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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30화 (30/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30화

이제 몸이 완전히 회복된 공작 부인이 오후에 내게 티타임을 함 께 하자고 했다.

5년 내내 중독되어 있던 독을 중화시켰더니 공작 부인의 두통이나 불면증, 간헐적인 복통 중 세가 많이 사라졌다.

“리체, 아침에 소식 들었니?”

“네.”

나는 맑아 보이는 공작 부인의 안색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드 황태자님이 드디어 해적을 모두 소탕하셨다면서요.”

“그래. 곧 이르비아의 뱃길이 열린다는구나.”

대놓고 기뻐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5년 만에 아들을 볼 수 있다는 기대때문에 그녀의 얼굴에 잔잔한 기대감이 감돌았다.

공작 부인과 에르안은 선대 공작이 죽은 뒤 각자의 몸이 아팠던지라, 가까워지지 못하고 사이 가 데면데면했다.

실제로 그녀는 에르안을 바라볼 때보다 나를 바라볼 때 훨씬 더 많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공작 부인은 진심으로 아들인 에르안을 아꼈다.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에르안만은 꼭 살려야 한다고 말했던 그녀의 말을 나는 늘 기억 했다.

각혈까지 숨기며 페렐르만 자작 을 붙잡고 있었던 그 간절함도.

“그렇다면 에르안이 돌아올 수 있겠지. 만 5년이 이미 흘렀잖니.”

“네, 벌써 봄이 오고 있으니까요.”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정말 많이 회복되셨을 거예요. 어지러음도 발작도 없으실 거고요. 물론 아직 원인은 찾지 못했지만 치료라도 가능한 게 어디인가요.”

“성년도 제대로 축하해 주지 못 했구나……”

나는 양심에 찔려서 괜히 차를 홀짝였다.

사실 5년 동안 만나지 못할 걸 알면서, 성년을 이국에서 홀로 보내게 될 걸 알면서 보낸 먼 땅이었다.

하지만 나도 이런 치료법을 쓰 게 될 줄은 몰랐다.

누구보다도 멋지게 키우고 싶었던 내 꿈도 좌절된 셈이었다.

“그래도 많이 컸겠지.”

“그럼요. 이제 열아홉이신걸요.”

“선대 공작님을 많이 닮았으면 좋겠구나.”

공작 부인은 벽에 걸린 초상화 를 흘끗 보며 말했다.

“키도 크고, 몸도 단단하고, 정말 손꼽힐 정도의 미남이었지.”

나 역시 선대 세르이어스 공작의 초상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풍채가 좋고 확실히 잘생겼으며, 짙은 눈썹과 곧게 뻗은 눈매가 매력적인 남자였다.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나는 왜소하고 비실거렸던 열아홉의 에르안을 떠올리며 살짝 한 숨을 쉬었다.

기억 속의 다 큰 에르안과 선대 공작이 닮은 것은 새까만 머리카락밖에 없었다.

공작 부인도 상당히 미인이신데, 두 사람을 섞어서 왜 그렇게 밖에 나오지 못했는지 통탄스러울 뿐이었다.

어린 시절은 상당히 미소년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역변이었다.

“설사 우리 기대만큼 잘 자라지 못하셨더라도 에르안 님을 반갑게 맞아들여야죠.”

공작 부인이 너무 실망할까 봐,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어떤 모습이든 세르이어스의 유일한 후계자이신걸요.”

“리체, 너는 어찜 그렇게 어른스럽니.”

‘그거야 미래를 아니까……’

“어미로서 제대로 크는 것을 지켜보지도 못한 내가 부끄럽구나.”

“아니에요.”

나는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제가 부족해서 더 나은 처방을 내리지 못한 탓이에요. 하지만 계속해서 원인도 못 찾겠고, 완벽한 해결책도 못 찾겠어서…… 무조건 회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생각하다 보니……”

에르안을 멀리 보낸 것에 대해 서는 나름대로의 죄책감이 있었다.

조금 더 커서 보냈어도 되었지만, 남부 지역과의 뱃길이 오랫 동안 막힌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 서둘러 보내 버렸다.

5년 동안 영지와 완전히 단절된 기분이었을텐데, 가끔 만나는 웨데릭에게도 그렇게 의지하던 꼬마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마음이 안 좋았다.

‘날 내심 원망하겠지.’

그래도 싫다는 사람에게 약을 억지로 먹이는 의사의 마음으로, 나는 단호해지려고 애썼다.

그가 와서 서운해하며 냉담하게 굴어도, 어쨌든 공작 부인을 지켜 낸 것처럼 세심하게 눈올 부 릅뜨고 있어야 했다.

웨데릭과 이시더 남작의 속셈을 모두에게 밝힐 수 있는 증거를 찾아내거나, 무사히 반란군이 모두 진압될 때까지.

“리체, 네 덕분에 내가 살았는데 네가 부족하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공작 부인은 내 머리카락을 쓰 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네가 에르안도 살린 거야. 뭐든지 해 주고 싶은 내 마음을 네가 알까 모르겠구나.”

“……감사합니다. 어쨌든……”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저도 마님만큼 에르안 님이 보고 싶네요. 어떻게 변했든지.”

불안한 눈빛, 갈비뼈가 드러날 것 같은 왜소한 몸, 윤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머리카락을 가진 실망스러운 모습일지라도 환히 웃어 줄 것이다.

***

“아, 드디어 빌어먹을 해적들이 다 쓸려 나갔어?”

지켈의 보고에 에르안이 씩 웃으며 들고 있던 검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졌다.

이르비아는 사시사철 무더운 날씨라 에르안은 연무장에서 훈련을 할 때면 상의를 탈의하곤 했 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몸에 잔근육 이 가득했다.

커다란 키에 딱 벌어진 어깨를 곁눈질하며 하녀들이 일부러 길 을 돌아갔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르안이 섬뜩하게 중얼거렸다.

“제이드 황태자가 드디어 할 일 을 좀 했나 보군. 한 달만 더 끌었으면 아마 내가 직접 바다로 나가 해적들을 다 물에 처넣었을텐데.”

성년이 막 지난 에르안의 검은 눈이 나른하게 빛났다.

살살이풀을 먹은 뒤 기후 변화 가 없는 곳에서 5년간 지내면 건강해질 거라는 리체의 처방대로, 5년 동안 에르안은 근육통 외에는 앓아 본 적이 없었다.

수시로 메숙거리지도 않았고, 어지럼중에 시야가 노래지지도 않았으며, 불면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식욕도 좋아져서 잘 먹고, 전통 무술이 발달한 이르비아의 문화에 적응하여 검술 외에도 온갖 체술을 다 배웠다.

지켈은 옛날의 그 의기소침했던 꼬마가 5년 동안 어딘가 좀 핀트가 나간 청년이 되는 것을 살펴 보며 이상한 위화감에 마른 침을 몇 번이나 삼켜야 했다.

성장기를 거치며 단단히 자리 잡은 골격,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목구비, 짙은 눈썹 둥이 선대 공작과 공작 부인을 묘하게 섞어 놓은 것 같았다.

그것도 뭔가 냉랭하고 섬뜩한 쪽으로만.

분명 어릴 때의 그 귀여운 이목구비가 살아 있는데도 묘하게 색기 어린 분위기를 풍겼다.

웨데릭도, 공작 부인도, 리체도 없는 이곳에서 에르안은 정말로 제 성격대로 커 버린 것이다.

“이제 서신은 보낼 수 있나?”

“3일 뒤부터 서신 왕래는 가능 하다고 합니다. 항로 재정비에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예정이고요.”

한때 그의 스승이었던 지켈은 이제 그에게 깍듯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르안은 세르 이어스의 주인이 되기에 충분한 존재감을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 다.

“그럼 바로 공작성으로 서신을 보내.”

에르안의 붉은 입술이 호를 그렸다.

“항로가 정비되는 대로 즉시 출발하겠다고.”

***

“아가씨,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새로 온 내 담당 하녀, 에스더가 내 손톱을 깎아 주며 생글생 글 웃었다.

“아.”

나이가 꽤 되었던 제니와는 다르게, 에스더는 미용 쪽으로는 확실히 더 세심했다.

귀족은 원래 자기 손톱도 안 깎나 싶었다. 애도 아니고, 손톱까 지 깎아 주다니.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손톱에는 고유의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살짝 찝찝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차피 에스더가 의사나 마법사도 아니었으니 일부러 말리지는 않았다.

“잘 모르는 말이면 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아는 말만 해도 부족한데 굳이 모르는 말을 할 필요는 없잖아요.”

“아…… 뭐.”

에스더는 상당히 당황한 둣이 어설프게 웃었다.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저는 맨날 맞는 말만 하죠, 뭐.”

나는 당당하게 말했고, 에스더 는 손톱을 모두 단정하게 깎아 주더니 발랄하게 말했다.

“별건 아니고요, 그냥 아가씨가 너무 예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네?”

“어릴 땐 몰랐는데, 성년이 다가오니까 부쩍 더 예뻐지시는 느낌이에요. 피부도 뽀얗고, 머릿결 도 좋고, 눈, 코, 입도 오밀조밀하고.”

“그거야 당연하죠.”

거울 속의 나는 누가 봐도 예쁘장한 귀족 영애였다.

하지만 나는 평민이라는 내 출신을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원래도 괜찮게 생겼는데, 귀족 영애들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관리받고 예쁜 옷 입고 좋은 거 먹고 고생 안 하니까 고울 수밖에 없죠.”

“그, 그렇죠.”

에스더가 내 손톱을 단정하게 모으고 재빨리 표정 관리를 했다.

“오늘도 페렐르만 자작님 배웅 을 나가신다면서요?”

“네, 이번에는 북부 지역으로 가신대요. 봄이 왔으니까요.”

“그래도 북부는 산지가 험한데……”

“몇 달 걸리시지 않을까요.”

실제로 디엘은 얼마 전 북부 지역에 가서 열여덟인 금발에 녹안 여자아이 명단을 모두 뽑아 왔다.

북부는 인구밀도가 낮고 땅이 넓어서 꽤 시간이 걸릴 둣했다.

‘못 찾고 돌아올 확률이 높겠지.’

내가 사형 선고를 받을 때까지, 원래라면 페렐르만 자작은 딸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죽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수인 내가 아주 빠릿빠릿하게 공작성을 지키고 있었고, 에르안이 남부로 가는 바람에 급히 소환되어 오는 경우가 없었다.

그러므로 혹시 또 몰랐다. 그토록 보고 싶어 하는 딸을 이번엔 찾을 수 있을지도.

‘용의 발톱을 받았으니 곧 새로운 친자 검사 방법을 알아낼 수있을지도 모르는데……. 타이밍이 별로 안 좋네.’

그래도 다음에 돌아올 때에는 완성되어 있을 것이다.

“머리숱도 많으셔라. 자른 지 얼마 안 됐는데 조금 더 숱을 칠 걸 그랬어요.”

내 머리를 땋아 올리며 에스더는 붙임성 있게 말을 걸었다.

“리본은 노란색으로 할까요? 아가씨가 좋아하시는 색깔이잖아요.”

“좋아요.”

“시내에 체리 뷔페를 크게 하는 레스토랑이 생겼더라고요. 엄청 괜찮던데요? 아가씨께서 체리를 좋아하시잖아요. 돌아오면서 디엘이랑 들러도 좋을 것 같아요.”

“추천 고마워요, 에스더.”

벌써 내 식성까지 완벽히 파악한 에스더를 보며, 나는 제니 때 와는 다르게 정말 귀족 영애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살짝 어색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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