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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32화 (32/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32화

“우와…… 너무 신기해요.”

에스더가 속삭이둣 말했다.

“1단계는 통과한 것 같고요.”

너무 흥분하지 않으려 애쓰며 나는 싱긋 웃었다.

“머리카락 몇 가닥을 더 주시고 가시겠어요? 2단계와 3단계는 시간이 좀 많이 걸려서요.”

“예.”

“4단계에서는 마력 일치도를 봐야 하니, 당분간 마법 아이템은 쓰지 마시고요. 특히 남의 손톱이 재료로 들어간 것은요.”

“알겠습니다. 뭐, 푸줏간을 하는 데 굳이 귀족들이나 쓰는 마법 아이템을 쓸 일이 어디에 있겠습 니까.”

한스는 짧은 머리카락을 귀 밑에서 몇 가닥 더 뽑아 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거의 다 벗겨졌는데, 문득 친자 검사에만 몇 가닥이나 쓰는 것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한스가 내미는 체리 바구니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저희 가족은 딸만 다섯입니다. 메리가 돌아오면 여섯이 되겠지요. 애 엄마와 다섯 딸의 공통점 이 모두 체리를 엄청 좋아한다는 건데요.”

체리는 알이 붉고 실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달콤한 향이 흑 끼쳐 왔다.

“혹시 아가씨가 메리라면 체리를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서 가져왔습니다.”

“……네에……”

“저희 집은 이렇게 좋지 않지만, 그래도 메리의 공간을 언제나 준비해 두고 있었습니다. 남 부럽지 않게 지내시는 건 알겠지만 저희 푸줏간도 꽤 잘되는 편 이니……. 리위밸로 마을에서 함 께 모든 식구가 복작이며 사는 것이 제 오랜 꿈입니다.”

“..............”

“게다가 아내가 지금 많이 아파서…… 정말로 막내딸을 보고 싶어 합니다.”

나는 바구니를 만지작거리며 아 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2단계 검사가 끝나면 연 락 주십시오.”

한스는 꾸벅 인사를 하고 응접 실을 나섰다.

나는 한스의 머리카락과 체리 바구니를 잘 챙겨서 천천히 연구실로 향했다.

늘 또릿또릿한 정신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살짝 멍 한 기분이었다.

아마 머리카락 검사를 통과한 경우가 아주 오랜만이라 그런 것 같았다.

나 잘난 맛에 살아온 나였지만, 회귀 전 사형 선고를 받을 때 의외로 친부모 생각이 많이 났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꼭 가족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 보고 싶었는 데…..

나는 체리를 한 알 한 알 먹으며 그때의 외로움을 떠올렸다.

“다 먹었어? 넌 체리 뷔페를 갔다 왔는데도 또 체리를 먹냐.”

옆에서 연구실을 정돈하던 디엘이 말을 걸어왔다.

“바구니 버릴까?”

“아, 아니.”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냥 두자.”

“그래?”

디엘이 묘한 표정을 하더니, 다 소 생각이 복잡해 보이는 나를 보며 화제를 돌렸다.

“그거 알아?”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에르안 님, 날 진짜 싫어하셨어. 가끔 막 노려보는데 오금이 저리더라.”

화제를 돌려 내 생각을 좀 전환 시키려는 의도였다면 대성공이었 다.

“야.”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기 까지 했기 때문이다.

물론 디엘은 다섯 살이나 어린 나에게 ‘야’라든가 ‘너’라는 호칭을 듣는 데에 이미 익숙했다.

“에르안 님이 노려보는 게 뭐가 무서워? 그 작은 공자님은 뭘 해도 귀엽지.”

“진짠데. 네가 몰라서 그래.”

디엘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너한테는 에르안 님이 항상 호의적이었잖아. 그 섬뜩한, 마님을 닮은 눈을 넌 몰라.”

“호의적이라기보다는……뭐 좀, 의존적이었다고나 할까. 여러 모로 약하시니까.”

나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하며 혀를 끌끌 찼다.

다섯 살이나 어린, 그것도 또래 보다 왜소하고 남들 눈치도 보는 의기소침한 애한테 겁을 먹다니 참 딱했다.

“혹시나 너무 덩치가 커져서 오신 뒤에 그런 눈으로 날 노려보시면, 난 정말 기절할지도 몰라.”

“그렇게 키가 크실 것 같지도 않아. 그러니 기절하지 마.”

나는 무심하게 말했다.

“친구의 부탁이니까.”

그 말은 디엘에게 거의 무적이었다.

“알았어.”

어쨌든 공작성은 5년 만에 맞이 하는 후계자를 기다리며 나름대로 모두가 설레고 있었다.

‘저 멀리, 이시더 남작의 생각은 좀 다르겠지만.’

이제 그가 돌아오면 본격적으로 이상한 작업을 할 가능성이 높았다.

매의 눈으로 감시해야 하는 내 책임이 상당히 무거웠다.

성년이 되었으니 황제에게 작위 를 수여받을 것이고, 무사히 세르이어스 공작이 되겠지.

그 이후가 중요했다.

‘슬슬 준비성 철저한 이시더 남작이 공작성에 무슨 작업을 할 때가 되었는데.’

나는 체리 바구니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

항로가 대충 정비되었다는 소문에 가장 빠르게 배를 띄운 사람은 바로 에르안이었다.

에르안은 5년간의 이르비아 생 활을 단숨에 청산하고 기사단과 사용인들을 이끌어 바로 세르이 어스 공작령으로 향했다.

하지만 세르이어스 공작가의 화 려한 배는 출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해적 잔당들을 만났다.

“제국 귀족가의 배다! 귀족 한 놈만 잡아!”

배에 올라탄 해적들의 목적은 분명했다.

기사단들을 피해 몸값이 높은 귀족을 인질로 삼아 이 배에 가득한 사치품들을 얻어 내는 것이었다.

날래게 기사들을 피해 귀족을 찾는 그들의 눈이 조급하게 배 이곳저곳을 훌었다.

당연히 가장 안전하고 깊숙한 곳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 는데…….

“아.”

갑판 위에서 단단한 몸을 가진 검은 머리의 청년이 검을 빼내며 이를 갈았다.

“갈 길이 급한데 별 성가신 벌 레 같은 것들이……”

“에르안 님, 제발 진정하세요.”

지켈이 그의 오른팔을 황급히 잡았다.

“일단 안전하게 안쪽에 계시고, 저희가 먼저 처리를 하도록 하겠 습니다.”

“내가 더 빨라. 너흰 느려.”

“그, 그리고…… 무작정 죽이지 마시고 우두머리를 파악하여 근처 황실 해군에 넘기는 절차를 거치면 분명 포상이……”

“지켈”

에르안은 눈썹을 티켜올리며 낮게 말했다.

“그딴 건 필요없다. 다 시간 낭비야

지켈이 더 말릴 새도 없이, 에르안은 그대로 기사들에게 섞여 해적들을 직접 도륙하기 시작했다.

“..............”

지켈은 순식간에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해적들의 목을 베어내는 냉랭한 표정의 에르안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처음에 검을 쥘 줄도 모르던 열셋 꼬마가 저렇게 클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는 선생이었던 그를 넘어서 기사단의 그 누구보다도 실력이 뛰어났다.

저렇게 괴물같이 크다니, 아마 공작 부인이 보면 기겁할 것이다.

몇 명을 붙잡아 심문할 법도 한 데, 에르안은 해적의 급소를 찌르는 데에 바빴다.

마치 자신의 앞길을 막는 것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는 태도였다.

“아……”

맨 처음 에르안을 맡았을 때, 정말 스펀지처럼 모든 가르침을 다 흡수한다고 느꼈다.

그건 검술뿐만이 아니라 다른 가정교사들도 마찬가지여서, 교양이나 역사 등의 분야에서 이름 난 선생들을 붙여도 금방 가르칠 것이 없다며 손을 떼곤 했다.

열셋의 귀여운 소년만을 생각하 며 낯선 남쪽 땅에서 즐겁게 지내기만 하다가 시간은 이렇게 홀 러 버렸다.

그 후에, 지금에서야 지캘은 엄청난 사실을 깨달아 버렸다.

‘인성 교육을 못 시켰다!’

웬만큼 나이가 많은 기사들은 거의 다 공작성에 남았고, 당연히 가족들도 없었다.

게다가 에르안은 문화가 다른 타지에서 친구를 사귀려는 노력 조차 하지 않았다.

‘공감 능력도 없으시고!’

그저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 다고, 체술과 검술에 푹 빠져 있 을 뿐이었다.

‘너무 내가 결과 중심, 속임수 중심의 검술 수업만 해 버린 건 아닌지…….’

검술을 직접 가르친 지켈도 딱히 도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문득 걱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뭔가 살짝 이상하게 크신 것 같은데…….’

무표정으로 해적들의 시체를-신변도 확인하지 않고- 구둣 발로 툭특 차서 바다에 빠트리는 그를 보며 지켈은 뒤통수를 긁었 다.

‘뭔가 꽂힌 게 있으면…… 앞도 뒤도 안 보는 것 같은……’

지켈이 보기에, 지금 에르안은 최대한 빠르게 세르이어스 공작 령에 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살생도 쉽고, 보상 같은 것도 눈에 들어 오지 않고, 자신의 안위도 그다 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음…… 그렇게 고향에 가고 싶으셨나? 이르비아에서 잘 지내셨는데. 왜 이렇게 급하신 거지?’

눈이 돌아간 것처럼 칼춤을 추 며 거의 대부분의 해적을 바다 속에 밀어 넣어 버린 에르안은 검의 피를 닦으며 선득하게 말했다.

“즉시 출발해.”

항로는 아직도 한참 남아 있었다.

자신으로 인해 피로 물들어 버린 바다를 뒤로 한 채, 에르안은 냉담한 표정으로 저 멀리 수평선 을 바라보았다.

잠시 항해가 멈추었다는 사실만 으로 불쾌하다는 표정이었다.

제이드 황태자의 길고 길었던 해적 소탕이 끝나고 첫 민간 항해라, 항해는 험준했다.

심지어 군함도 아니고, 세르이 어스 공작가의 배였으니 모두 다 귀족가의 사치스러운 물품을 노 리고 달려들었다.

자꾸만 남은 해적들의 잔당이 달려드는지라 배는 자주 멈췄다.

그럴 때마다 해적들은 제국 황실 해군들보다 더 괴물 같은 검은 눈의 남자를 마주하며 바다에 처박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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