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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28화 (28/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28화

에르안은 그렇게 세르이어스 공작령 깃발이 달린 커다란 민간 선박을 타고 떠났다.

수많은 수행인들과 기사단, 온갖 제국의 고급 물품들이 실렸는데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반년이 안 되게 키웠을 뿐이지만, 그래도 매일같이 붙어있던 정이 있어서 배가 떠날 땐 눈물 도 찔끔 났다.

‘19살…… 성년 때 돌아오겠지.’

작은 둥을 바라보며 나는 한숨 을 쉬었다.

이제 우리는 그때까 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끼고 키우면서 키도 좀 더 키우고, 몸도 튼튼하게 만들고, 변성기라도 오면 목소리도 멋있게 관리해 주려고 했는데……’

마음대로야 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내 취향대로 키워 보려고 했는데 슬폈다.

그래도 몸이 좀 회복될 테니, 거의 쓰러질 것 같았던 회귀 전의 열아흡보다는 나을 것이라며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연약하게 돌아와도 뭐, 살아만 준다면.’

어차피 중요한 건 웨데릭에게 이 영지를 벳기지 않는 거였다.

함께 보낼 하인들과 기사단은 무조건 10년 이상 공작성에서 머문 사람들로 구성하라고 내가 강하게 주장했다.

혹시 모를 이시더 남작의 끄나풀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한둘 섞여도 크게 할 수 있는 건 없겠지만, 그래도 만전을 기한다는 의미에서였다.

“리체.”

디엘은 공작 부인이 두말 않고 하인과 기사단 명단을 내게 맡기는 것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의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공작성의 실세는 아무래도 너 같아.”

“지능 순으로 따지면 놀랍지도 않은 결과지.”

나는 디엘에게 쪽지를 쥐여 주며 어깨를 으쑥했다.

에르안을 보내고 난 후, 나는 바로 연구에 착수했다.

그 빌어 먹을 과자의 성분을 알아내야 했 기 때문이다.

에르안은 확실히 몸이 나아져 오겠지만, 알 수 없는 증상이 또 숨어 있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 과자 때문에 앓지 않아도 될 지병을 앓게 된 것일 수 도 있었다.

“여기 적혀 있는 시약 좀 구해 와.”

“……친구로서의 부탁이지?”

“응, 절대 명령이 아니야.”

어차피 본질은 같은데, 그 말을 들으면 좀 나은지 디엘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 엄청 희귀한 거네.”

내가 갖고 있는 시약으로는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어서 나는 온갖 시약들을 적어 두었다.

“하지만 넌 구할 수 있겠지?”

“당연하죠……. 아니 당연하지! 시간만 좀 줘.”

과자에 독을 섞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온갖 재료와 다 섞이는 데다가 심지어 방부제까지 함께 있어서 분석이 쉽지 않았다.

‘열심히 분석해 봤자, 이 과자를 웨데릭이 줬다는 건 5년 후에나 입증이 가능하겠구나.’

나조차도 몰랐을 정도면, 에르안은 아마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공작 부인이 나를 믿는 다고 해도, 웨데릭은 그녀의 친 조카였다.

게다가 나는 평민이고 그는 귀족이었다.

평민이 귀족을 고발하 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 다.

페렐르만 자작에게 얘기하려고 해도…… 페렐르만 자작은 자신의 딸을 받아 주었다는 것만으로 이시더 남작을 은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결국 나 혼자만 밝혀낼 수 있는 것이었다.

‘할 수 있지, 뭐. 난 똑똑하니 까.’

나는 실험 기구에 든 과자 몇 개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제 직접적으로 에르안에게 손을 쓸 수도 없으니 그쪽도 꽤 짜증 나겠어.’

공작 부인은 내가 매일같이 눈을 부릅뜨며 식단에서부터 간식 메뉴, 수면 시간까지 분석하고 있으니 또다시 노리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공작성에 외부인은 극히 드물게 드나들고 있었다.

공작 부인의 경계심이 한껏 높아진 것이다.

‘나 때문에 공작 부인을 직접적 으로 노릴 수 없다면, 다시 에르안이 돌아왔을 때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겠지. 반란은 그 즈음 에 점점 더 싹트기 시작하니까.’

나는 내가 짱 박혀 있는 이 조수 자리가 원래 그들이 이용했던 위치임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쓸모가 없어 나를 그냥 내버려 두겠지만, 슬슬 행동을 개시할 때에는 분명히 나부터 쳐 내려고 할 것이다.

‘두고 보라지.’

나는 턱을 치켜들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리고 지금쯤 도착했을 에르안에게 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어쨌든 내 처방 때문에 멀리 떨어지게 된 어린애였다.

그나마도 몇 달 있으면 서신도 끊겨 버릴 것이 뻔했다.

지금 보 낼 수 있는 한 많이 보내 놓아야 한다.

나는 ‘건강해야 한다’, ‘열심히 움직여라’, ‘공부도 꾸준히 해라’, ‘늘 주의를 경계해라’ 등의 잔소 리를 한 바탕 늘어놓았다.

5년 동안 못 본다고 생각하니 편지가 자꾸 길어졌다.

나는 마지막으로 거기서 이상한 녀석한테 가스라이팅 당하지 말고, 당당하고 자신 있게 크라고 열심히 몇 번이나 강조했다.

***

시간은 5년 동안 아주 성실히 흘렀다.

예상했던 대로 에르안이 이르비아로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해적들이 난동을 피워 해로가 막히고 말았다.

에르안을 보러 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서신 길도 막혔다.

짧은 서신만을 주고받을 수 있는 비둘기를 이용하여 간신히 생사나 전할 수준이었다.

[건강은요?]

[건강해.]

이런 짧은 쪽지를 주고받는 데에도 몇 달이 걸렸지만 끊긴 적은 없었다.

[별일 없죠?]

[키가 컸어.]

한 번 마법 아이템이 기적적으로 연결되어 목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에르안 님! 연결된 것 맞아요? 어디 아프신 데는 없으시죠?”

“……건…… 해. ……네 생 각…… 잊지……”

연결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그 당시 열여섯이었던 에르안은 변성기를 맞았는지 목소리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뭐 하세요?]

[네 생각 중.]

[왜요?]

쪽지로만 주고받는 연락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었다.

[보고 싶어.]

그곳에서 외로운지, 어리광이 좀 는 것 같기도 했다.

[너를.]

어린 시절 밤새 나누었던 이야 기가 무색하게 주고받는 쪽지는 짧았다.

[항상.]

그래도 나는 이게 옳은 선택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진짜, 에르안이 죽으면 모두 소 용이 없어.’

기사단도 어마어마한 인원이 함 께 갔으니 이르비아에서 평온하 게 성장기를 보내고 돌아오는 것 이 여러모로 미래를 바꿀 수 있 는 방법이었다.

5년 동안, 공작성의 사람들은 모두 비슷비슷하게 지냈다.

에르안이 없었으므로 핑계가 없어진 웨데릭과 이시더 남작의 방문이 눈에 띄게 준 것은 참으로 희소식이었다.

에르안은 그들이 아예 손을 쓸 수 없는 이르비아에서 훨씬 더 안전할 것이다.

물론 공작성에서도 그들의 영향력이 세지지 않도록 나는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다.

암살 시도 사건 이후 공작 부인은 성의 경계를 굉장히 강화시켰다.

내가 추천한 대로 새로운 사용인은 아예 받지 않았고, 나 역시 공작 부인의 건강 상태와 식단을 매일같이 확인했다.

그 누구도 헛짓거리를 하지 못 하도록 철저하게 대비한 결과, 5 년 동안 공작성에서는 별일이 생기지 않았다.

조금 슬프게도, 페렐르만 자작 에게도 별일이 생기지 않았다.

대륙 여기저기로 딸을 찾아 헤맸 지만 5년 내내 딸을 찾지 못한 것이다.

“금발에 녹안이 확실할까?”

디엘은 남몰래 내게 이런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

“갓난아이니까, 얼핏 보면 잘 모르지 않을까? 아기가 머리카락이 짧게 태어난다거나.”

“하지만 뭐, 그 전제가 없으면 전국의 여자애를 다 뒤져 봐야 하잖아.”

나는 어깨를 으쪽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페렐르만 자작이 불쌍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건 남 일이었다.

나도 가족을 찾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몇몇 사람들이 가끔씩 왔다 갔지만 내 친부모는 결국 계속 못 찾고 있었다.

페렐르만 자작이 먼 길의 여행을 떠났다가 지쳐서 돌아오거나 성으로 찾아왔던 나의 부모 후보 들이 그대로 돌아갈 때,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저녁을 같이 먹곤 했다.

“친자 검사를 빨리 할 수 있는 약물을 계속 개발 중이니까, 죽 기 전에는 찾지 않겠어요?”

실제로 나는 에르안이 없었기 때문에 이제 시간이 꽤 많았다.

그 망할 방부제 덩어리 과자를 조사하거나 친자 검사 약물을 연구하곤 했다.

물론 둘 다 쉽지는 않았다.

“리체, 곧 성년이던가?”

“네, 올해 여름에 성년이 돼요.”

“생일을 알아?”

“아뇨. 그냥 보육원에 도착한 날짜죠, 뭐. 보육원 선생님이 강에서 건지신 날.”

“……우리 애도 6월에 태어났는데.”

페렐르만 자작이 한숨을 쉬며 외알 안경을 벗었다.

“해 주고 싶은 게 정말 많았어. 누구보다도 아껴 주고, 누구보다도 풍족하게 키우고 싶었는데.”

그가 거칠어진 얼굴을 쓸며 중 얼거렸다.

“딸이라는 걸 알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하루하루 배가 불러 오는 시오니와 매일같이 해 주고 싶은 것들을 얘기하곤 했지.”

그건 내가 쓰고 있는 방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하…… 그 아이가 자라는 걸 못 보다니.”

“인생은 길어요. 전 그 마음으로 부모님을 찾고 있는데요.”

“올해도…… 못 찾겠지? 성년이 되기 전에 찾고 싶었는데 참 녹록지 않구나.”

“성년이 된 따님에게도 해 줄 수 있는 건 참 많을 거예요. 지금까지 아쉬웠던 것들올 다 모아 서 말이에요. 자작님 돈도 많잖아요.”

“……그럴까?”

“성년이 되었으니 결혼을 할 수 도 있는 나이잖아요? 해 줄 수 있는 거야 엄청 많죠.”

나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예를 들어, 정말 멋진 신랑감 을 찾아 주신다거나……”

“그게 무슨 소리야.”

아련하고 슬폈던 자작의 눈이 갑자기 번득였다. 확 달라진 표정에 나는 딸꾹질올 할 뻔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둣이 페렐르만 자작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내 딸은 절대 시집 안 보내.”

“네, 네?”

“무조건 내 딸이 아까워.”

나는 나도 모르게 두 손을 입가 에 가져다 댔다.

세상에, 그 딸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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