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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27화 (27/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27 화

“보세요, 에르안 님.”

그날 밤, 나는 에르안에게 약을 싸 주면서 말했다.

다 성장을 돕거나, 이르비아의 더운 기후에서 몸의 기력을 보완해 주는 약이었다.

“더워서 너무 지친 것 같으면 이 붉은 포장지의 약을 드시고, 좀 어지럽다 싶으시면 푸른 포장지의 약을……”

“리체.”

에르안은 산더미 같이 쌓인 약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너무 많아. 자주 올 거라며. 그때 또 가져오면 되지.”

“혹시 모르잖아요. 바닷길은 언제 막힐지 몰라요.”

나는 에르안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말했다.

사실 몇 통의 편지만 주고받다가 완전히 단절될 예정이라고 지금 말할 수는 없었다.

“혼자 멀리 떨어지시는 게 힘드실 텐데, 빠르게 결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이런 처방을 내려서 죄송하고요.”

“뭘.”

에르안은 어른스럽게 대답했다.

“건강해져서 오래오래 사는 게 더 중요하지.”

“그건 그래요.”

“마음 같아서는 리체도 따라오라고 하고 싶지만……”

그건 나 역시 바라는 바였다.

에르안을 따라 이르비아에 가면 마음이 훨씬 더 놓일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엄밀히 말하면 페렐르만 자작의 조수였고, 페렐르만 자작은 역시 딸을 찾느라 정기적인 외출을 해야 했으므로 내가 늘 공작성에 있어야 했다.

게다가 이르비아에서 에르안은 회복만 하면 되었기 때문에 딱히 주치의가 할 일이 없었다.

오히려 영지를 관리하고 있는 공작 부인 옆에 머무르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공작 부인이 아프거나 큰일을 당하면 공작령이 마비되기 때문이었다.

또 이시더 남작과 웨데릭도 이 근처에 있고, 위험한 건 확실히 이쪽이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겠지.”

“자주 편지할게요.”

물론 바닷길이 막히는 내년 봄 까지겠지만.

“리체, 나 잊지 마.”

“제가 어떻게 에르안 님을 잊어요. 절대 안 잊어요. 정말 매일같이, 건강하게 이 영지로 돌아오 도록 바라고 있을게요. 진심으로 요.”

에르안이 건강하게 돌아오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이 헛짓거리가 된다.

나는 간절하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내가 없어도 잘 커야 돼……”

“아, 리체. 약을 싸면서 이것도 좀 싸 줄 수 있어?”

“네, 뭔데요?”

“웨데릭 형이 올 때마다 주는 과자야. 밥 대신 먹으면 몸에 좋다는데, 요새 많이 안 먹었네.”

이건 또 무슨 소리? 웨데릭이 에르안에게 뭘 먹이고 있었다고?

내 눈이 번득이기 시작했다.

“왜 저한테 말씀 안 하셨어요?”

“그냥 오래 전부터 형이 준 거고… 네가 오고 나서 안 먹는 날이 대부분이었거든.”

당연히 모든 식단을 내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변수가 있었을 줄이야.

나는 에르안에게서 그 과자를 모조리 압수했다.

웨데릭이 몰래 먹이고 있는 거라면 몸에 좋을 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어쩌면....

“이건 그냥 두고 가세요.”

“왜?”

“오래전 것들이잖아요. 당연히 상했을 거예요.”

“형이 오래 두고 먹어도 괜찮다고 했어.”

“웨데릭 님보다 제가 더 의학적 지식이 뛰어나요. 안 돼요. 안 드셔도 지금까지 멀쩡하셨잖아요.”

“하지만....”

“어쨌든 안 돼요. 과자 같은 것들을 꼭 먹어야 낫는 질병은 없어요.”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은 뒤에, 나는 서랍을 뒤져 모든 과자를 찾아냈지만 몇 개 되지는 않았다.

이 시점에 웨데릭이 에르안에게 뭘 먹이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수상했다.

당장 연구실에 가서 분석해 보 고 싶은 것을 꾸역꾸역 참으며, 나는 에르안이 잠드는 것을 보려고 침대 머리맡에 앉았다.

“리체.”

“네?”

“와서 같이 누워. 불편하잖아.”

같이 눕는 것만큼은 언제나 거절했지만, 이제 5년 후 성년이 되기 전 마지막 밤이라고 생각하니 못해 줄 것도 없겠다 싶었다.

나는 그의 넓은 침대에 함께 누워서 그와 마주 바라보았다.

제법 살이 오른 그의 볼을 쓰다듬어 주면서 나는 다시 한번 말 했다.

“건강해져서, 부디 무사히 잘 돌아오셔야 해요.”

“리체, 내가 진짜 좋은가 봐.”

에르안이 씩 웃었다.

“1년에 몇 번씩 올 거라면서 왜 그렇게 애틋한 표정이야?”

‘아냐. 5년 동안 못 봐.’

“헤어지니까 아쉬워서 그러죠. 걱정도 많이 되고.”

“잊지 않을게.”

에르안은 낮게 속삭였다.

“솔직히 이르비아에서 5년이나 있으라고 할 때, 너랑 페렐르만 자작이 순간적으로 원망스러웠던 건 사실인데…… 다 걱정하는 마음이라는 걸 아니까.”

“아직 어리신데 과한 처방이긴 하죠. 그래도 다 에르안 님을 생각한 결정이에요.”

“리체, 우리는 서로에게 유일한 관계라고 했잖아…… 친구보다도 가까운.”

“네, 그랬죠.”

“내가 없더라도, 다른 사람한테 그런 소리 하면 안 돼.”

“절대 안 그럴게요.”

나는 나도 모르게 웃으며 대답 했다.

실제로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있지도 않았다.

“5년 동안 매일매일 에르안 님 만 생각하고 살게요. 진짜요. 그러니 건강하게만 돌아오세요.”

“나도.”

에르안은 내 손을 꽉 잡았다.

“나도 5년 동안 매일매일 리체만 생각할 거야.”

우리는 그런 얘기를 나누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

[어떤 놈이야? 응?]

검은 눈의 청년이 내 두 볼을 붙잡은 채 웃고 있었다.

아니, 입 은 웃고 있었는데 눈은 하나도 웃고 있지 않았다.

새까만 눈에 분노가 이글거려서 순간 뒷골이 서늘했다.

남자의 두 손은 너무 커서 내 얼굴을 폭 감쌌고, 심지어 우리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의 새끼손가락이 살짝살짝 내 귓불을 건드려서 어깨가 움찔했다.

[어떤 놈하고 바람이 나서 날 버리고 가겠다는 거야?]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름만 말해. 괜찮아. 죽이지는 않을게. ]

[그. 그게 아니라…….]

[사표라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응?]

그의 긴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내 귓등을 훌고 머리카락을 쓰다 듬었다.

가뜩이나 밀착된 몸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너무하잖아, 리체.]

얼굴이 서로 너무 가까워서, 긴 속눈썹마저 셀 수 있을 것 같았다.

[열셋, 잠시 떨어질 때에는 세상 애처롭게 굴더니 떠난다고? 그게 말이 돼?]

내가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 만 이상하게 목소리가 들리지 않 았다.

다만 그의 낮은 목소리만 이 선명했다.

[너를 만나지 못한 5년간 난 약속대로 매일매일 네 생각만 했어.]

붉은 입술이 닿을 둣 말 듯했다.

[매일 밤 널 볼 수 있는 지금은 그럼 어떨 것 같아?]

나는 가까스로 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다. 드디어 내가 무슨 소 리를 하는지 들렸다.

[사표는 제 권리예요.]

평소의 나 같은, 또박또박한 어 조였지만 아이의 목소리가 아니 었다.

나 역시 열셋이 아니라 이미 어른인 것 같았다.

결국 내 손등을 끌어다 그가 입을 맞추자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가 홀러 나왔다.

[이런 식으로 유혹하지 않으면 꼭 그렇게 냉정하게 대답하더라.]

그가 앞니로 살짝 내 손가락을 물며 눈매를 휘었다.

[사람 미치게 말이야. ]

그의 혀가 내 손가락을 부드럽게 핥으며 감기기 시작했다.

문제는 내 시선이 자꾸만 그의 붉은 입술과 목울대로 향한다는 점이었다.

그가 괜히 ‘유혹’이라 는 단어를 쓴 게 아니었다.

이 요망한 인간!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다 싶어 나는 도리질을 쳤다.

‘정신 차려, 리체! 미쳤어? 아무리 잘생기고 몸이 좋아도 왜 본능을 못 이겨!’

내 뇌가 이렇게 각막에 잘 지배 되는 성질을 갖고 있었나.

간질간질한 느낌에 나는 정신없 이 고개를 혼든 뒤에 눈을 억지로 크게 떴다.

그리고 어느새 시야에 있던 그 퇴폐적인 검은 눈의 남자는 사라져 있었다.

내 손을 잡고 곤히 잠든 열셋의 에르안이 있을 뿐이었다. 에르안 의 손도, 내 손도 단풍잎처럼 작았다.

‘진짜 이상한 꿈이네.’

개꿈이 다 그렇듯이, 몇 분 지나면 다 휘발되어 버리겠지만 바로 이 침대에서 일어났던 일 같은 찜찜함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

‘이럴 때가 아니지. 얼른 저 빌어먹을 과자 성분이나 파헤쳐 보자.’

나는 그 불길하기 짝이 없는 과자들을 챙겨서 재빨리 에르안의 방을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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