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31 화
“에르안 님이 돌아오신다는 서신이 왔다며.”
페렐르만 자작은 무심하게 말했다.
“아마 건강하게 오시겠지만, 혹 시나 무슨 문제가 있다면 꼭 연락하도록 해.”
“네.”
오늘 새벽에 에르안에게서 짧은 서신이 왔다.
항로가 정비되는 대로 공작성에 오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비둘기를 통해 멀쩡히 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래도 생사를 눈으로 확인하게 된 다고 생각하니 막연하게 떨렸다.
“제일 먼저 건강 상태 확인하는 것 잊지 말고.”
“여기 일은 그냥 저한테 맡기세 요. 그럴 만한 능력 되는 거 아시잖아요.”
다시 먼 길을 떠나는 페렐르만 자작의 얼굴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기야, 벌써 18년째였다. 반복된 실패로 많이 지쳐 있을 것이 뻔했다.
“이번에야말로 꼭 따님을 찾으셨으면 좋겠어요.”
나는 벌써 백 번은 한 것 같은 말을 똑같이 했다.
“돌아오시면, 정말로 획기적인 친자 검사 방법을 제가 연구해 두고 있을게요. 새로운 재료도 샀어요.”
“용의 발톱이라니, 비싼 것도 샀더구나.”
“아까우세요?”
“용의 날개도 샀어야지. 심장은 매물로 안 나왔어?”
“손발톱에 원래 마력이 가장 많은 거 아시잖아요.”
“그래도 이왕 남의 돈을 쓸 거면 거덜을 낸다는 심정으로 써야 큰 사람이 된다.”
별로 귀담아들을 조언은 아니어서 나는 입을 꾹 닫고 아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우리의 대화를 들으며 디엘이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이번 여름에 너도 성년이지?”
“네.”
페렐르만 자작의 눈빛이 쓸쓸해 졌다.
그의 딸도 이번 여름에 성 년이 되는 것이었다.
성년이 되면 의원을 열거나 주 치의로 계약할 수 있는 정식 의료인이 된다.
평민인 나에게는 그것 외에는 큰 의미가 없었지만 귀족 영애의 경우는 좀 달랐다.
페렐르만 자작이라면 아마 자신의 딸을 위해 누구보다도 화려한 데뷔탕트를 열어 주었을 것이다.
“리체.”
“네.”
“그래도 네가 내 밑에서 가장 오래 있었던 조수인데…… 내가 대부라도 해 줄까?”
“네? 아니에요.”
나는 단번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는 평민이고, 굳이 대부를 갖지 않아도 괜찮아요. 게다가 전 이미 제 밥벌이를 잘 하고 있 는걸요.”
페렐르만 자작의 얼굴에 살짝 아쉬움이 남았지만, 실제로 내 말이 다 맞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 건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나는 내 주제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공작성에서 귀족 영애처 럼 살아도 나는 귀족이 아니었다.
제국의 법률상, 나는 귀족과 정식 결혼을 할 수도 없었고 특별한 공을 세우지 않는 이상 각종 연회에 참석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대부니 대모니 하는 그런 것들로 귀족 흉내를 내 봤자 별 의미도 없었다.
당장 황태자가 해적 소탕을 완 벽하게 마치고 돌아온 뒤 초여름 에 거대한 승전 연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공작 부인도, 에르안도, 심지어 페렐르만 자작도 다 연회에 참석할 수 있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런 데에서 박탈감을 느끼지 않으려면 늘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뭐.”
페렐르만 자작은 어깨를 으쑥하며 중얼거렸다.
“나도 그냥 해 본 소리였어. 친자 검사 연구를 네게만 맡기는 게 좀 미안해서.”
“저를 위한 거기도 해요.”
나는 냉정하게 사실을 짚어 주었다.
“잊고 계신가 본데, 저도 열심 히 제 부모님을 찾고 있거든요.”
“내가 더 열심히 찾잖아.”
“저도 열심히 찾는데요. 그냥 직접 찾아다니지 않을 뿐이지, 누가 오든 일단은 다 만나요. 나름 간절하다고요.”
페렐르만 자작의 입술이 살짝 비뚜름해졌다.
디엘이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 고 어설프게 웃었지만, 페렐르만 자작이 콧김을 내뿜으며 말했다.
“나, 내 딸 찾으면 정말 잘해 줄 거야.”
질 수 없다는 마음에 나 역시 뚱하게 받아쳤다.
“저도 부모님 찾으면 진짜 효도할 거예요.”
“갖고 싶은 건 다 갖다 주고 황녀님보다도 귀하게 키울 거고.”
“혹시 돈이라도 필요하다고 하 시면 월급 모은 거 다 드릴 거고 요.”
“아주 땅에 발을 딛지도 못하게 할걸.”
“저도 원하는 거 있다고 하시면 다 해 드릴 생각이에요.”
“나중에 내 따뜻함을 보면서 페렐르만 자작님께 대부라도 해 달라고 할걸, 하며 후회하지 마.”
“자작님도 제가 친부모님 찾고 나서 지극 정성으로 잘해 드리는 거 보면 배신감 심하게 느끼실걸요. 그러고 나서야 아, 대부 안 하길 잘했구나 하실 거예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말을 쏟아 낸 뒤에, 서로 씩씩거렸다.
“저기.........”
그 정적을 깬 사람은 디엘이었다.
페렐르만 자작과 나는 사납게 디엘을 바라보았다.
“뭐?”
“왜?”
디엘이 조심스럽게 마차 문을 열었다.
“도착하셨다고요. 저희는 여기까 지만 배웅할게요.”
그의 얼굴에 이제 끝났다는 안도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
워낙에 먼 길을 떠나는 것이기 에 우리는 페렐르만 자작을 꽤 멀리까지 배웅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시내에 나온 김에 디엘과 나는 에스더가 추천 한 체리 뷔페까지 갔다.
“이것도 페렐르만 자작님 이름으로 달면 돼?”
“당연하지.”
나는 메뉴판에서 가장 비싼 음료를 짚으며 말했다.
디엘도 냉큼 나와 똑같은 것을 시켰다.
우리는 딱히 교양을 차리지 않고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항로가 곧 정비되면 에르안 님이 오시겠지? 와, 5년만이야.”
디엘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그러게.”
“엄청 크셨겠지? 선대 공작님도, 마님도 키가 크신 편이니까,”
“글쎄다. 마지막으로 봤을 땐 나보다도 키가 작으셨는데.”
기억은 미화된다고, 그 기죽어있던 꼬맹이를 생각하니 다시 기 분이 아련해졌다.
생각해 보니 열세 살 아이를 데리고 매일같이 밥을 먹이고, 놀아 주고, 뜀박질을 시키고, 매일 밤 손을 잡아 재워 주고…….
‘내가 키웠네, 키웠어.’
살이 오른 뽀얀 볼에 긴 속눈썹 이 그림자를 드리울 때면 꽤 귀여웠던 것 같기도 했다.
이제 그 꼬맹이를 볼 수 없다는 건 조금 슬픈 일이었다.
워낙에 성인이 된 외모가 아쉬울 예정이라.
디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가 다시 공작성으로 들어왔을 때 에는 이미 해가 져 있었다.
연구는 내일부터 해야겠다는 생 각으로 아무 생각 없이 공작성에 돌아왔는데, 에스더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가 바로 뛰어왔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
내 덤덤한 질문에 에스더는 눈을 깜빡이며 급히 말했다.
“18년 전에 막내딸을 물가에서 잃어버린 아저씨가 한 분 오셨어요. 리위밸로 마을에서 푸줏간을 하고 계시대요.”
리위벨로 마을이라면, 세르이어스 공작령 소속의 땅은 아니었지만 우리 보육원 앞에 흐르던 냇가의 상류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까지 이런 사람들이 꽤 있 었기 때문에 엄청 기대가 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친자 검사를 하시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해야죠.”
그래도 혹시나 하는 희망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에스더가 안내하는 대로, 오늘 몇 시간이나 초조하게 기다렸다는 상대를 만나러 응접실로 들어갔다.
거의 다 벗겨졌지만 나와 똑같은 갈색 머리에, 회색 눈을 한 중년의 남자가 체리 한 바구니를 들고 앉아 있었다.
“한스 스미스라고 합니다.”
간단히 자신의 이름을 말한 중년의 남자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울먹거렸다.
“18년 전, 첫째 아이가 냇가에 서 막내딸을 목욕시키다가 그만…… 떠내려갔지 뭡니까.”
나는 가만히 한스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친자 검사를 하고 첫 단계에서도 통과하지 못한 채 떠나갔다.
“이제야 뒤늦게, 세르이어스 공 작령에서 친부모를 찾고 있는 소 녀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한스가 눈물을 찍어 내며 코를 훌쩍였다.
“아가씨께서 우리 메리가 맞는 다면… 정말 우리 가족이 얼마나 열심히 찾았는지……”
이 남자의 딸이 맞는다면 나는 ‘리체 에스텔’이 아니라 ‘메리 스미스’가 될 예정이었다.
리체는 보육원 선생님의 이모 이름이었고, 에스텔은 보육원 원장님의 성이었다.
남들처럼 부모가 지어 준 이름 과 자연스럽게 물려받은 성이 아 니었다.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친자 검사를 차근차근 해 보도 록 하지요.”
첫 단계는 머리카락으로 이루어 지는 검사였다.
1단계 시약에 넣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검사였는데, 혈연의 일치 정도를 볼 수 있는 방법이었다.
보통 다섯 명 중 네 명은 여기서 바로 집에 돌아가곤 했다.
디엘이 조심스럽게 가져온 1단계 시약에 내 머리카락과 한스의 정수리 밑에만 조금 존재하는 갈 색 머리카락을 함께 집어넣었다.
색깔이 진할수록 혈연의 일치 정도가 높았다.
“어, 어머.”
지켜보고 있던 에스더가 감탄을 내뱉었다.
나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지 만, 나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어쩔 수 없었다.
두 머리카락을 담은 비커의 시약이 새빨갛게 변했던 것이다.
굉장한 일치도였다.
나도 책에서만 보았던 색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