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35 화
“그래도 위로해 주고 싶구나.”
내가 한심해서 그런지, 아니면 실망해서 그런지, 나는 공작 부 인의 품에서 살짝 울었다.
그러면서 나는 결심했다.
이렇게 시간만 끌자는 마음으로 경계만 하면서 살 수는 없었다.
‘아론 크릴소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개자식들, 두고 봐라.’
상대가 덫을 쳤다면, 이제는 피 하기만 할 게 아니라 더 큰 덫을 쳐야 할 때였다.
소극적으로 그냥 에르안만 지키며 시간을 보내다가는 또 이런 꼴을 당할 수도 있었다.
‘친부모를 이용하다니……’
너무 악독해서 저절로 개인적인 복수심이 치밀어 올랐다.
어차피 머리카락과 마력 검사를 통과했더라도, 조작할 수 없는 최종 검사에서는 바로 들켰을 것이다.
하지만 최종 검사는 시간이 정말 오래 걸렸다. 그러니 병든 아내 이야기를 하며, 90% 일치라 고 하니 일단 얼굴이라도 보자고 데려 갔겠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치밀했다.
어차피 에스더는 죽었고, 한스도 고문을 받다가 비슷하게 되겠지만 거기서 끝낼 일이 아니었다.
“마님.”
“그래, 그래. 뭐든 말해 보렴.”
공작 부인은 어쩔 줄 모르며 내 어깨를 쓸었다.
그래서 나는 훌쩍거리며 말했다.
“가족은 못 찾았지만, 그래도 지난번에 제가 지목한 제 조 수…… 뽑아 주실 수 있으시죠?”
진정한 복수는 배후 세력에게 해야 했다.
‘최선을 다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괜찮겠니? 이 상황에서 외부인을.......”
“하지만 저는 그 사람이 마음에 들어요. 혹시 곤란하시다면……”
“아냐, 아냐.”
공작 부인이 재빨리 대답했다.
“당연히 네게 붙여 주도록 할 게. 한 명이면 되겠니? 두 명은 어때? 아니 열 명……”
“아뇨, 진짜 그 한 명이면 돼요.”
나는 황급히 눈물을 닦고 한숨 을 폭 쉬었다.
여기서 더 슬퍼하다가는 정말 내 밑에 열 명의 조수가 생길 것 같았다.
공작 부인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리체, 괜찮니?”
“사실 지금 당장은 안 괜찮지만, 괜찮아질 거예요.”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어차피 없어도 잘 살아온걸요.”
공작 부인은 가만히 나를 보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리체, 매일 연구만 하고 공작 성에 틀어박혀 있으니 지루할 것같은데.”
“네? 별로……”
“아냐, 이럴 때에는 기분 전환 이 필요한 법이란다. 하루 정도만 자유 도시에서 놀고 오는 게 어때?”
자유 도시라면 공작령에서 그다 지 멀지 않은 관광지였다.
평민, 귀족, 황족 가릴 것 없이 즐겁게 모여서 맛있는 것을 먹고 온갖 화려한 물건들을 쇼핑하는 재미있는 도시로 유명했다.
별로 갈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공작 부인은 내 시무룩한 표정을 보고 재차 말했다.
“귀환 중인 제이드 황태자님과 그 해군들이 머물고 있어서 자유 도시 전체가 아주 활기차다는구나. 한번 구경 갔다 와. 그러고 보니 그동안 제대로 휴가도 주지 않았구나.”
“하지만 저는 이 성의 주치의의 조수……”
“하루 사이에 별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단다. 호위를 잔뜩 붙여 줄 테니 다녀오렴.”
내가 좀 망설이자 그녀가 재차 말했다.
“아까 지켈 경의 비둘기가 왔는데, 에르안은 3일 후에나 도착한다는구나. 내일 하루 정도는 놀 고 와도 돼.”
공작 부인은 내 어깨를 두드려 준 뒤, 완전히 바뀌어 버린 싸늘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나는 그동안 그 망할 놈이 왜 이딴 짓을 벌였는지, 어떻게 해 서든 입을 열게 할 테니까.”
문득, 나는 공작 부인이 실컷 그를 고문하기 위해 나를 내보내 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었다.
하지만 어차피 큰 기대는 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죽어버린 두 하녀와 이시더 남작의 치밀함을 볼 때, 한스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만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 해서 중거도 없이 공작 부인의 남동생을 지목할 수는 없어서 나는 한숨을 삼키며 대답 했다.
“……네. 내일 잠시 다녀올게요, 그럼. 내일 아침에 출발하여 한 나절만 놀고, 저녁에는 곧바로 돌아오겠습니다.”
원래는 딱히 갈 생각이 없었으나 한마디가 내 마음을 끌었다.
‘제이드 황태자?’
반란군을 단숨에 소탕해 버리던 그의 이름이었다.
원래는 과거의 악연으로 인해 절대로 얽히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번 일로 생각이 좀 달라졌다.
하긴, 악연도 아니었다.
그가 무슨 악의가 있어서 내게 사형 선고를 내린 건 아니었으니 까.
그는 그냥 반란군의 의사로 유명한 ‘리체 에스텔’의 이름만 보 았을 뿐이었다.
반란군은 어떻게 해서든 황태자 에게 소탕되기 마련이고, 그는 최후의 승자였다.
지금까지는 굉장히 소극적으로 세르이어스 영지만 지킬 생각이었지만…….
‘감히 나를 건드려? 똑똑한 사람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 려주지.’
자기애가 강한 나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처사였다.
원래는 얽힐 생각이 없었지만, 이렇게 된 마당에 제이드 황태자와 가능하다면 안면이라도 터 두 는 것이 좋았다.
‘아론을 어떻게 잘 관찰해서 반란군이라는 증거를 잡으면 홀라당 일러바쳐야지. 여러 가지 방 향으로 어떻게든 죽게 해 주마.’
그들의 함정에 걸리지 않는 것도 중요했지만, 이제 나는 아론을 통해서 주체적으로 덫올 놓아 보기로 했다.
물론 이 방법에는 여러 가지 장 애물이 있었다.
한낱 평민인 내가 황태자와 말이라도 섞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이시더 남작과 웨데릭의 뒤를 캐내는 것도 쉽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중거를 잡는다고 해서 황태자를 또 한 번 알현할 수 있 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거야. 망할 놈들, 두고 보 자.’
심지어 자유 도시였다.
황태자를 만날 수 있는, 운 좋 으면 대화라도 해 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이번 일로 해서 내 목표가 ‘세르이어스 영지 지키기’에서 ‘이시 더 남작과 웨데릭 처치하기’로 바뀌었다.
웨데릭과 이시더 남작은 어쨌든 공작 부인과 에르안의 친척이었다.
공작 부인은 몰라도, 착하고 정이 많으면서 아기 같은 에르안은 마음이 약해져 그들을 살려 줄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최악의 상황에서 아예 박살을 내 줄 황태자와 끈을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
돌아와 보니 페렐르만 자작에게서 편지가 와 있었다.
혹시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해 나는 페렐르만 자작이 어디에 있든 주기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나는 공작 부인은 아주 건강하며 에르안 님은 3일 후 정도에 도착하니 바로 각종 검사를 해서 결과를 알려 주겠다는 내용을 썼다.
‘이런 힘 빠지는 일을 자작님은 18년 동안…… 그것도 전국을 다 뒤져 가며…….’
가만히 성에 앉아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희망과 절망을 오가는 것도 사람 할 짓이 아닌데, 아르가 자작은 얼마나 힘들까.
나는 담담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녀를 매수해 제 머리카락과 손톱을 가지고 사기를 치는 사람이 왔었어요.
자작님도 사기 조심하세요. 페렐르만 상단의 외동딸 자리를 탐 내는 사람이 한둘이겠어요? -리체]
편지를 다 쓰고 봉하자, 때맞춰 디엘이 돌아왔다.
“리체.”
디엘은 슬슬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시킨 대로, 아니 네가 부탁한 대로 체리 바구니 버리고 왔어.”
“잘했어.”
나는 다 쓴 편지를 건네주며 다음 심부름을 시켰다.
“이거 아르가 자작님께 보내 줘.”
“응, 또 부탁할 건 없어?”
“내일 자유 도시에 갈 때 이것들을 가져갈 거야.”
한 번에 시키는 게 좋을 것 같 아서, 나는 책상에 앉아 단번에 메모를 작성했다.
디엘이 어깨 너머로 내 메모를 홈쳐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이걸 다?”
“응, 뭘 쓰게 될지 모르니까.”
정확히 말하면, 제이드 황태자의 상태가 어떨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준비할 수 있는 건 다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이제 에스더가 없으니 하녀를 배정해 주실 텐데....”
“아까 마님이, 오래 일한 하녀도 이 지경인데 누굴 붙이냐고 하셨어. 그래서 본인이 아끼시는 시녀를 주신다고……”
“아, 말도 안 돼.”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공작가 가신들의 방계 출신인 시녀들이 평민인 내 수발을 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나 하녀 필요 없어. 하지만 디엘, 내일은 좀 필요할 것 같아. 임시로라도 한 명 구해다 줘. 조건은..........”
내가 겪어 본 하녀는 제니와 에스더뿐이었지만, 그래도 손재주의 차이가 있다는 건 알았다.
솔직히 에스더는 놀랄 정도로 날 예쁘게 꾸며 주곤 했다.
그게 지금까지는 꼭 필요하지 않았지만, 내일만은 필요했다.
“나를 누가 봐도 ‘귀족 영애’처럼 꾸며 줄 수 있는 하녀로 부탁 해.”
“응, 최선을 다해 알아볼게.”
“그리고 현금도 좀 넉넉히. 내가 그동안 월급 모은 걸 챙겨 줘.”
디엘이 잊지 않도록, 나는 빠르 게 덧붙였다.
자유 도시에 황실 해군, 그것도 승전에 취한 사람들이 몰려 있다면 온갖 가게에서 이때다 싶어 많은 물건들을 팔 것이 뻔했다.
“에르안 님이 오시는데, 선물이 라도 하나 사 드려야지.”
내 손을 꼭 잡고 잠이 들던 열세 살의 에르안을 생각하니 저절 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 같았다.
‘더 튼튼해지라고 건강 보조제라도 좀 만들어 둘까.’
연구실에서 빠르게 몇 가지 약초를 배합하며, 나는 자유 도시 에서 꽤 괜찮은 선물을 골라야겠다고 생각했다.
연구실 중앙에는 내가 여전히 성분을 알아내지 못한 과자 몇 개가 보존액에 둥둥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