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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26화 (26/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26화

이번에 페렐르만 자작이 다녀온 ‘이르비아’라는 곳은 상당히 멀었다.

배를 타고도 남쪽으로 꽤 오랜 항해를 해야 했다.

얼마나 남쪽 끝에 붙어 있는지, 이르비아는 사계절이 없고 계속 해서 여름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제국에서는 거의 가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내가 열아흡이 되었을 때 갑자기 의사들 사이에서 교역이 활발해졌는데, 이르비아의 풀 들이 상당히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였다.

나도 좀 몇 개 얻어 내서 연구해 볼까 하는 찰나에 에르안이 죽고 난리통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페렐르만 자작이 가져온 ‘살살이풀’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약초를 며칠 동안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자작님.”

그러고 나서 나는 영리한 천재 의사답게 대단한 결론을 이끌어 내고 말았다.

“이것 좀 검토해 주실래요?”

페렐르만 자작은 직접 내 연구실에 와서 나의 보고서를 읽어 주었다.

주치의보다 더 좋은 연구실을 가진 조수라니 뭔가 안 맞는 것 같긴 했지만…….

“이게 에르안 님의 중상을 분석한 거고요, 이게 살살이풀의 효능을 알아본 거예요.”

물론 내 결론이 맞겠지만, 검토 해 줄 만한 사람이 있다는 건 꽤 괜찮은 일이었다.

보고서를 빠르게 읽은 페렐르만 자작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래…… 이 처방이면 원인을 모르더라도 치료는 가능하겠어.”

“그렇죠?”

“하지만 상당히 처방이 까다롭군.”

“다른 방법이 없는걸요.”

나는 어깨를 으쪽했다.

이름도 원인도 모르는 병이었지만, 살살이풀이 워낙에 특이한 효능을 갖고 있어서 가능한 처방이었다.

이렇게만 하면 에르안은 건강해 질 수 있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몇 가지 조건들이 있을 뿐이었다.

페렐르만 자작은 고민이 된다는 둣이 한숨을 쉬었다.

“에르안 님은 이제 열셋이야. 아니지, 곧 열넷이 되나.”

“하지만 세르이어스의 유일한 후계자예요. 지금 대륙을 모두 뒤진다고 해도 방계조차 없는 상황이잖아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병 때문에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영지가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리고…… 빨리 보내야 해 요. 되도록.”

“빨리? 너무 어리신데.”

“굳이 질질 끌 필요 없잖아요. 더 좋은 치료법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는데.”

“마님께 말씀은 드려 봐야겠군.”

페렐르만 자작이 보고서를 덮으며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잘했다.”

내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지금 이 인간이 나를 칭찬한 거야? 물론 잘났지만, 자기 잘난 맛에만 살던 페렐르만 자작이?

당연히 자신이 살살이풀을 가져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라고 생색을 낼 줄 알았던 그가 이런 소리를 할 줄은 몰랐다.

“어, 어…… 뭘요.”

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페렐르만 자작과 나는 잠시 어색한 침묵을 견디다가, 결국 페렐르만 자작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니지. 내가 뛰어난 통찰력으 로 살살이풀을 가져와서 이런 일이 생긴 거지.”

이제야 좀 대화가 통하는 것 같아서 나도 새침하게 덧붙였다.

“제가 똑똑해서 짧은 시간 내에 이 정도나 알아낸 거죠.”

우리는 결국 공작 부인과 에르안에게 갈 때까지도 투닥투닥했다.

공작 부인과 에르안, 나와 페렐르만 자작 이렇게 넷이 테이블에 앉은 건 내가 처음 온 날 빼고 처음이었다.

맨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페렐르만 자작이었다.

“중대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혹시 그만두실 생각이라면.”

공작 부인이 차를 마시며 차분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리체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주치의로 등록하기 위해서는 성년까지 기다려야 하잖아요.”

나는 민망해져서 눈동자를 굴렸지만 공작 부인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지금처럼 이름만 계약서에 올리시고 마음껏 따님을 찾아도 된다는 말씀이에요.”

“……그게 아니고……”

“물론 나중에 리체를 데려가시면 안 됩니다. 리체는 우리랑 직접 계약서를 쓰는 것으로 하죠.”

“마님.”

“어차피 리체는 지금도 말이 조수지, 거의 주치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요. 월급도 그에 준하여 주고 있답니다.”

어찌나 말투가 냉랭한지 다른 사람 같았다.

아니다. 원래 공작 부인은 저런 성격이었다.

이런 대화가 익숙한지 페렐르만 자작도 딱히 개의치 않아 보였다.

“저 안 그만둡니다.”

“그런가요.”

공작 부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페렐르만 자작을 바라보았다.

“그럼 왜 이렇게 다 갑자기 부르신 거죠?”

“리체가 열심히 연구한 결과…… 에르안 님의 지병을 치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습니 다.”

에르안도, 공작 부인도 놀란 눈으로 숨을 들이켰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에르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역시 리체야.”

나는 그 예쁜 웃음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살짝 시선을 돌렸다.

“네가 오고 나서 확실히 죽을 만큼 아픈 적이 없었어.”

“하지만 본질적으로 회복된 건 아니에요.”

눈을 내리깔면서 내가 말했다.

“며칠 전에도 어지럽다면서 쓰러지셨잖아요.”

“그래도 옛날처럼 숨이 막히지는 않았어.”

페렐르만 자작이 외알 안경을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건 몸이 전반적으로 튼튼해 져서 생긴 일입니다. 리체의 말대로,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으셨어요. 본질적인 치료가 없다면 성장기 동안 어떻게 더 악화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공작 부인이 간절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치료법이 뭔가요?”

“리체가 알아낸 건데……”

페렐르만 자작은 차마 입을 열 지 못하는 내 어깨를 두들겨 주고 말했다.

“이르비아 지역의 ‘살살이풀’이 라는 특수한 약초를 먹으면 됩니다.”

공작 부인이 눈을 깜빡였다.

“몹시 간단하네요. 그 약초를 구하기 힘든가요?”

“구하기 힘들지만, 제가 이미 구해 왔습니다.”

“그럼 이야기가 끝난 것 아닌가요?”

“그게……”

모처럼 기쁨에 반짝이는 공작 부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페렐르만 자작이 말을 이었다.

“그 이후 적어도 5년간의 후처치가 필요합니다.”

“후처치라면……”

“외부의 급격한 온도 변화가 있으면 안 됩니다. 살살이풀이라는 것이 원래 온도 변화에 취약한 식물이라.”

“사계절이 있는 공작령에 머무실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공작 부인과 에르안의 입이 살 짝 벌어졌다.

“5년간 사시사철 온도가 똑같은 곳, 그러니까 남부에서 지내셔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이르비아 지역이 있겠군요.”

공작령의 하나뿐인 후계자를 배를 타고 먼 항해를 해야 하는 남쪽 땅으로 보낸다는 얘기였다. 그것도 5년 동안.

“다른 곳보다는 이르비아가 도 시의 규모가 커서 가장 지내기 편하실 겁니다. 제가 막 다녀온 곳이기도 하고요. 치안도 괜찮고 여러 모로 평화롭습니다.”

지금 막 열넷이 된 에르안은 성년이 되어서나 이 땅을 밟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 공작 부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내키시지 않으면 다른 연구를 진행해 봐도 좋으나……”

페렐르만 자작은 차분하게 말했다.

“오래 연구해 온 저도, 그리고 남들보다 월등히 영리한 리체도 다른 방식의 해결책을 찾기란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잠시 얼음과도 같은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공작 부인은 가만히 앉아 있다가 나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 했다.

"리체.”

“네.”

“정말로 네가 연구해 낸 방법이니?”

“네.”

“너도 에르안이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네”

대답은 어려웠지만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차마 에르안을 바라보지 못하는 내게로 에르안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는 매일 밤 나와 같이 자야 한다고 졸랐지만, 이제 머나먼 남쪽에서 혼자 잠들게 될 것이다.

“그래.”

내 대답에 공작 부인이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믿는단다.”

그 뒤에는 ‘나를 살려주었잖니.’ 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음을 눈치챘다.

나 역시 이것이 어려운 결정임을 알았기 때문에 에르안의 눈조 차 마주할 수 없었다.

비록 4개월 남짓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키우다시피 한 애인데……. 매일 밤 내가 토닥이며 재우고 칭얼거림도 다 들어 줬는데.....

“에르안, 너는 어떠니.”

“가지 않으면 건강해질 수 없는 거잖아요.”

안 가겠다고 칭얼거릴 줄 알았던 에르안은 생각보다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도 리체를 믿어요. 가겠어요.”

한 번도 영지 밖으로 벗어나 보지 않은 애였다.

늘 몸이 약해서 공작성 밖에도 잘 나가지 않았다.

맨 처음 보았을 때의 그 비쩍 마른 소년이 생각나 나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이 아늑한 성을 떠나 저 멀리 남쪽의 이르비아에서 5년 동안이 나.

“아마 살살이풀을 드시면 모든 통증과 증상이 사라져서, 완전히 건강한 일반인처럼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페렐르만 자작이 무거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물론 오셔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아 봐야 더 정확히 알겠지만요. 적어도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이 생기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요?”

“멀리 떨어진 곳에 계시더라도, 오히려 더 건강하고 쾌적하게 성장기를 보내는 기회가 될 수도 있어요.”

잠시 정적이 흘렀고, 나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침묵을 깬 사람은 에르안이었다.

“기사단의 사람들 몇몇만 함께 가게 해 주세요.”

에르안은 걱정이 가득한 공작 부인의 얼굴을 보면서 씩씩하게 말했다.

“가서도 검술 수련은 하고 싶으니까요.”

“공작가의 단 하나뿐인 후계자 이십니다. 몇몇이 아니라, 당연히 수행인들을 포함하여 한 개 사단 정도는 같이 가셔야죠.”

페렐르만 자작의 말에 나 역시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안이 내 눈을 보며 살짝 웃어 보여서 나는 더 아쉬워졌다.

살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매일같이 붙어 있으면서 정이 많이 든 모양이었다.

“우리가 가면 되지.”

공작 부인은 괜찮다는 둣이 억지로 웃었다.

“1년에 서너 번은 우리 모두 이르비아로 널 보러 가도록 하마.”

“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르비아와의 교역이 내 나이 열아흡 때부터 활성화된 이유가 있었다.

당장 돌아오는 봄부터 해적 떼가 기승을 부려, 이르비아와 제국의 해로가 끊길 예정이었다.

황태자 제이드가 해적 소탕을 마치는 5년 후까지 우리도 이르비아에 갈 수 없었다.

페렐르만 자작에게 최대한 빨리 보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5년 후에야 다시 만날 수 있겠지만, 그때까지는 서신도 주고받기 어려울 것이다.

‘다행인 것도 있어.’

나는 최대한 아쉬운 마음을 다 잡았다.

‘웨데릭과도 멀어지니까, 그 어떤 사람에게도 주눅 들지 않고 제 성격대로 잘 자랄 수 있을 거 야.’

회귀 전, 기억 속의 19세 에르안은 비쩍 말라서 눈에도 힘이 없었는데…….

내가 옆에 없으면 그것보다도 더 왜소해지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내가 옆에서 끼고 키 워야 더 키도 크고 튼튼해질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그가 요 절하지 않고 건강히 사는 거니 까.

에르안은 담대하게 차를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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