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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37화 (37/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37화

“안 됩니다.”

시야가 흐릿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딱딱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 다.

“타협의 여지는 없습니다, 공작님.”

주위를 둘러보니 처음 보는 저택 안이었다.

공작성보다야 규모는 작았지만 꽤 화려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분위기였다.

“리체, 공작님 인품이 좋지 않은 건 너도 잘 알지 않니. 절대 안 된다. ”

분명한 것은 내가 아주 난감한 상태라는 것이었다.

“차라리 시끄럽게 미쳤다면 약이라도 먹이지, 조용히 미친 건 약도 없어!”

믿을 수 없게도, 내 입에서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단어가 홀러 나왔다.

“아빠. 하지만 우리는........”

“우리라니!”

‘아빠’가 테이블을 광, 하고 치 니 찻잔의 찻물이 흔들렸다.

“네가 결국 저 번지르르한 외모와 악마 같은 속삭임에 훌려 버리고 말았구나! 다 저놈 얼굴 탓이야! 저놈 잘못이라고!”

결국 ‘저놈’이라는 호칭이 나와 버렸다.

나는 끙, 하고 신음을 홀렸다.

‘아빠’의 얼굴은 흐릿했다.

내 옆에 앉아 있는 검은 머리의 남 자가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 않았다.

두 남자가 얼마간 대화를 나누었지만 분위기는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에는 ‘아빠’가 벌떡 일어났다.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안 돼! 공작이든, 황태자든, 용이든. 신이든, 뭣도 다 안 된다고!”

그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소리 쳤다.

“너! 어릴 때 내가 기를 써 놓고 살려 놨더니, 감히 내 딸을 노려? 이럴 줄 알았으면……”

곧이어 찻잔이 날아올 것 같아서 나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아빠! 안 돼요!”

그 찻잔 비싼 거라고!

아직 차가 식지도 않았어!

“리체, 리체?”

“아, 안 돼…… 안 돼……”

“리체!”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새벽녘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악몽을 꿨니?”

“세상에, 마님!”

너무 놀라서 나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당연히 나를 재우고 공작 부인의 방에 돌아갈 줄 알았지, 이렇게 여기서 불편한 자세로 엎드려 주무실 줄은 몰랐다.

“계속 제 옆에 계셨던 거예요?”

“누구보다도 외로웠을 텐데 간 밤은 함께 있어 줘야지.”

“그, 그래도......”

나는 내가 한 일에 대한 대가를 받는 데에는 상당히 당당한 편이 었다.

하지만 이런 감성적인 배려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민망했다.

내가 안절부절못하자 공작 부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안 그래도 악몽을 꾸는 것 같 던데.”

“네?”

“끙끙거리면서, 안 된다고 몇 번을 중얼거리더구나. 나쁜 꿈을 꿨니?”

“아……”

공작 부인을 보고 너무 놀란 나 머지, 꿈 내용은 벌써 대부분이 기억나지 않았다.

“특별히 괴롭거나 그런 꿈은 아 니었는데…… 뭔가 몹시 난감했어요. 꿈에서는 가족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하아…… 그것 보렴.”

공작 부인이 내 손을 잡고 다독여 주었다.

“그 못된 놈들이 네게 심리적 타격을 줘서, 그게 꿈으로 나타난 거야.”

“그렇군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가족과의 곤란한 한 때 를 방어기제로 떠올렸나 봐요.”

“리체, 오늘은 늦게 들어와도 돼.”

공작 부인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싱긋 웃었다.

“자유 도시에서 재미있게 놀다 오럼. 이 모든 나쁜 일들이 다 잊히도록 말이야.”

“네.”

나는 마주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암, 이 모든 나쁜 일들이 다 잊 히도록 자유 도시에서 바쁘게 움직일 계획이었다.

디엘이 섭외해 준 하녀는 정말 영혼을 다해서 나를 꾸몄다.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반짝거리 는 머리 장식을 단 나는 누가 봐도 돈 많은 귀족 영애로 보였다.

심지어 공작 부인은 세르이어스 공작가의 전용 마차까지 내주었다.

디엘은 마차 안에 내가 챙기라고 했던 꽤 많은 짐을 이미 다 싣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리체.”

그가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을 줬네?”

“그래 보이면 다행이고.”

자유 도시에서는 누구나 자유롭 게 어울릴 수 있다.

평민과 귀족 도 신분의 경계 없이 먼저 말을 걸고 대화를 청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평민이 자유 도시에서 귀족들과 어울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말이 ‘자유’지, 대부분의 가게에서는 행색이 가난한 평민 같으면 아예 들여보내 주지도 않았다.

자유 도시는 물가도 비싸서, 어지간한 것들은 일반 평민들의 돈으로 살 수도 없었다.

‘지난 생에선 나도 자유 도시에 가 본 적이 없었지.’

결국 자유 도시에서 정말 자유 를 누릴 수 있는 대상은 돈 많은 상인들뿐이었다.

귀족이나 황족들도 그걸 알기에 자유 도시에서 평민들과 어울려 주는 것이었다.

자유 도시에서 대놓고 자신의 후견인이나 정치 자금을 마련하 는 귀족들도 많았다.

제이드 황태자는 아마 자신과 오랫동안 싸워준 평민 출신의 용병들을 위해 자유 도시를 방문했을 것이다.

어차피 평민 용병들을 위한 방문이니, 그는 아예 가장 고급진 곳에서 시간만 때우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제이드 황태자를 잘 모르지만, 어쨌든 귀족이나 황족들은 될 수 있으면 평민들과 얽히는 걸 싫어 하니까.

그렇다면 입장에서부터 막히지않게 신경 써서 꾸미고 가야 했다.

“엄청 예뻐.”

“당연하지. 들인 돈하고 시간이 얼마인데.”

담담하게 대답한 나는 마차 밖 을 바라보며 이상한 기분에 휩싸 였다.

뒤에는 공작 부인이 붙여 준 호위가 잔뜩 따라붙었다.

오늘은 귀족 영애나 돈 많은 집 딸처럼 보이고 싶었던 게 사실이지만, 이거 완전 귀족이 된 느낌인데.......

자유 도시에 도착해서도 고급스 러운 마차와 따라붙는 호위들 때 문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대놓고 묻지는 않았지만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신들이 아직 잘 모르는 귀족 가의 영애거나, 신흥 부자의 딸 이거나.

뭐 그렇다고 생각하겠지.

자유 도시는 해군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온갖 가게들이 잔뜩 물건들을 진열해 놓고 호객 행위를 하고있었다.

거의 다 엄청난 고급 물 품에 눈이 튀어나올 만한 가격이 었지만 모든 가게가 다 호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승전하고 돌아 가는 해군들이 두둑해진 주머니로 고향의 가족들을 위한 선물들 을 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일부러 현금을 넉넉하 게 들고 왔다.

별별 가게가 다 있고, 물량도 충분해서 에르안의 귀환 선물을 사기에 딱 좋을 것 같았다.

“디엘.”

“응, 말해.”

내가 이름만 불러도 무언가를 시키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아차리 는 디엘이 재빨리 대답했다.

“나는 지금 옷도 불편하고, 호위도 많이 붙어서 움직이기가 힘들어.”

“응”

“그러니까 네가 직접……”

나는 남들이 듣지 못하도록 디 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이드 황태자님을 찾아와.”

디엘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화, 화, 황태자님?”

“너보고 데려오라는 거 아니니 까 졸지 말고.”

아무리 페렐르만 상단의 엘리트라고 해도, 디엘 역시 평민 출신 이었다.

“그냥 어디 계신지만 알아 와. 어차피 가는 건 내가 가. 그 정도로 주제 모르지 않아.”

황태자를 찾아오라는 말에 그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리체…… 황실까지 끌어들여서 뭘 하려고……”

나 역시 그저 공작가 주치의의 조수일 뿐이었기 때문에 디엘이 망설이는 것도 이해가 갔다.

“까딱 잘못하면 사형이야.”

물론 나만큼 그걸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난 사형 선고까지 받아봤다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 물 론 나중에는 결국 알게 되겠지만, 이건 극도로 조심해야 할 사 안이라고.”

평소엔 내 말에 토를 달지 않는 디엘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디엘의 말은 다 맞았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평민과 황족의 차이는 말 그대로 어마어마했으니까.

내가 진정으로 화나지 않았다면 굳이 걸지 않았을 모험이었다.

“디엘.”

그래서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다녀와, 얼른. 시간이 꽤 걸릴 거야. 자유 도시는 크고, 여기저기 해군들이 넘쳐 나니까.”

“...........응”

“난 쇼핑을 좀 하고 저기 저 카페에 있을 테니 한 시간 뒤에 만나.”

디엘은 포기한 둣,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알았어.”

디엘을 보내고, 나는 에르안의 선물을 사기 위해 여러 가게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과연, 해군이 붐비는 가게들은 차림새가 그럴듯하지 않으면 아예 사람을 들여보내지도 않았다.

말이 평민들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도시지, 결국 차별은 어 쩔 수 없었다.

“줄 서세요.”

가게 점원들은 들어오려는 사람이 해군이 아니거나 좀 돈이 없어 보이면 눈을 내리깔며 턱을 치켜올렸다.

“지금 사람들이 많아서요.”

물론 호위를 잔뜩 대동하고 힘을 주어 꾸민 나를 거부하는 가게는 없었다.

덕분에 나는 줄을 서지 않고도 마음껏 가게에 들어갈 수 있었 다.

순진하게 줄을 서고 있던 사람들이 왜 저 사람은 그냥 들어 가냐고 항의하면, 예약 손님이라는 말이 들려오곤 했다.

나는 그 어떤 곳도 예약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지난 생애에 안 온 이유가 있 지.’

예산은 넉넉하다 못해 넘치는데 딱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남성용 향수와 크라바트, 손수건 매장을 모두 돌아봐도 눈만 핑핑 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껍데기는 귀족 영애처럼 꾸였지만 뭘 볼 줄을 몰랐던 것이다.

다른 귀족 영애들이나 부잣집 딸들처럼 패션이나 교양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디엘도 보내 버려서 조언을 청 할 사람도 없네……’

역시 평범한 선물은 포기하고 아예 비싸고 희귀한 걸 사야겠다 고 마음먹은 후 가게를 나오던 중이었다.

“이런 사기꾼!”

“할멈, 이런 식으로 하면 곤란 하지!”

“고발당하고 싶어, 엉? 우리가 누군지 알아?”

한쪽 구석에서 뭔가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무심하게 지나치려다가, 시야에 들어온 누군가를 보고 그대로 멈춰 섰다.

거적때기에 가까운 옷, 지저분하게 땋은 횐 머리, 주름진 익숙 한 얼굴.

5년 전 한 번 지나친 적이 있는, 나를 회귀시켜 준 바로 그 집시 할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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