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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40화 (40/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40화

‘설마 이렇게 호위도 많은데, 어느 귀족가냐고 물어보는 건 아니 겠지? 설마…. 그럼 레이디라 고 부르지도 않았겠지……’

떨리는 마음을 꾹 누르며 나는 공작 부인의 표정을 흉내 냈다.

“무슨 문제 있나요?”

“예, 다른 건 아니고 지금 평민들의 출입이 제한됩니다.”

“자유 도시인데요?”

나는 아무런 심경의 변화가 없는 척 도도하게 물었다.

“지금 귀한 분이 계셔서요.”

“아니, 그래도……”

“평민을 안 받는 것도 저희의 자유죠.”

“안에 사람이 꽤 있는 걸로 보이는데요.”

“모두 귀족들입니다. 정돈된 분위기를 위해서죠.”

나는 긴장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논리적으로 항의하려는 찰나, 웨이터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 청년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네?”

그가 가리키는 사람은 디엘이었다.

디엘 역시 페렐르만 상단의 사람이니 당연히 후줄근한 차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처럼 완전히 귀족같이 꾸민 것 도 아니었다.

“그, 그래도........”

나는 디엘을 흘끗 보았다.

그의 동공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미안, 디엘. 선택의 여지가 없어.’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가 꼭 있어야 해.’

잠시 그의 눈을 바라봐 준 다음, 나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이 애는 내 수족 같은 하인이에요.”

디엘의 표정이 무너지는 것을 애써 외면하며 나는 또박또박 이어 말했다.

“호위 기사도 들여보내면서 하인은 못 데려가나요?”

“아, 레이디의 소속이십니까?”

웨이터의 정중한 질문에 나는 도리어 표독스럽게 반문했다.

“그럼, 설마……”

코웃음을 한 번 쳐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친구라도 될까 봐요?”

옆에서 디엘이 부들부들 떠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혹시 문제가 생기면 레이디께 책임이 갈 수도 있습니다.”

“그건 걱정 마세요.”

정말 슬프게도, 마지막 디엘의 자존심을 깨부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명령을 아주 잘 듣는 아이니 까.”

나는 차마 디엘을 바라보지 못 하고 도도하게 말했다.

그제야 웨이터가 비켜서고 문이 열렸다.

이따 돌아가면서 디엘을 어떻게 달래 줘야 할지 난감했지만 정말 로 어쩔 수 없었다.

디엘의 입장에서도 그대로 혼자 남는 것보다는 무슨 일이 벌어지 는지 구경하는 게 나을 것이다.

본인도 그건 아는지 입을 비쭉 일 뿐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어렵 지 않게 제이드 황태자를 찾을 수 있었다.

가장 구석에서 호위에게 둘러싸 여 조용히 책을 보고 있었던 것 이다.

‘역시.’

그는 아직 안대를 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알고있는 대로라면 군의관이 제때 처치를 하지 않아서, 결국에는 올해가 가기 전에 완전히 왼쪽 눈의 시력을 잃을 것이다.

‘겨울에 세르이어스 공작령에 와서 반란군을 쓸어버릴 때에는 애꾸눈이었는데.’

비록 먼발치에서만 봤지만 새까 만 안대는 기억하고 있었다.

해적을 소탕할 때 가볍게 여기고 지나갔던 상처 때문이라는 소문까지도.

최대한 황태자의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나는 능숙하게 차 두 잔을 시켰다.

“디엘, 맞은편에 앉아.”

“……그래도 됩니까?”

디엘이 뚱하게 물었다. 입가가 시무룩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하인이 감히 맞은편에 앉아도 될지……”

물론 반항은 길지 않았다.

내가 눈을 부라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기 때문이다.

결국 내 앞에 앉은 디엘은 시위를 하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가게 곳곳에 웨이터들이 서 있었다.

나마저 평민인 걸 들키면 이대로 쫓겨나고 말 것이 뻔했 다.

“편하게 먹어. 넌 내 친구 같은 하인이 잖니.”

“그렇죠. 저는 그냥 하인 같은 친구도 못 되죠.”

우아하게 차를 몇 모금 마시고 있자니 여기저기서 시선이 느껴 졌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귀족 영애 들이 과연 내가 누구인지 토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 말을 걸거나 내가 평민인 걸 들키기 전에 얼른 일을 진행해야 했다.

나는 다급히 디엘에게 턱짓을 했지만, 그는 내 눈을 피했다.

결국 나는 테이블 밑에서 디엘의 무릎을 퍽, 하고 찼다.

“아악!”

디엘이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자 나는 호들갑을 떨며 재빨리 말했다.

“어머, 디엘! 괜찮아? 또 한쪽 눈이 아파? 처방해 줬는데도 그래?”

그리고 빨리 다음 대사를 치라 는 뜻으로 발을 꾹 밟았다.

디엘은 잠시 반항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아까 내가 시킨 대사를 옮었다.

“네, 리체 님.”

물론 평민은 출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나름대로 빠르게 존대로 바꾸는 응용력을 보여 주었다.

“평소에는 괜찮은 것 같은데, 가끔가다 이렇게 눈동자가 시리고 몇 초간 안 보일 때가 있습니 다.”

“어머, 지난번에 말한 것보다 중상이 더 나빠졌구나.”

나는 호들갑을 떨며 한숨을 쉬었다.

디엘은 무뚝뚝하게 대사를 이어 갔다.

“몇 초간 안 보일 때에는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울 때도 있습니 다.”

“내가 처방해 준 약은 잘 먹었니? 그럼 이렇게 진행됐을 리가 없는데.”

“이게 처음부터 그런 게 아니 라, 그냥 붉은 점들만 여기저기 보여서…… 그냥 동네 의원의 처방을 따르다 보니.”

나는 곁눈으로 황태자가 책에서 눈을 떼고 우리를 바라보는 것을 확인했다.

디엘은 충실하게 내가 외우라고 했던 대사를 이어 갔다.

“안 돼. 왜 내 말을 안 들었어? 그럼 점점 더 안 보이는 시간이 늘어났을 텐데.”

멀쩡한 디엘의 왼쪽 눈을 까뒤 집으며 나는 심각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눈 안쪽이 쿡쿡 쑤시고 말이야.”

“네, 동네 의원에서는 ‘이치야 눈병’이라며 켈로스 시약을 처방 해 줘서, 그것부터 먹었어요.”

“어머, 안 돼.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치야 눈병이랑 초기 중상은 비슷하지만 아예 달라. 이건 실명까지 될 수 있다고.”

“그, 그렇습니까?”

“눈동자가 시리기 시작하면 아예 새로운 처방을 해야 해.”

“역시.”

디엘이 억지로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과연 아르가 페렐르만 자작님 께 직접 가르침을 받으신 영애다우시군요.”

원래 대사는 ‘아르가 페렐르만 자작님의 조수답군요.’였지만, 디엘이 잘 각색한 것이었다.

잘했다는 뜻으로 눈웃음을 쳐 주려고 했는데, 디엘이 새침하게 덧붙였다.

“감히 천한 평민의 눈도 봐 주 시고. 어떻게 몸 둘 바를 모르겠 습니다, 리체 님.”

물론 이건 내가 가르친 대사는 아니었다.

‘오래 삐져 있겠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며, 디엘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나의 대사를 옮었다.

“이게 진행이 될 때마다 처방이 아주 세심하게 달라. 그러니까 자세히 얘기해 줘야 해. 동네 의원 말 말고 내 말을 들었어야 지.”

나는 연기나 거짓말에 소질이 없었다.

그래서 이게 잘 먹히고 있는지 내심 초조했다.

하지만 드디어, 바로 옆 테이블 에 있던 황태자가 뒤에 있던 누군가에게 뭐라고 말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까뒤집었던 디엘의 눈을 놓아주며 자리에 우아하계 다시 앉았다.

‘황태자 주위에는 당연히 엄청난 의료진이 늘어서 있겠지.’

다시 차를 홀짝이며 나는 예쁘 게 손질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런데도 반년 넘게 몰랐다가 점차 실명하는 병이라면 딱 하나 밖에 없어.’

바로 ‘메스테라 눈병’이었다.

굉장히 희귀한 질병이라 다루고 있는 책도 안과 관련 전문 서적 두어 권밖에 없었다.

나 역시 회귀 전에는 몰랐고, 세르이어스 공작성에서 새롭게 알게된 질병이었다.

페렐르만 자작이 이르비아에서 가져온 서적 중에 안과 전문 서적이 있던 것이다.

내가 잘 모르는 안과 질환은 정 말 오랜만이라 열심히 읽어서 알 고 있었다.

남부 지역의 풍토병이기도 해서 제국의 군의관들은 당연히 잘 모를 수밖에 없었다.

아마 왼쪽 눈에 살짝 상처가 났을 때, 운 나쁘게 메스테라 눈병에 걸린 해적을 처치하며 전염되 었을 가능성이 컸다.

“얼마 전에 네가 항구를 다녀와서 걸린 걸 거야. 이게 위생이 나쁜 남쪽 지방의 뱃사람들 사이 에서 운 나쁘면 걸리거든.”

내가 쐐기를 박듯 말하자, 그제 야 황태자의 뒤에 있던 남자 하 나가 뚜벅뚜벅 걸어서 내게 다가 왔다.

“저기, 레이디.”

“네?”

나는 눈을 깜빡이며 흰 머리의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는 해군 군의관인 케인즈 렌토 지벨로니라고 합니다.”

“아…… 만나서 반가워요, 케인즈 경.”

공작 부인이 호아킨에게 하는 것을 떠올리며 나는 싱긋 웃었 다.

군의관 소속에, 지금 나설 사람이라면 아마 황태자의 주치의일 것이다.

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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