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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36화 (36/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36화

“그래, 손가락을 하나씩 잘랐는 데도 말을 안 해요?”

공작 부인은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호아킨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체는 잘 모르겠지만, 공작 부인은 냉정하기도 하고 잔인하기도 한 사람이었다.

한스의 심문을 직접 지시한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를 극한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정말 아는 것이 없는지, 나오는 말이 없었다.

그냥 어떤 사람이 다가와 시키는 대로만 하 면 큰돈을 주겠다고 해서 승낙한 것밖에 없다고 했다.

한스는 망해 가는 연극단에 한 번 몸담아 본 적이 있는 떠돌이 거지였고, 그래서 출신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공작성에서 하녀가 둘이나 일을 벌이고, 아무 말도 없이 자살을 했어요. 비록 하나는 5년도 더 된 일이라지만.”

공작 부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리체를 해하는 것은 나와 에르 안을 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겠죠. 분명 우리를 무너트리려는 세력이 아주 오랫동안 활동하고 있는 거예요. 이유조차 알 수 없 는 것이 문제고.”

“하지만 사용인들을 다 내보낼 수는 없습니다. 새로 들이는 것이 더 위험해요.”

“그러니 늘 유의하는 것이 좋겠 죠. 리체의 안전에도요. 당장 내일 자유 도시에 가는 리체에게도 최고의 호위를 붙여 주세요. 그리고..”

그녀가 이를 갈았다.

“리체가 없는 사이에 한스와 에스더의 시체를 성문에 걸어 두세요. 공작성을 대상으로 무슨 짓 을 벌였다가 들키면 어떻게 되는 지 모두가 똑똑히 알 수 있게.”

호아킨은 고개를 숙이고 공작 부인의 방을 나갔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턱을 괴었다.

누군가 공작성을 노리고 있었다.

계속해서 경계했지만, 신중하기 그지없는 적은 아직도 눈앞에 보 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리체까지 잃을 뻔했다.

울먹이던 리체의 얼굴을 생각하 는 그녀의 얼굴에서 아까의 냉담한 표정은 사라지고 안타까움만 남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이 사건을 계기로 공작 부인은 중대한 결심을 하나 했다.

‘에르안이 오면 즉시 상의해 봐 야지.’

리체의 실망한 표정과 체리 바구니를 바라보던 처연한 눈빛을 떠을린 그녀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 시각, 에르안은 공작령을 향 해 서둘러 달려가고 있었다.

드디어 제국의 땅을 밟은 그의 얼굴에 환희가 어렸다.

“에, 에르안 님. 하루만, 하루만 쉬어 가면 안 될까요?”

“너희는 쉬어.”

오랜 항해로 인한 뱃멀미로 정신이 없는 기사들이 에르안에게 매달렸으나 그는 냉담했다.

“바로 가시면 몸 상하십니다. 하룻밤 묵어가도 공작령까지 3일이면 충분해요.”

지캘이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에르안은 전혀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누가 뭐래? 너희는 쉬고 천천히 오라니까. 어차피 너희가 있으면 나도 번거로우니.”

에르안은 이르비아에서 데려온 자신의 흑마에 올라탔다.

말 역시 주인을 닮았는지 계속 배에서 생활했는데도 전혀 지쳐 보이는 기색이 없었다.

푸르릉대는 흑마의 고삐를 잡으 며 에르안이 거의 통보하듯 말했다.

“나는 먼저 공작령으로 출발한다. 너희는 알아서 와.”

“에르안 님!

기사들이 필사적으로 외쳤으나, 에르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 을 달렸다.

그는 지금 당장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인생에서 서로가 유일하다고 가르쳐 준 사람, 어린 시절 약속한 대로 매일같이 생각한 사람.

***

그날 밤, 늦게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누구지? 디엘인가?’

이제는 내게 배정된 하녀도 없는데.

급히 잠옷 위에 무언가를 걸치는데, 예상외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체, 나란다.”

나는 후다닥 뛰어 방문을 열었다.

공작 부인이 편한 차림으로 내 방 앞에 와 있었다.

“마님, 어째서……”

“오늘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서 옆에 있어 주려고 왔어.”

나는 얼떨떨하게 공작 부인이 이끄는 대로 침대에 다시 누웠다.

마치 아주 옛날에 내가 공작 부인의 손을 잡아 주었던 것처럼, 그녀가 내 머리맡에 앉아 손을 잡았다.

몹시 불편하면서도 이상한 기분 이었다.

“그 사람…… 결국 입을 열지 않았다면서요.”

“그래.”

공작 부인은 한숨을 쉬며 대답 했다.

“버티기 힘들었을 텐데, 정말로 배후를 모르는 것 같더구나.”

“많이 고문하셨어요?”

“뭐, 평범하게.”

나는 굳이 그 ‘평범한’ 수준을 묻지 않았다.

내가 입을 다물자 공작 부인이 조용조용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적이 많아. 솔직히 말하면 누가 배후인지 지목도 못할 만큼.”

“……왜요?”

“선대 공작님이 돌아가시고, 나는 갑자기 이 영지를 다스려야 하는 입장이 됐지. 에르안은 계 속 아프고, 다들 세르이어스 공작가가 몰락하는 것 아니냐며 떠들었어.”

나름 공작 부인과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처음 들어 보는 깊은 속마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초반에 기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해서 모든 일에 강경하게 나섰단다.”

그녀가 강경하게 나섰다는 건 정말 잔혹했다는 얘기였다.

“그 과정에서 조금만 잘못해도 피를 보곤 했는데…… 그래서 원한을 가진 가신 가문들이 꽤 있 지.”

나는 5년 전 그녀가 온실 키푸르츠를 홈친 하녀를 참수하라고 명했을 때 아무도 놀라지 않았던 것을 기억했다.

상식적으로 도둑질 정도면 그냥 성에서 내쫓는 것으로 끝낸다.

아무리 독살 건을 외부 사람들 에게 숨겼다고는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결정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는 건 그동안 공작 부인이 사 소한 잘못도 크게 처벌해 왔다는 방증이었다.

“그런데 왜 너까지 노렸는지 모르겠구나. 아마도 내가 널 아끼는 것을 누구나 알게 된 모양이야.”

그건 당연했다.

어떤 주치의의 조수도 이렇게 호화롭게 살지는 않았다.

누가 봐도 나는 공작가의 엄청난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이렇게 나를 아낀다면…… 조금 이라도 배후에 대해 운을 띄워 봐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를 노린 건…… 아마 외부인을 성에 투입시키고 싶어서 아닐 까요. 지난 5년간, 저희는 정말 외부인을 받지 않았잖아요.”

“내 음독을 알아챈 이후에 엄청 나게 경계한 건 사실이지.”

“아마 저를 내보내거나 죽이고, 다른 조수를 첩자로 넣을 계획이었을 거예요.”

“……그렇지.”

“제가 새로 받은 제 조수, 아론 칼립소는 디엘보고 열심히 감시 하라고 할게요. 걱정 마세요. 문 제는 에스더처럼, 그 전부터 있었던 사람들인데......”

“그렇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사람들.”

“정말로 배후를 짐작하지 못하시겠어요?”

“내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아.”

공작 부인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오기 전, 그러니까 영지를 맡았던 초반에 나는 잘못 앞에 타협이라곤 없었단다. 그래서 내 눈앞에서 저주를 퍼붓고 간 가신들도 있었고.”

“..............”

“물론 그때마다 내 편을 들어 준 건 로만이었지. 그 애 덕분에 위기를 넘긴 적도 많았고. 어느 날은 단검이 날아오는데 로만이 대신 막아 주기도 했어. 아직도 왼팔에 그 상처가 남아 있단다.”

예상은 했지만, 공작 부인은 전혀 이시더 남작을 배후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이시더 남작은 공작 부인에게 심리적 빚까지 지워 놓고있는 모양이었다.

작은 위기들에서 구해 주면서 몇 년 후를 위해 큰 그림을 그리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치밀하기 그지 없었다.

내가 미래를 알지 못했더라면 나 역시 의심하기 힘들 만한 서 사였다.

그러니까 결국 이 거대한 영지를 차지한 것이겠지만.

“그래…… 그게 혈연이겠지.”

나는 목을 간질이는 배후의 정체를 결국 숨길 수밖에 없었다.

아직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고, 중거도 없는데다 공작성에서 의 내 위치는 결국 고용인에 불과했으니까.

“날 끔찍하게 생각하는 로만에 게 나는 언제나 냉담했단다. 영지 관리 능력이 없고, 그냥 이상 하게 정이 안 간다는 이유만으 로.”

나는 공작 부인의 촉에 엄청나게 감탄했다.

“하지만 로만은, 영지를 공포 정치로 지배하느라 바빠 내가 에르안마저 방치할 때…… 웨데릭 까지 꼬박꼬박 데려와 에르안의 말벗이 되어 주도록 했단다.”

뭐라고 판단이 불가능한 문제였다.

실제로 공작 부인의 초반 공포 정치는 꽤 효과를 보아서, 공작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영지가 꽤 합리적으로 잘 돌아갔으니까.

공작이 죽었다며 세금을 함부로 올리거나 안하무인으로 굴던 가신들이 초반에 많이 그녀의 손에 사라졌었다.

그러니 평민들 사이에서는 그녀 가 냉철하고 인간미가 없다는 소 문이 돌면서도, 일을 잘한다는 평가가 늘 따라다니곤 했다.

“그, 그렇죠. 하지만 웨데릭 님이 정말로 에르안 님을 위했는지는......”

“에르안은 나보다도 웨데릭을 많이 따랐으니까.”

끝까지 그를 많이 따른 건 사실 이었다.

나는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그런 걸 생각하면 가족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지, 그래서 네가 얼마나 상심했올지 알 것 같구나.”

“..............”

“리체.”

그녀는 내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나는 정말로 너를 딸처럼 생각 한단다.”

“마님, 저는 평민이에요. 그건 정말 큰일날 소리이세요.”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제국은 귀족과 평민의 경계가 뚜렷했다.

내가 회귀하지 않고 그냥 열셋 부터 여기서 살았다면 모를까, 이전 생의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엄청난 신분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나는 공작 부인도, 에르안도, 페렐르만 자작도 먼발치에서나 볼 수 있는 위치였다.

이런 대화는커녕, 인사조차도 건네지 못할 사이였던 것이다.

“진심이야. 그래서……”

그래도 누군가 옆에서 손을 잡 아 주니 마음이 편해져서 사르륵 눈이 감겼다.

“……정말 가족이 되어 주고 싶 구나.”

생각해 보니, 나도 누군가가 이렇게 잠이 들 때까지 곁을 지켜 주는 것이 처음이었다.

맨 처음 공작 부인이 왜 내 손을 잡고 잔 다음 딸기 케이크를 보내 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만큼 따뜻한 기분이었다.

나는 그대로 잠에 빠졌다.

그때까지 나는 공작 부인의 말 의 뜻을 잘 몰랐다.

공작 부인은 절대로 허언을 하지 않는 성격이 라는 걸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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