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38화
“당장 챙긴 돈, 다 내놔!”
“사기죄로 고발하기 전에, 얼른!”
해군들 한 무리가 할머니를 둘러싸고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뻔뻔하 게 그 가운데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내가 뭐! 내가 뭐!”
나는 팔짱을 끼고 그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너희가 운이 더럽게 안 좋은 거지, 왜 내 탓이야!”
“이 더러운 집시가 끝까지!”
내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자, 상황을 궁금해한다고 생각한 호위 기사 중 한 명이 설명을 시작 했다.
“저 집시 앞에 있는 카드들을 볼 때…… 야바위꾼인 것 같습니 다.”
“야바위요?”
“네, 협잡꾼인 거죠. 사기도 적당히 쳐야 하는데 욕심을 낸 모양입니다. 그것도 해군들을 상대로”
“그럼 잡혀가요?”
“중거가 없다고 끝까지 발뺌하겠지만 저러다가 맞아 죽을 수도 있어요.”
호위 기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해군들이 얼마나 거친지 모르 는 모양인데……”
과연 분위기는 점점 더 험악해 지고 있었다.
이제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빙 둘러싸서 그 난장판을 구경하고 있었다.
“할멈, 진짜 죽고 싶어?”
“홍, 너희들이 운이 안 좋은 걸 왜 죄 없는 불쌍한 집시한테 화 풀이야!”
“집시니까 무슨 마법을 썼겠지!”
“처음에 왔을 땐 집시인 거 몰랐나? 그리고 집시라고 해서 이 상한 마법 쓰는 사람 아니야!”
‘이상한 마법 쓰는 거 맞으면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생각했다.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왜 사형 선고를 받고 나와 같은 방에 갇힌 건지 알 것 같았다. 지난번 경비병들에게 끌려간 것 도 그렇고…….
뭔가 안 좋은 일을 하면서도 뻔뻔하기까지 한 할머니인 듯했다.
“잠시만요.”
나는 그 난장판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호위 기사들이 아주 난감해하며 나를 따라 우르르 몰려왔다.
나의 등장에 역시나 많은 사람 들의 이목이 쏠렸다.
이 막장으로 치닫는 구경거리에 곱게 차려입은 아가씨가 끼어들 줄은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아주 파렴치한 할머니 입니다.”
해군 하나가 할머니의 앞에 침을 뱉으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어느 귀족가 영애이신 줄은 몰 라도, 괜히 얽히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이분이 사기를 치셨다. 이 말이죠?”
“아냐!
할머니가 버럭 화를 냈다.
“그냥, 이 인간들이 운이 더럽 게 없을 뿐이었다고!”
“사기가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계속 돈을 잃느난 말이야, 이 집시야! 지금 네가 털어 간 돈이 얼마인 줄이나 알아?”
“고발해, 고발해! 고발장에 뭐라 고 쓸 건데? 도박에서 졌다고? 내가 속임수 썼다는 중거가 어디 있어? 난 한 푼도 못 줘!”
또 다시 분위기가 과열되기 시작했다.
해군들이 씩씩거리며 뭐라고 받아치려고 할 때, 내가 한 발짝 더 다가갔다.
“할머니.”
나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알죠?”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다 그녀가 팩 고개를 돌렸다.
“몰라.”
“그래요?”
나는 팔짱을 끼고 다시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해 군 하나에게 말을 걸었다.
“대체 무슨 게임이었는데요?”
“간단합니다. 카드의 홀짝을 맞추는 게임이었습니다.”
“몇 게임을 지신 거예요?”
“이 할멈이 연달아 정확히 31판 을 이겼다고!”
“그럴 수도 있지! 그게 불가능한 일이야? 어?”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세상에, 욕심을 내도 이렇게까지—.
‘적당히 좀 하지.’
내 표정을 본 할머니가 슬금슬 금 눈을 피했다.
“홀짝을 맞출 확률은 절반이고, 앞의 결과가 뒤의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으니. 대충 계산하면, 열 번을 연달아 이길 확률은 1000 분의 1이 넘어가요.”
나는 냉담하게 말했다.
“대충 그렇게 계산하면 10억분 의 1보다도 작은 확률인데……”
구경꾼들까지 조용해졌다.
“치리아꽃이라는 독풀이 있어요. 그걸 먹으면 이론적으로 5억 명 중 한 명은 살거든요.”
모두가 나를 뻔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물 흐르듯이 말을 이었다.
“고발장 쓸 때 그렇게 쓰세요. 치리아꽃을 먹는 것으로 재판의 결과를 내자고요.”
“와, 이 아가씨 똑똑하네.”
해군 중 하나가 입을 벌리며 박수를 쳤다.
“좋아. 당장 고발장 쓰러 가자 고. 이 정도면 아주 명쾌한데.”
할머니가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5억 명 중 한 명이 사는데, 그 풀을 나보고 먹으라고? 어?”
“살 수도 있죠. 그게 불가능한 일인가요?”
조금 전 할머니가 말했던 것을 그대로 인용한 나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쏙했다.
“심지어 31판 연달아 이길 확률의 절반도 안 돼요. 엄청 자비로운 처사라고요.”
그리고 해군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근데 대체 총 얼마를 잃으신 거예요?”
“세 명이서 총 4360골드입니다, 아가씨.”
“와.”
나는 순수하게 감탄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대단히도 해 먹었네요.”
내가 가져온 돈이 5000골드였다.
말이 5000골드였지, 상당히 많 은 내 월급을 1년 치나 모아온 것이었다.
공작성에서 온갖 고급 의식주가 다 해결되어, 월급을 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 황태자님도 계신다면서요.”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마침 전 치리아꽃도 가지고 있어요. 고발장 작성하면 여기서 바로 약식 재판을 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야!”
드디어 할머니가 나를 바라보며 버럭 화를 냈다.
“너 진짜 왜 이래?”
“네?”
내가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그녀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딱 보니 잘 먹고 잘 살게 된 것 같은데, 감사하다고 머리를 조아려도 부족한 판에 왜 나한테 시비냐고!”
“역시, 저 아시나 보네요.”
사실을 확인한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떡하실래요?”
나라고 뭐, 이렇게까지 벼랑에 몰고 갈 생각은 아니었다.
처음 부터 나를 모른다고 잡아떼지만 않았어도.
“치리아꽃을 드시겠어요, 돈을 다 돌려 드리겠어요? 아니면 .......”
쉽게 돈을 돌려줄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끝까지 버티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씩 웃으며 덧붙였다.
“저랑 얘기 좀 나누시겠어요?”
물론 이 중 난이도가 가장 쉬운 거야 정해져 있었다.
***
집시 할머니의 이름은 칸시아 멜로니아라고 했다.
물론 믿을 수는 없었지만, 어쨌 든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칸시아 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한 거예요?”
“어떻게 하긴. 설명했잖아, 시간을 돌렸다고.”
칸시아가 툴툴거리며 내가 사 준 샌드위치를 허겁지겁 먹었다.
나는 결국 샌드위치를 하나 더 시킬 수밖에 없었다.
“의사 아가씨가 함부로 마력을 받아들여서 그렇다며.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아주 죽을 것 같더니, 그것 때문이라는 걸 그때 알았지.”
칸시아는 벌써 다섯 개째의 샌 드위치를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괜한 짓해서 아주 넘쳐 나는 마력으로 마법을 쓴 것뿐이야. 과연 아가씨 말대로 시간을 돌려 그 마력이 없어지니 멀쩡해지더라고.”
“홈.”
“물론 넘치는 마력이 사라졌으니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순 없겠지만.”
“금지된 마법이죠, 그거?”
“뭐…… 금지라는 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거니까.”
칸시아가 말꼬리를 흐리며 내 눈을 피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또박또박 물었다.
“제 말은, 부작용이 있는 마법 이냐, 이 말이었어요.”
“부작용이라는 것도 뭐, 사람마 다 기준이 달라서……”
“있다는 말이군요.”
디엘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부 터 뭔가 찜찜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별다른 증상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내가 쓴 마법은 세상의 모든 시간을 돌리는 것이었어. 아가씨 와 내 기억만 제외하고 말이지.”
칸시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가씨가 살려 달라며! 어차피 나만 기억이 있으면 아가씨도 결 국 똑같이 죽을 거라서 부탁을 들어준 거라고.”
“그건 그렇지만……”
“똑똑한 아가씨라서 그런지 머 리를 잘 굴렸네. 완전 팔자 고쳤어, 그래.”
칸시아는 내 차림새를 훌으며 히죽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세 명의 해군들에게 4500골드를 주며 고발을 취소하고 칸시아를 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이 사람과 급히 처리할 일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입장에서는 손해 보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합의하고 돌아섰다.
귀족 영애 같은 차림새에, 호위 기사들에, 단번에 내놓는 4500골 드까지.
칸시아가 나를 그렇게 생각할 여지는 충분했다.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 냐?”
“이건 그냥 제가 잘나고 똑똑해 서 얻을 수 있었던 현재인 거죠”
나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칸시아도 미래를 다 알지만 별 로 잘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은 걸요? 해군들에게 맞아 죽기 직전이었잖아요. 왜 딴 돈을 안 돌 려준 건데요?”
“사채를 썼어.”
“하.”
“어차피 돈 못 갚으면 죽을 지경이었다고. 그나마 해군들은 멍청해서 우길 수라도 있지, 사채 업자들은 아주 독종들이야.”
칸시아는 콧방귀를 꼈다.
“아가씨가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냅다 우기면 몇 대 맞는 걸로 끝 날 수도 있었다고.”
“해군한테 몇 대 맞으면 죽을 수도 있어요. 해군이 무슨 경비병인 줄 아세요?”
나는 팩 쏘아붙이고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러니까 그 부작용이 뭐예요?”
“부작용이라기보다는…… 그냥 부가 기능? 그 정도로 말을 바꿀 까? 괜히 내가 몹쓸 짓 한 것 같잖아.”
칸시아가 귀를 후비며 딴청을 부렸다.
“그래서 그 부가 기능이 뭔데요?”
“원래 미래와 실제의 미래가 다르니까 생기는 현상이야. 무의식 중에 자꾸 미래가 보이는 거지.”
“……미래가 보인다고요?”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