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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34화 (34/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34화

“응?”

“디엘, 아까 내가 연구실에서 가져온 가방 좀 줘 봐.”

“알았어.”

디엘은 왜냐고 묻지도 않고 응접실 구석에 있던 가방을 내게 재빨리 건네주었다.

나는 분주하게 두 유리병에 분홍색 시약을 각각 넣었다.

다음 검사를 기다리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내게 쏠렸다.

“뭐, 뭐 하는 거야?”

다음 검사 절차를 알고 있는 디엘이 속삭였지만, 나는 조용히 하라는 둣이 눈을 치켜떴다.

물론 디엘은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나는 당황하고 있는 한스의 팔 을 단단히 잡고 주사기를 들었다.

“한스, 피 좀 뽑을게요.”

“네?”

한스는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눈을 굴렸다.

“하지만 다음 친자 검사는……”

“알아요. 마력 2차 검사인데, 그 전에 빠르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제가 요새 연구하고 있어서 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방법이죠”

나는 그의 팔을 고무줄로 꽉 묶고 찰싹찰싹 때렸다.

“팔에 힘 좀 빼 주실래요?”

한스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나는 그의 드러난 핏줄로 주사기를 사정없이 찔러 넣었다.

정맥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서 아주 깊숙한 곳까지 주사기 바늘이 들어갔다.

“아악!”

사실 일부러 세밀하게 살피지 않았다. 아프든 말든.

“안 죽어요.”

비명을 지르는 한스의 피를 뽑아낸 나는 거침없이 다른 주사기를 꺼내 비슷한 절차를 걸쳐 내 피 또한 순식간에 뽑아냈다.

그리고 분홍색 시약이 담긴 두 병에 각각 한스와 나의 피를 집어 넣었다.

“이제 볼까요?”

다들 얼떨떨한 표정으로 두 시약을 바라보았다.

한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 다.

내 피가 들어간 분홍색 시약은 푸른색으로 변했고, 한스의 피가 들어간 분홍색 시약은 노란색으 로 변했다.

“이런.”

정적 속에서 내가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편지랑 손수건은 가져가셔야겠어요. 아, 체리 바구니와 호두파 이도요.”

“……네?”

“저는 메리 스미스가 아니네요.”

담담한 내 말에 응접실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공작 부인과 호아킨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일 뿐이었고, 에스더 역시 멍하니 서 있었다.

“이, 이건 무슨……”

한스 역시 못 받아들이겠다는듯이 가만히 앉아 있는데, 그 와중에 디엘만이 이 사태를 빠르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리체, 요새 새로운 친자 검사를 개발한다고 하더니 이거였 어?”

“응, 네가 구해 준 용의 발톱 정말 잘 썼어. 고마워. 근데 부탁 하나만 더 들어줄래?”

나는 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말을 이었다.

“저 사람, 가발인 것 같은데 머 리 좀 벗겨 봐.”

역시, 디엘은 왜냐고도 묻지 않고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이 극적인 상황에서 복종하는 것에 짜릿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 응”

한스가 깜짝 놀라며 펄쩍 뛰었다.

“자, 잠시만!”

디엘은 간단히 그를 제압하고 사정없이 그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부욱, 하는 소리와 함께 얼마 안 되던 갈색 머리카락들이 한번에 주르륵 떨어졌다.

모두가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어안이 벙벙한 와중에, 나는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며 다음 부탁을 했다.

“심장 즈음에 손도 좀 집어넣어 봐. 잘 뒤지면 마법 아이템이 잡힐걸.”

“응.”

디엘의 손이 또 거침없이 그의 가슴께로 들어갔고, 곧이어 동그란 반지 모양의 마법 아이템이 셔츠 주머니에서 나왔다.

“단장님, 죄송합니다만……”

나는 벌떡 일어나 호아킨에게 말했다.

“저 남자와 에스더를 포박해 주시겠어요?”

공작 부인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아마 저를 이 성에서 나가게 하고 싶었나 봐요.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든가.”

“네?”

“그리고 에스더는 혀를 깨물 수 있으니 얼른 재갈을…… 이런.”

더 빠르게 조치할 새도 없이 에스더의 입술 사이로 피가 흘렀다.

혀를 깨물었거나 늘 지니고 있던 독약을 먹은 것이다.

지난 하녀도 그러더니, 정말로 입단속이 되는 사람들만 집어넣은 게 분명했다.

털썩 쓰러지는 시체를 보며 나 는 이마를 짚었다.

한스의 갈색 머리카락은 가발이었고, 당연히 내 머리카락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심장 근처에 지니고 잇던 마법 아이템에는 내 손톱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일치도가 높을 수 밖에 없었다.

어쩐지 머리카락 검사에서 너무 이상적인 검사가 나온다 싶었다.

그런 일치도는 책에서 완벽한 모범사례로 나올 수준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 경계심이 흐려졌었는데, 아론 크릴소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정신이 확 드는 느낌이었다.

이시더 남작이 잠자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던 5년 동안 계속 생각해 왔었다.

자꾸 바뀌던 페렐르만 자작의 조수 자리에 앉아 있는 내가 분명 거슬릴 거라고.

게다가 나 때문에 공작 부인에 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니 얼마나 짜증 나겠는가.

에르안을 그들의 손이 닿지 않 는 먼 남부로 보내 버린 것도 나였다.

그들은 반란이 다가옴에 따라 어떻게든 공작성에 손을 뻗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나는 평민이고, 공작성만 벗어나면 딱히 뒤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마 한스를 따라 아픈 엄마를 직접 보겠다고 공작령을 벗어나 그 외진 마을로 갔으면 쥐도 새 도 모르게 죽었겠지.’

거의 공작성 안에서만, 그것도 내 방과 연구실만 오가며 공작 부인의 총애를 받는 나를 직접 건드리기는 어려웠을 테니 이런 일을 꾸였을 것이다.

게다가 그 틈을 타서 자기네 사 람을 하나 심는 것까지.

“다시 손을 대 보죠.”

디엘이 억지로 한스의 손을 마력 감정석에 갖다 댔다.

당연히 마법 아이템을 뺀 한스와 나는 마력 감정석에 함께 손을 대 봤자 전혀 빛나지 않았다.

예상한 일인데도 심장이 아려왔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나의 망상이고, 정말로 그가 내 친부였으면 하는 기대를 내심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사람이 건드릴 게 있고, 안 건드릴 게 있지.”

나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5년 내내 경계하고 살았는데, 이렇게 어이없이 넘어갈 뻔할 줄 몰랐다.

그런데 그만큼 ‘친부모일 수도 있다.’라는 사실은 내 마음 깊은 곳을 혹 찌르고 들어왔다.

“천애 고아한테 친부모로 사기를 쳐?”

나름 냉정하고 객관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는 내 약점이었던 것이다.

디엘 역시 어이가 없다는 둣이 거들었다.

“진짜 인간쓰레기들이네. 그런데 리체, 대체 에스더는 왜……”

“내 머리카락이랑 손톱을 빼돌릴 수 있었거든.”

손발톱은 특정 존재의 고유 마력을 가장 많이 담고 있다.

내가 용의 발톱을 비싼 돈 주고 산 이유도 그것이었다.

보아하니 내 손톱으로 마법 아이템을 만들어 한스의 고유 마력을 완전히 감춘 것이다.

한 사람의 고유 마력을 지우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양의 손톱이 필요했다.

한두 개 주워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 정도의 손톱을, 그것도 내 것으로만 모을 수 있는 사람은 늘 내 단장을 담당했던 에스더뿐 이었다.

‘얼마 전에 에스더가 내 머리카 락을 잘라 주기도 했고.’

하지만 끝만 조금 다듬어서는 완벽한 가발이 아니라 대머리에 붙은 수준 정도로만 만들 수 있 었을 것이다.

“게다가 내 식성이나 좋아하는 색깔 같은 것도……”

나는 의자에 얌전히 놓여있는 체리 바구니와 노란색 손수건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평범한 하녀는 알기 힘들지.”

공작 부인은 사색이 되어 호아킨으로 하여금 한스를 잡아 심문 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의사로서의 생명 존중 사상 때문에 직접 누군가를 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공작 부인의 표정을 볼 때 어쨌든 그의 최후가 대충 예상이 갔다.

“데리고 나가. 너희는 시체를 치워라.”

하인들이 급하게 에스더의 시체를 들고 나갔다.

양탄자에 피가 뚝뚝 떨어졌다.

“자, 잠시만요!”

한스는 혀를 깨물 만한 충성심 같은 건 없어 보였다.

그 모습에 나는 더더욱 배후를 오늘 밝힐 수 있다는 기대가 사라졌다.

그만큼 본인도 아는 게 없다는 소리였다.

“저는, 저는 정말 시키는 대로 만 한 것뿐입니다. 저는……”

“네, 잠시만요.”

나는 차분하게 상자 속에서 의 료솜을 챙겨, 한스의 팔에 남은 주사 자국에 꾹 대고 테이프를 붙였다.

“5분은 떼지 말고 계세요. 꾹 누르시면 더 좋지만 그건 사정상 힘들겠네요.”

아무리 내 아버지인 척했던 사람이라고 해도 의사로서 할 건 해야 했다.

“제가 직업의식이 좀 투철해서요.”

드디어 마음이 좀 편해진 기분이었다.

나는 내 팔에도 똑같은 처치를 한 뒤 시선을 돌렸다.

결국 호아킨이 발버둥 치며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소리치는 한스를 데리고 나가자, 응접실에는 나와 공작 부인, 디엘만 남았다.

“리체.”

공작 부인은 어쩔 줄 모르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 했다.

“괜찮아요.”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순간 눈물이 고여서 나조차도 당황 했다.

“진짜로…… 곧 성년인걸요. 부모님 못 찾아도 저는 워낙에 잘 나서 잘 살 거예요. 아시잖아요.”

나는 체리 바구니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떨궜다.

공작 부인이 나를 꽉 끌어안았다.

“알고 있어, 리체.”

바보 같았다.

그들이 나를 노릴 수 있다는 것도 아주 예전부터 알았고, 계속 경계하며 살았는데. 마력 검사를 앞두고 나서야 알아차리다니.

처음에 낯선 사람을 볼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는데, 머리카락 검사부터 이성을 잠시 잃었다.

잠시 감상에 빠진 대가는 가혹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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