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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29화 (29/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29 화

3. 그는 성년이 되고

“그러니까…… 잘 지낸다, 이 말이죠?”

로만은 공작 부인의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차를 마셨지만 속이 타는 것 같았다.

착실하게 모든 일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에르안이 머나먼 남쪽 땅 으로 떠나 버렸다.

그 사실을 뒤늦게 듣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랐다.

게다가 아예 교역마저 끊겨 어떻게 손을 써 볼 수도 없는 상태 로 5년이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그래. 이제 바닷길만 열리면 다시 돌아올 거란다. 황태자님이 완전히 승기를 확실히 했다고 하 는구나.”

“그것참 잘되었군요.”

로만은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며 애써 미소로 대답했다.

황태자마저 그 해적들의 소굴에서 멀쩡히 살아 돌아오다니.

“거기서는 건강해지는 게 사실이람니까?”

“소식을 들어 보면 확실히 나아진 것 같던데.”

“그 조수 여자애가 그랬지요?”

“응, 실력도 뛰어나고 아주 믿음직한 애라서.”

걱정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의 공작 부인과는 달리, 로만은 초조함을 애써 감춰야 했다.

공작 부인을 독살하려고 했던 일도 도중에 들켜 버렸고, 5년 동안 기회를 호시탐탐 노려봤지 만 새로운 첩자를 들여보내는 것도 실패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워낙에 공작 부인을 둘러싼 경계가 철저해져서 있는 첩자들도 활용하기 어려웠다.

에르안에게도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 답답했는데, 이제 성년이 되어서 돌아온다니…….

이제 더 이상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

아침부터 빠른 친자 검사를 위해 연구실에 박혀 있는데, 디엘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리체!”

그가 숨을 헉헉대며 내 이름을 외쳐서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돌았다.

“네 말이 맞았어.”

“내 말은 항상 맞지. 그런데 무슨 말?”

“제이드 황태자님이 해적을 결국 다 소탕할 거라는 말!”

디엘은 감격에 겨워하며 내 앞 에 앉았다.

나는 성분을 분석하고 있던 약초를 내려놓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쯤 황태자인 제이드가 완전히 해적을 다 물리쳤던 기억이 있었다.

‘황태자 제이드…… 엄청 유능한 사람이었지.’

세르이어스 영지는 엄청난 부와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웨데릭은 순식간에 이 영지를 반란군의 기지로 사용했고, 얼마 버티지도 못해서 바로 황태자 제이드에게 진압되었다.

‘하지만 자비가 없는 사람이기도 했어.’

내게 사형 선고를 내린 사람도 제이드 황태자였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반란을 도운 사람 전원의 명단을 가져와라.’라고 한 뒤 사형 선고를 내린 당사자였다.

물론 제이드 황태자는 아마 나 라는 존재가 있는지도 몰랐을 테고, 그냥 반란군 기지의 의사였다니 참수 명단에 올려 버렸을 것이다.

‘그래도 꺼려지긴 마찬가지야.’

마지막에 멀리서 보았던 그는 심지어 애꾸눈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해적을 소탕할 때 전투에서 다친 상처가 계속 덧났다고 했다.

‘역시 그쪽하고는 그냥 얽히지 않는 편이 좋지.’

끔찍했던 지하 감옥을 떠올리며 나는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어쨌든 봄이 오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에르안이 이르비아 에 간지 벌써 만 5년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이제 이르비아의 바닷길이 열리 고 또 서신도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다.

“최대한 정리되는 대로 항로를 다시 운영한대.”

“잘됐네.”

나는 여전히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었다.

회귀 전에도 키가 그렇게 크지 않았는데, 그냥 그때의 모습과 비슷하게 컸다.

갈색 머리카락은 그래도 꽤 길 게 길러서 구불거렸고, 이제는 아가씨들이 입는 드레스를 입었 다.

공작 부인 역시 이제는 내가 소녀가 아니라 슬슬 혼기가 차고 있는 귀족 영애처럼 보인다고 말 하곤 했다.

물론 나는 이러한 시간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반란이 본격적으로 일어날 때까 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사이에 에르안과 나의 성년식이 있었다.

에르안은 돌아올 테고, 무사히 공작 위를 물려받는 것은 물론 어디 아픈 곳이 없어야 했다. 내 가 지난 5년 동안 공작 부인을 잘 지켜 낸 것처럼.

절대 이 영지가 반란군들, 그러니까 이시더 남작과 웨데릭의 손 에 들어가면 안 되었다.

공작성에 와서 오랜 시간 지나면서 많은 사람과 정이 들었다.

웨데릭은 페렐르만 자작마저 죽이는 잔인무도한 인간이었다.

당연히 페렐르만 자작이 죽는데 디엘이라고 안 죽었을 리 없었다.

처음엔 대의적인 인류애로 시작 했는데, 지금은 소중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든 지켜야겠 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나저나 리체, 새로 바뀐 하녀는 괜찮아?”

오랫동안 내 곁을 지켰던 하녀, 제니는 한 달 전 어머니가 위독해지셨다며 어쩔 수 없이 공작성을 떠났다.

그녀는 본디 페렐르만 자작령에 있던 사람이라 고향도 이쪽이 아니었다.

하긴, 이제 제니의 나이도 상당히 많아서 은퇴할 때가 되기는 했었다.

페렐르만 자작의 어린 시절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새로운 하녀가 들어왔는데, 난 어차피 평민 출신이라 그다지 하녀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나는 이제 아이도 아니었다.

그저 머리 손질이나 옷 입는 것 을 도와주면 그걸로 되었다.

“뭐, 누가 와도 다 똑같지.”

내게 새로 배정된 하녀, 에스더는 원래 공작성에서 청소 및 침구 정리를 담당하고 있었지만 손 재주가 꽤 좋다는 이유로 뽑혔다.

“근데 머리 손질 솜씨가 확실히 좋아.”

나는 가슴께에서 일자로 잘린,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카락을 흔들며 말했다.

“제니보다 훨씬 깔끔하게 잘라 주지 않았어?”

“그건 그러네.”

“그나저나 디엘, 마침 잘 왔다.”

“응?”

이상하게 디엘은 내가 무언가를 시키고 싶을 때 잘 나타나는 특징이 있었다.

훌륭한 수족의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건 내가 제니한테 쓴 편지인데 잘 부쳐 주고, 내일 새벽에는 지프리 경매 시장에 다녀와.”

“지프리 경매 시장?”

“아마 용의 발톱이 경매에 나올 거야.”

나는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옛날에도 친자 검사 시약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이런저런 의학계 소식을 계속해서 수집해 왔다.

용의 발톱을 고가에 낙찰해 간 다른 연구가가 정확도가 상당히 높으면서도 결과가 빠른 친자 검 사 방법을 개발해 냈다는 걸 들었다.

그 당시 나는 용의 발톱을 살 돈이 없었다.

이후 반란군에 들어간 그 연구가가 황태자의 군대를 마주친 후 죽어버려서, 더 이상 그 방법을 알아낼 도리가 없어졌다.

용의 발톱은 너무 희귀하고 비 싸서 경매장에 잘 나오지도 않았다.

이번 경매만 해도 14년 만에 나오는 상품이라고 했다.

“그걸 사와.”

결론은, 결국 내가 사서 내가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다른 재료를 써 보려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용의 발톱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어차피 그 연구가가 개발할 때 까지 기다리는 것도 너무 오래 걸렸고, 그가 반란군에 들어가는 미래를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돈은.....”

“페렐르만 자작님께로 달아 놔.”

나는 새침하게 대답했다.

페렐르만 자작은 내게 연구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원하는 약초들을 실컷 쓰라고 말했다.

‘엄밀히 말해서 용의 발톱은 약초가 아니지만, 그래도 페렐르만 상단이 가진 돈이 얼만데. 이 정도는 되겠지.’

게다가 페렐르만 자작은 내가 돈을 쓰는 것에 있어서 전혀 뭐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작 부인에게 뭘 부탁 할까 봐 눈을 부릅뜨곤 했다.

그래서 전혀 양심의 가책 없이 말했다.

디엘 역시 괜한 것을 물었다는 둣 고개를 끄덕였다.

“제니에게 편지, 내일 아침 경매.”

그는 다시 한번 중얼거리고 나서 씩씩하게 대답했다.

“친구의 부탁은 들어줘야지.”

“……그래.”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부탁해,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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