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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33화 (33/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33화

며칠이 흘렀다.

머리카락으로 하는 2차, 3차 검사가 끝났다.

나는 연구실에서 혼자 검사 결 과를 보며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2차도, 3차도 거의 이상적이기까지 할정도로 일치도가 높았 다.

5년 만에 처음으로 3차 검사까지 통과한 사람이 나왔다.

“한스 스미스.... 메리 스미스...”

나는 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3차까지 통과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페렐르만 자작도 전 대륙을 뒤졌지만, 3차 검사까지 통과한 사람은 다섯이었다고 했다.

그마저도 둘은 검사를 거듭하며 페렐르만 자작이나 그 부인의 먼 친척으로 밝혀졌다.

“아직 끝난 건 아니니까.”

머리카락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검사는 끝난 셈이지만, 앞으로도 더 복잡한 과정이 남아 있었다.

이제는 마력의 유사성을 측정해야 했다.

타인의 마력이 옮을까 봐 둘 다 마법 아이템을 열흘 이상 쓰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어야 했다.

마력 검사 자체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이 단계까지 와 본 건 처음이었다.

계속해서 싱숭생숭하던 기분 때문에 속까지 울렁이는 것 같았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푸줏간 주인과 내가 3차 친자 검사까지 일치했다는 소문은 공작성에 쫙 퍼지게 되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어쩐지 굳어 보이는 내 표정에 누구나 눈치챘다.

“리체.”

공작 부인은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원래도 티타임의 간식은 화려했지만, 요즈음 들어 정말 영혼을 갈아 낸 티 푸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녀들이 하는 소리를 엿들었는 데, 주방에 배정된 예산이 두 배 늘었다고 했다.

“혹시 그 사람이 정말로 친부가 맞으면…… 어떡할 거니?”

“어차피 계속 의사로 살 거예요.”

나는 태연하게 차를 마셨다.

에르안이 건강하게 영지를 물려 받을 때까지는 떠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반란까지는 1년 남짓이 남았고, 웨데릭과 이시더 남작이 그때까지 이 영지를 차지하지 못 한다면 반란군을 한 번에 처치한 황태자의 손에 죽을 가능성이 높 았다.

이대로 슬슬 시간을 끄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가족이 계속 궁금하고 그리웠던 건 사실이거든요.”

그렇게 이 영지를 지킨 이후에 는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말이 조수지, 나는 거의 여기서 주치의로 살았으니까 성년 이후에는 평범한 가족을 가진 평민으 로 살아 보는 것도 괜찮을 둣싶었다.

이렇게 귀족 아가씨처럼 편하게 사는 것도 그저 공작 부인과 페 렐르만 자작의 일방적인 호의 덕 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평민이고, 귀족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귀족들은 원래 평민이 하는 의원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는다.

옛날에 의원을 열었을 때, 입소 문으로 알음알음 찾아온 귀족 영애들이 성년 때 치른다는 ‘데뷔탕트’ 때문이라며 몰래 미용 목적의 시약을 처방받고 가는 것이 다였다.

나는 그 ‘데뷔탕트’에 대해서 잘 몰랐지만, 어쨌든 나와 다른 세계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공작성의 생활이 편하긴 해도, 진정으로 소속감을 느끼기에는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결국엔 리위벨로 마을에 정착 해야겠죠.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으니까요.”

내 말에 공작 부인은 한숨을 쉬 었다.

“그래…… 그게, 그게 맞는 데……”

공작 부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답지 않게 초조한 표정을 지 어 보였다.

“혹시 일이 많지는 않니? 페렐르만 자작은 거의 매일 출타 중이고, 연구하랴 내 몸 살피랴 힘들지? 조수라도 붙여 줄까?”

“네? 페렐르만 자작님의 조수의 조수라니 그게 무슨 위치인가요? 괜찮아요.”

내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공작 부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냐, 네가 어릴 때부터 우리 가 네게만 너무 의지했다. 힘들 수도 있었을 텐데.”

“그건 제가 그럴 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조수를 붙여 줄게, 리체.”

공작 부인의 어조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혹시나 리위벨로 마을에 정착 하더라도…… 월급은 얼마든지 주고, 전용 마차도 제공할게.”

“네? 그게 무슨……”

“정말 자유롭게 오가도 되니까 공작성에서 주치의로 남아 줄 수 있을까?”

“어........”.

그건 좀 그림이 정말 이상한 것같았다.

페렐르만 자작도, 나도 거의 공 작성을 떠나 있는데 둘 다 공작성의 주치의로 고용해 준다고?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나를 붙잡고 싶은지 공작 부인의 표정은 간절했다.

“생각해 볼게요.”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친자 검사가 끝난 것 도 아니었다.

***

하지만 공작 부인은 몹시 치밀해서 그 다음날 바로 ‘페렐르만 자작의 조수의 조수’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단 사흘 만에 나는 디엘의 면접까지 통과한 유능한 인재 셋의 명단을 받아 볼 수 있었다.

“진짜 이런 거 필요 없는데..........”

심지어 지식 면접까지 거친지라 나보다 다 나이가 많았다.

아무래도 거절해야겠다고 생각 하며 명단을 보다가 나는 숨을 들이켰다.

“뭐, 뭐야.”

명단에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아론 크릴소, 19세, 남]

내가 웨데릭의 명으로 어쩔 수 없이 반란군이 된 영지민들을 치료할 때, 웨데릭의 옆에 계속 붙어있던 사람이었다.

‘잠깐. 이 이름…… 이시더 남작 쪽 사람이야.’

회귀 전의 기억이 떠오르며 머리에 번개라도 맞은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우연일 리 없었다.

내 부재를 예상하고, 아니 내 부재를 계획한 다음 밀어 넣으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그러니 공작 부인이 낸 ‘페렐르만 자작의 조수의 조수’를 뽑는다는 급한 공고에 기다렸다는 둣이 투입했겠지.

다시 말하면, 드디어 이시더 남작이 움직이고 있다는 소리였다.

‘에르안이 오는 걸 알고 드디어 작업을 시작했구나.’

나는 명단을 책상 위에 탁, 하 고 내려놓았다.

친자 검사 후 멍 하던 정신이 확 돌아오는 느낌이 었다.

체리 바구니를 받은 순간부터 살짝 멈춰 있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요 며칠 이상하게 울렁거리던 속도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미쳤어, 리체 에스텔.’

찬물을 확 뒤집어쓴 것 같았다.

‘아무리 친부모님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설랬어도, 이렇게 훤히 보이는 사기를 당하고……”

남몰래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나서 나는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에스더에게 환히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 뽑을래요.”

내가 명단의 이름 하나를 선택하자 에스더가 고개를 크게 끄덕 였다.

“어머, 저도 그 사람 뭔가 느낌이 좋았어요.”

“……그렇겠죠.”

내 이를 악문 대답에 에스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아니에요, 아무것도.”

감히 나를 직접 건드려? 그것도 내가 유일하게 간절한 것을 이용 해서?

“아론 크릴소.”

나는 에스더의 눈을 똑바로 바 라보았다.

“이 사람을 뽑아 달라고 말 좀 전해 줘요, 에스더.”

그동안 설랬던 만큼, 용서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 진짜 화났어. 두고 봐.’

***

나는 또 며칠간을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디엘이 구해 준 용의 발톱을 들여다보고 들여다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한스가 다시 불려 온 것은 꽤 시간이 흘러서였다.

역시 지난번과 같이, 단정한 셔 츠를 입은 꽤 부유한 평민 중년남성의 모습이었다. 벗겨진 머리 끝에 갈색 머리카락이 간신히 붙 어 있었다.

“머리카락 검사가 다 통과되었 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체리를 잔뜩 담은 바구니를 들고 왔다.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바구니를 받았다.

“그리고 이건…… 제 큰 딸, 렌이 쓴 편지와 직접 수를 놓은 손수건 입니다.”

손수건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인 노란색이었으며, ‘메리 스미스’라는 이름이 수놓아져 있었다.

편지를 바로 펼쳐 읽어 보니, 나를 강물에 흘려보낸 뒤 하루하 루가 지옥 같았다는 내용이 구구 절절하게 쓰여 있었다.

공작성이라 차마 만나러 갈 순 없지만 나를 꼭 보고 용서를 빌 고 싶다는 말이 반복되었다.

결국 하루도 사랑하는 막내를 잊어 본 적이 없다는 눈물 어린 말로 편지는 마무리되었다.

“이건 지금 병상에 있는 제 아내가 힘겹게 일어나 직접 만든 호두파이고요.”

“……그렇군요.”

“머리카락 검사를 통과했다는 말에 정말 같이 오고 싶어 했는데, 거동 자체가 몹시 힘듭니다. 죽기 전에 막내딸 얼굴 한번 보 고 싶다고 그렇게 기도했는 데……”

한스가 눈물을 홈쳤다.

“저런, 어떡해……”

에스더가 숨을 삼키며 속삭였다.

나는 눈을 내리깔며 냉정하게 말했다.

“아직 제가 친딸이라는 보장도 없는데요. 마지막 검사는 훨씬 더 복잡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데.”

“그래도……”

한스는 코를 훌쩍이며 미소 지었다.

“마력 검사까지 다 통과하면 거 의 90% 이상이라고 들었는데요.”

“그건 그렇죠. 일단 빠르게 일치도부터 확인할게요.”

디엘이 응접실로 마력 감정석을 가져왔다.

응접실에는 디엘과 하인 몇 명 외에도 유난히 긴장한 것 같은 공작 부인과 눈을 빛내고 있는 에스더, 기사단장 호아킨까지 함께 있었다.

머리카락 검사 3단계까지 모두 통과했다는 소문을 듣고, 공작 부인은 자신의 눈으로 한스를 보겠다고 며칠 전부터 말해 왔다.

“개망나니 같은 놈이면....혹시 낳아줬다고 유세나 부리고 돈이나 뜯어가는 놈팡이라면....아냐 내가 무슨 권리로”

요 며칠간 그녀는 수시로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아냐, 그래도 혹시나 없느니만 못한 친부모라면....아냐, 그래도 피가 섞인 천륜인데. 하지만....”

비슷한 내용의 혼잣말을 굉장히 자주 들었지만 나는 뒷말을 듣고싶지않아 억지로 모른척 해왔다.

하지만 꼭 함께 보고 싶다며 그녀를 초청했다.

대신 한스 역시 외부인이니 반드시 호위와 하인 여럿을 대동하라고 강조했다.

나와 한스는 마력 감정석에 동 시에 손을 대었고, 마력 감정석은 즉시 환하게 빛났다.

“……아, 세상에.”

공작 부인이 눈을 깜빡거리며 탄식했다.

마력 감정석이 빛난다는 것은 마력 일치도가 높다는 뜻이었다.

즉 다음 마력 검사로 넘어갈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된 셈이었다.

실제로 여기까지 통과하기란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

아마 친부 모가 아니더라도 6촌 이내의 친척일 확률이 높았다.

한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메리……”

공작 부인은 숨을 죽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한스가 개망나니 같다는 판단은 내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봐도 한 스는 전형적인 ‘사람 좋고 성실하게 사는 평민’이었다.

디엘 역시 감격한 표정으로 나 와 한스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멍 하니 말했다.

“그러면 다음 검사를 위해 직접 마력 채취를 하겠습니다. 두 분은 모두 팔을 걷어 주세요. 그리고……”

모두가 숨죽인 분위기 속에서 나는 디엘의 말을 끊었다.

“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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