….

다행히 뭔가 틀리지는 않았는지, 케인즈가 예의바르게 물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눠도 괜찮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내가 선뜻 고개를 끄덕이니, 케인즈가 고요한 눈으로 디엘을 바 라보았다.

디엘은 눈치 빠르게 그대로 자신의 찻잔을 들고 일어났다.

‘비키라는 뜻이었구나.’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디엘을 쫓아낸 케인즈는 내 맞은편에 앉아 차분히 말을 걸었다.

“레이디의 대화를 엿듣는 것이 실례인 줄은 알지만, 저희도 상황이 급하여 어쩔 수 없었습니

“아, 그러신가요.”

“사실 제가 이치야 눈병이라고 판단한 환자가 있습니다.”

그는 보안을 위해서인지 그 사람이 황태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 맞는 처방을 해도 그다지 차도가 없어서요.”

“어머, 그렇군요.”

“아르가 페렐르만 자작님이 누군가에게 의술을 가르친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는데……

그 말에 대꾸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아…… 자작님이 성격상 그런 걸 얘기하실 친구가 없으셔서.”

“그건 그렇죠.”

케인즈는 바로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환자분의 상태가 지금 어떤가요?”

나는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이 친구, 아니 이 하인의 상태와 비슷할까요? 이게 어느 정도 진행됐는지에 따라 처방이 많이 달라서요.”

디엘이 열게 한숨을 쉬는 것을 무시하며 나는 말을 이었다.

“아마 메스테라 눈병이라는 남부 해안 지방의 풍토병일 거예요. 이치야 눈병과 초기 중상이 아주 비슷하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눈동자가 시큰거리기 시 작한다는 게 특징이죠.”

나는 또박또박 설명을 시작했다.

“써야 할 약초도 아주 까다로워서……”

그때였다.

가만히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았던 제이드 황태자가 벌떡 일어나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케인즈가 즉시 일어나기에 나도 똑같이 따라서 일어났다.

“황태자님.”

케인즈의 당황한 듯한 말에 나 역시 깜짝 놀란 척을 하며 치맛자락을 살짝 잡았다.

“큰 승전을 제국민께 안겨 주신 제국의 미래, 황태자님을 뵙습니다.”

나는 아침에 책에서 찾아보았던 예법을 기억하며 재빨리 말했다.

‘이렇게 자의가 아닌 귀족 행세를 할 줄 알았더라면 귀족 간의 예법을 더 공부했을 텐데.’

“케인즈 경.”

제이드 황태자는 미소를 된 채 조용히 말했다.

“중상은 내가 설명하도록 하지.”

“예.”

제이드 황태자가 설명하는 중상은 디엘이 읊었던, 정확히는 메스테라 눈병의 증상과 똑같았다.

진행 증상에 따라 10기로 나누었을 때 이미 3기까지 진행된 상태였다.

“잠시…… 제가 확인해도 될까요? 실례하겠습니다.”

진단을 하려면 정확히 보는 것 이 중요했다.

나는 일어나서 몇 번이나 허락 을 구한 뒤에 황태자의 푸른 왼쪽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뭐야, 왜 속눈썹을 이렇게 떨어? 진료받는 거 처음인가?’

가만히 동공과 홍채의 상태를 확인한 나는 싱긋 웃고 물러났다.

그러고 나서 차분하게 케인즈에게 말했다.

“확실해요. 이 눈병은 메스테라 눈병이고요, 「이르비아의 희귀 안과 질환」이라는 서적의 네 번 째 챔터에 나와 있어요.”

“아.....그런 서적이 있었습니까?”

“네, 저도 페렐르만 자작님이 주셔서 알게 된 책이예요. 원하신다면 빌려드릴게요”

디엘이 재빠르게 커다란 짐을 뒤져 책을 한 권 꺼냈다.

내가 미리 준비해온 책이었다.

나는 그 책을 케인즈에게 내밀었다.

“안 그래도 요새 보고있던 책이라 계속 들고다녓거든요. 지금 갖고있지는 않지만, 헤르킬 카이제가 쓴 「결국엔 정복한 질환 3403가지」라는 책에도 1487 번째 질환의 부록으로 나와요.”

“아, 그 책은 황궁에도 있습니다.”

“교차 검토해 보시면 아마 믿을 만 하실 거예요.”

처음 본 여자의 말을 믿기 어려울 것 같아서, 일부러 나는 그 책은 가져오지 않았다.

「결국엔 정복한 질환 3403가 지」라는 책은 오래되긴 했지만 꽤 유명해서 어디든 있으니까.

하지만 부록까지 꼼꼼하게 보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제가 보기엔 이미 3기 중반까 지 진행되신 것 같고요……. 디 엘, 거기 분홍색 봉투 찾아서 줘 봐.”

“네.”

디엘은 잔뜩 지고 온 짐을 뒤져 분홍색 봉투를 내게 건넸다. 3기 에 필요한 약초들이 꼼꼼하게 포 장되어 있었다.

“이건…… 제 하인이 비슷한 병 을 앓고 있어서 제가 처방해 주려고 갖고 온 약초인데, 이 아이 가 제 말을 안 들어서 이미 4기에 진입해 쓸모없게 되었어요.”

케인즈가 입을 떡 벌리며 내가 내민 약초 더미를 받았다.

“이미 3기 중반이면, 희귀한 약초까지 빠르게 구하시긴 어려우실 거예요. 이걸 쓰세요.”

어디까지 진행되었을지 몰라서 잔뜩 짐을 갖고 왔는데, 3기라면 그나마 초반이었다.

“이, 이 귀한 걸……”

“페렐르만 상단에서는 구하기 쉬워요. 부담 갖지 마세요.”

나는 싱긋 웃었다.

케인즈가 열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일 정말로 황태자님께서 메스테라 눈병이 맞는다면 제국은 레이디께 큰 빚을 진 것입니다.”

“뭘요. 의사라면 당연히 서로 지식을 나눠야죠.”

“저희도 이치야 눈병이라고 생각하고 처방했는데 이상한 증상이 계속되어 당황하고 있었습니 다.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말로만?’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차를 마 셨다.

“실례지만 레이디의 성함이…. 이 책은 귀한 서적이니 다 시 돌려 드려야 할 것 같군요.”

케인즈의 말에 나는 살짝 차를 뿜을 뻔했다.

그러고 보니 내 이 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다.

이름을 말하는 거야 어렵지 않 지만 지금까지 본의 아니게 귀족 행세를 한 것이 민망했다.

게다가 아직 대화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웨이터에게 끌려 나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어물쩍 넘어가기로 했다.

“책은…… 세르이어스 공작성으 로 보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아, 그곳에 머무십니까?”

“네, 아르가 에이트 페렐르만 자작님의 제자니까요.”

조수나 제자나, 그게 그것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공작 부인이 워낙에 두문불출하는 타입인데다가 5년 만에 제국에 돌아온 황태자 일행이 세르이 어스 공작성의 자세한 사정을 알 리 없었다.

그러면서도 식은땀이 났는데, 황족 앞에서 헛짓거리를 한 것이 밝혀져 혹시라도 황태자의 심기 를 거스른다면 그대로 사형 선고 가 내려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귀족 영애가 남의 성에 오랫동안……”

우리 테이블 옆에 있던 웨이터 의 눈이 세모꼴로 변했다.

케인즈의 얼굴도 조금 미심쩍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재빨리 말했다.

“아, 페렐르만 자작님은 제 대 부님을 해 주시기로 하셔서요.”

저번에 대부를 해 주겠다는 말도 했으니까, 내가 찬성하면 되 는 일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냥 이제 대부가 되어 달라고 하면 되는 것이었다.

대부와 대모는 귀족의 문화였기 때문에 당연히 이제 날 귀족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일단 이 상황을 넘어가는 것이 중요했다.

나중에 문제가 되면, 난 절대 내가 귀족이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고 대꾸할 셈이었다.

‘난 거짓말은 안 했어. 살짝 숨겼을 뿐이지.’

일단 이 상황만 넘기면 뻔뻔하 게 나가는 건 자신 있었다.

그리고 케인즈는 더 이상 심화 질문을 하지 못했다.

가만히 나 를 바라보고 있던 제이드 황태자 가 내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영애의 말이 다 맞는다면, 덕 분에 내가 실명의 위기를 넘긴 것이군.”

“……아, 네. 맞아요.”

케인즈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황족 앞에서는 겸양을 좀 떨었어야 했나, 살짝 후회했지만 이미 어쩔 수 없었다.

“혹시 원하는 보상이 있으면 뭐 든지 말하도록 해.”

“네, 있습니다.”

이 한마디를 위해서 자유 도시에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좋았어!’

나는 그의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이전 생애에서는 이렇게 가까이 서 볼 기회도 주지 않고 그대로 사형 선고를 내려 버렸던 사람.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위치의 남자였다.

목표를 이뤘다는 생각에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중에, 조금 시간이 흐른 뒤 제가 황태자님을 한번 알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어렵지 않은 일이군.”

‘그래! 얼른 내가 당신을 찾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줘!’

“그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애석하게도 그 는 천천히 일어섰다.

“나중에 보도록 해.”

‘뭐, 뭐야?’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이게 끝이야?’

아무리 나라도, 대뜸 일어나 사람들을 이끌고 가게를 나가 버리는 그를 붙잡을 담대함은 없었다.

‘대체 나중에 언제?’

뭔가 허탈해져서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황태자의 무리가 다 빠져나간 후에야, 디엘은 긴장이 풀렸다는 듯 비틀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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