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39화
“사기 치지 마세요. 그런 적 한 번도 없어요.”
“그럴 리가.”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씩, 바뀐 현재와 미래가 공명할 때 생기는 현상이야. 잘 생각해 봐. 있을 거야. 나도 몇 번 꿨는걸.”
“네?”
“왜?”
“뭘 꾸는데요?”
칸시아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꿈이지, 뭐.”
“그러니까 미래의 일을 꿈으로 꾼다고요?”
“아주 가끔. 근데 그런 꿈은 자 연스러운 게 아니라서, 금방 잊 히니까 아가씨가 기억을 못하는 걸 거야.”
나는 애초에 현실적인 성격이라, 무슨 꿈을 꾸더라도 굳이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생 각나는 꿈이 단 하나도 없었다.
“앞으로는 일어나자마자 기록하든지 해. 어차피 순식간에 잊히겠지만 조금이라도 미래를 알고 싶으면.”
“……알았어요.”
내가 칸시아를 어떻게든 붙든 이유는 계속 그 부작용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고작 꿈이라면 그다지 신경 쓸 필요가 없어 보였다.
“건강 같은 것에 문제가 있다는 건 아니죠?”
“아니라는 건 아가씨가 더 잘 알텐데. 천재 의사가 자기 몸도 몰라?”
칸시아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럼 난 이만……”
“잠깐만요.”
나는 칸시아의 손목을 꽉 잡았다.
“지금 그거 대답해 준 게 4500 골드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뭐?”
“어쨌든 4500골드 그대로 먹었 잖아요. 결과론적으로 해군들한
테 딴 돈, 내 거라고요.”
칸시아는 내 손을 뿌리치려다가, 입구에 서 있는 내 호위 기 사들을 흘끗 보더니 한숨을 쉬었 다.
“돈은 못 돌려줘. 내가 언제 갚아 달랬어?”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뭔데?”
“제가 감옥에서 또 하나의 소원을 얘기한 적 있었잖아요.”
“……뭐였더라?”
“전 친부모를 몰라요. 친부모 좀 찾게 해 주세요.”
“그걸 내가 어떻게 찾아?”
“그때 수정 구슬이 깨져서 못 찾는다고 그랬잖아요. 근데 시간을 되돌렸으니 수정 구슬도 안 깨졌을 거 아니에요.”
“하.”
칸시아가 탄식을 내뱉었다.
“아가씨, 머리 좋네.”
“네, 저 머리 진짜 좋아요.”
“근데…… 그 수정 구슬 아직 내 손에 안 들어왔어. 아직 온 미래가 아니라고.”
“그럼 그 수정 구슬 어떻게 찾아요? 제가 찾으면 제가 직접 볼 수 있는 거예요?”
“아가씨는 집시도 아니고 마법도 못 하잖아. 찾을 수도 없거니 와 볼 수도 없어.”
내가 못 믿겠다는 눈으로 그녀 를 빤히 바라보자, 칸시아는 억울하다는 둣이 자신의 가슴을 쳤다.
“진짜야. 그 수정 구슬은 원하는 사람의 특정한 과거를 보여 주는 건데…… 워낙에 귀한 물건 이라 집시들 사이에서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드물어.”
“칸시아, 칸시아는 그럼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인데……”
나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왜 이러고 살아요?”
“왜? 난 내 인생에 만족해. 만 번을 회귀해도 난 쓰레기처럼 살 거야.”
“그럼 됐고요.”
다른 의미로 참 일관적이고 당당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굳이 훈계할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그럼 그 수정 구슬은 언제 찾을 수 있는데요?”
“아마도 서너 달 뒤에? 확실하지는 않고.”
“그러면 수정 구슬 찾고 나면, 꼭 제 친부모 좀 보여 주세요. 제가 태어났을 때를 보면 되는 거 아니에요?”
“뭐, 그렇겠지만.”
칸시아는 턱을 긁으며 대충 대답했다.
내가 다급하게 말했다.
“4500골드 값은 하셔야죠.”
“알았어, 알았어.”
그녀는 내 눈을 마주하지 않으며 슬렁슬렁 말했다.
도저히 믿음이 가지 않는 대답 에 나는 재차 다그쳤다.
“근데 왜 제가 어디 사는지도 안 물어봐요? 보여 주려면 찾아 와야 할 거 아니에요.”
“어디 살아?”
성의 없는 반문에 나는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불성실하고 거짓말도 잘 하는 집시에게 약속을 받아 낼 자신이 없었다.
너무 쓰레기처럼 살아서 잃을 것도, 원하는 것도 없는 사람을 다루는 건 불가능했다.
“세르이어스 공작성이에요. 칸시 아의 이름을 대면 무조건 나를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미리 얘 기해 놓을게요.”
“좋은 데 들어갔군. ……이 아니라, 도망 안 쳤어? 거기 졸딱 망하잖아.”
“직접 구해 주려고요. 제가 마 음이 여리고 너무나 착한지라 두고 볼 수가 없어서.”
“..............”
“수정 구슬 들고 오시면, 그래서 제 친부모를 보여 주시면 5000골드 더 드릴게요.”
“뭐.”
칸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가서 돈이 급하면 생각해 보지, 뭐.”
역시 이런 것으로 묶어 두기에는 너무 신뢰가 안 가는 사람이었다.
아직도 그녀의 손목은 내게 꽉 잡힌 상태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칸시아.”
“왜, 또!”
“제가 보기에는 반년 안에 크게 아프실 거거든요?”
손목에 느껴지는 맥박을 재빨리 확인하고 내린 결론이었다.
“어디가? 또 왜? 심각한 거야?”
칸시아는 나의 의료 실력은 무조건적으로 믿는지, 간절하게 물었다.
“뭔데? 대체 뭔데?”
나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쑥했다.
“확실하진 않고요.”
칸시아와 똑같은 말로 받아치니 그녀의 표정이 묘해졌다.
“저도 중상이 본격적으로 나타 나야 자세히 알 수 있어서.”
가늘어지는 칸시아의 눈을 보며 내가 여유롭게 말했다.
“그때가 되면 공작성으로 오세요. 제가 천재 의사라는 건 바뀌 지 않았으니까.”
“거짓말!”
칸시아가 짜중을 냈다.
“너, 지금 다 알면서 수정 구슬 때문에 그러는 거지? 내가 너한테 찾아갈 줄 알아? 세상에 의사가 얼마나 많은데!”
“예, 많죠.”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리체 에스텔은 한 명뿐이죠.”
칸시아의 손목을 놓아주고, 나는 가 봐도 좋다는 둣이 팔짱을 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때 가서 수정 구슬을 보여 주신다면 치료를 생각해 볼게요, 뭐.”
그녀가 나를 약 올렸던 말 그대 로 돌려주니 고소하기 그지없었다.
칸시아는 나를 노려보며 씩씩대더니 벌떡 일어나 홀연히 걸어서 가게를 빠져 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차를 마시며 콧노래를 불렀다.
어차피 마력이 복잡하게 꼬여서 생긴 병이라 내게 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협조적으로 나왔으면 나도 이렇게까지 치사하게 나가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한숨을 쉬다가 한참 후에 야 내 팔찌가 사라진 것을 눈치 챘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슬쩍 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 할머니가 손버릇도 안 좋 네……’
자신이 쓰레기라고 당당히 말하 는 이유가 있었다.
‘반년 안에 수정 구슬 가지고 다시 봐요, 칸시아.’
나는 더 이상 내가 치사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
디엘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열 다섯 번째 가게의 창문을 기웃거리는 중이었다.
‘진짜, 무슨 일을 하려고 그러는 지……’
아르가의 밑에서 별일을 다해 봤지만 황실이 얽힌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해군들에게 수소문한 바로는, 황태자는 당연히 거리의 유홍에는 관심이 없어 조용하고 사람이 없는 곳에 있을 거라고 했다.
‘괜히 잘못 얽히면 안 되는데, 괜찮겠지?’
당연히 걱정이 되었지만, 반쯤 은 기대가 되기도 했다.
리체가 이렇게 영문도 모르는 일을 부탁할 때마다 자신은 짐작도 하지 못한 의외의 사건이 터지곤 했으니까.
처음에는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아도 결국에는 모든 결과를 상황으로 보여 주었다.
‘뭐, 페렐르만 자작님도 마찬가 지인가.’
맨 처음 아르가가 자신에게 열 세 살 먹은 조수의 친구가 되어 주라고 했을 땐 기가 막힐 지경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르가보다도 리체 옆에 있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래도…… 황실이 얽히면 생 각보다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데 감당할 수나 있올지. 어찌되 었건 평민이면서.’
디엘은 한숨을 쉬며 주위를 두 리번거렸다.
리체가 무슨 일을 벌이든 실패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일을 황실에서 과하 게 여길까 봐 그것이 걱정이었다.
‘아, 여기 계시네.’
자유 도시를 헤맨 지 두 시간 만이었다.
디엘은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어느 카페의 창문을 통해, 단정하게 허리를 세우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은발의 남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대로 가게 상호를 외 우고, 리체와 약속한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한도 끝도 없이 걱정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몸이 충실하게 그 녀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
디엘이 황태자를 찾았다는 말을 듣자마자, 나는 디엘에게 잔뜩 짐을 들게 하고 당장 길을 나섰다.
그리고 가면서 그가 해야 할 일을 일러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그렇게까지 해야 해?”
“응, 그래야 해. 다 외웠지?”
“외우긴 외웠는데……”
“좋은 연기 부탁해, 디엘.”
“……응.”
“네 역할이 진짜 중요해.”
디엘은 아무래도 황태자 앞에서 연기를 한다는 것 자체를 찝찝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부탁’이라는 말에 한숨 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드 황태자는 자유 도시에서 도 꽤 구석에 있는 고급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다고 했다.
도착하니 가게 앞에 종업원들이 겹겹이 지키고 있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아.’
아무나 들여보내는 곳은 아닌 듯했다.
“레이디, 잠시만요.”
내가 당당히 고개를 들고 가게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가게 앞을 지키고 있던 웨이터중 하나가 앞을 막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