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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25화 (25/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25 화

“아,진짜 미치겠네.”

나는 펜을 던지고 나서 연구실 에서 머리를 감싸 안았다.

공작 부인의 부탁도 있고 해서 에르안과 계속 붙어 다니며 별 처방을 다해 봤는데도 지병의 원 인을 알 수 없었다.

물론 검술 수업도 받고,내가 여러모로 잘 먹이고 있으니 예전보다야 훨씬 나아졌다.

하지만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발작과 어지럼증은 여전히 이유를 몰랐다.

하긴, 이 이름 모를 병의 원인 은 페렐르만 자작도 찾아내지 못 했다.

면역력이 많이 올라가서 옛날처럼 생사를 오가는 정도의 상황은 생기지 않았지만 내 마음은 조급 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살려야 하는데.”

에르안이 검술 수업을 받거나 가정교사에게 이것저것 배울 때 면, 나는 계속 연구실에 틀어박 혀 있곤 했다.

여전히 종종 이시더 남작과 웨데릭이 찾아왔지만 별다른 움직 임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에르안이 성년이 될 때까지 숨 죽여 작업한 아주 대단한 사람들이야.’

나는 웨데릭이 에르안을 찾아올 때면 이를 갈면서 혼자 짜중을 내곤 했다.

‘또 새로운 계략을 짜기 위해 몇 년이고 기다릴 사람들이지. 보통이 아냐.’

조금 이상한 건, 가끔 티타임에 서 이시더 남작에 대해 말하는 공작 부인의 어조였다.

공작 부인은 ‘로만은 거대한 계략을 스스로 짤 수 있을 만큼의 지능도 대담함도 없다.’라는 뉘앙스의 말을 하곤 했다.

자신의 남동생을 그렇게 모르나 싶다가도 또 공작 부인같이 냉철한 사람이 그렇게 사람 보는 눈 이 없을까 싶기도 했다.

‘아니면 혹시 더 큰 배후가 있는 걸까?’

하지만 거기까지는 내가 알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일단 지 금은 세르이어스 공작령을 지키 는 것에만 초점을 두기도 벅찼다.

내가 지켜야 할 것에는 ‘조수’라 는 내 자리도 있었다.

계속 바뀌는 페렐르만 자작의 조수 자리가 그들에게 얼마나 편한 위치인지 알게 된 지금,나 역시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하루하루는 부지런히 흘러갔다.

가끔가다 갈색 머리카락에 녹안을 가진 열셋의 여자아이를 잃어 버렸다며 사람들이 두어 명 찾아 오곤 했다.

하지만 복잡하고 오래 걸리는 친자 검사를 다 거치기도 전에 초반 머리카락 검사에서 ‘불일치’ 가 떠 버렸다.

뭐,쉽게 부모님을 찾을 수 있 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이 오고,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며 떠나갈 때마다 공작 부인은 나를 불러다 꼭 저녁을 함께 먹었다.

그 자리에는 에르안도 꼭 같이 있었고 내가 눈을 부릅뜨지 않아도 접시를 싹싹 비웠다.

내가 더 이상 잔소리하지 않게 배려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기특한 것,다 컸네.’

나는 어차피 큰 기대를 하지 않아 괜찮은데,공작 부인은 몇 번 이나 말하곤 했다.

“공작성에 오래오래 머무르렴. 여기가 네 집이야.”

뭐,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내 신분이 평민이라는 걸 잊지는 않고 있었지만, 어쨌든 여기 서는 귀족 영애들이나 입는 고급 스러운 옷을 입고 남이 공들여 차려준 식사를 했다.

하기야,내가 공작 부인의 목숨 을 살려 준 셈인데 이런 대접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뻔뻔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성년이 되자마자 주치의로 공식 계약을 하는 게 어떻겠니?”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여기 보다 더 좋은 직장은 없었다.

“……생각해 보고요.”

일단 에르안을 살려야 내 일신 의 안위도 생각할 수 있는 셈이었다.

만일 이대로 에르안의 지병을 치료하지 못한다면…… 그 결과 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식사를 마치고,에르안과 함께 방으로 들어가는데 디엘이 복도 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르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내 손을 꼭 잡았다.

“디엘? 무슨 일이야?”

디엘이 에르안의 눈을 억지로 피하며 말했다.

“페렐르만 자작님께서 오셨어.”

“아,맞다.”

그러고 보니 오늘 페렐르만 자작이 오는 날이라고 했던 것 같 았다.

“당연히 인사는 드려야겠지?”

“어, 너한테 버릴 것이 좀 많다고 하셨어.”

“버릴 것?”

“뭐,알잖아.”

나는 어깨를 으쪽했다. 그리고 에르안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말했다.

“자작님께 가야 할 것 같아요. 저녁 공부는 에르안 님 혼자서 하실 수 있으시죠?”

그동안 저녁 식사 후에는 함께 방에서 공부를 하곤 했다.

나는 의학 서적을 읽고,에르안 은 가정교사들이 주는 숙제를 했다.

가정교사들은 모두가 에르안의 학습 능력에 감탄하며 호들갑을 떨곤 했다.

귀족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으니 그 정도는 내가 객관적으로 판단이 불가능했고, 에르안은 그 냥 ‘아랫사람들이 다 그렇지,뭐.’ 라며 딱히 뿌듯해하지도 않았다.

“잘 땐 와야 돼.”

에르안이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나는 너 없으면 못 자니까.”

“몇 번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건 그냥 기분 탓이에요. 혼자 잘 주무실 수 있어요.”

나는 아직까지도 매일 밤, 그가 잠들 때까지 손을 잡아 주곤 했다.

내 손을 꼭 잡고 잠든 에르안의 얼굴을 볼 때면 어린 동생을 키우는 것처럼 귀엽다는 생각이 왈칵 들곤 했다.

“그래도 와 줘.”

그래서 이런 마구잡이식 생떼도 그저 아기같고,정이 많은 것처 럼 느껴졌다.

“뭐, 어려운 일 아니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여 준 다음에야 에르안은 한 번 더 디엘을 노려보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저기……”

디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에르안 님이 날 싫어 하시는 것 같지?”

“어.”

디엘을 노려보던 그 눈빛을 생 각해 봤을 때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그래도 그 꼬맹이가 무서우면 뭐 얼마나 무섭다고,디엘은 꽤나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왜 일까?”

“못생겼나 보지. 보기만 해도 불쾌한가 봐.”

“객관적으로 그건 아닐 텐데.”

“애들 눈은 좀 다를 수 있으니 까.”

“넌 애가 아니고?”

“애치고는 좀 똑똑하지 않아?”

“그래도 열셋인데……”

“시끄러워. 자작님께나 가자.”

디엘은 즉시 입을 다물고 페렐 르만 자작의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페렐르만 자작이 가져온 엄청난 짐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은 별로 없었다.

특히나 옷은 지금 너무 많아서 처치가 곤란할 지경이었다.

이르비아는 심지어 사계절 더운 남부 지역이라 여름옷들만 잔뜩있었다.

내가 평범한 귀족 영애였다면 여기저기 티타임도 다니고 살롱도 다니고 해서 화려한 옷이 필 요했겠지만 나는 그냥 평민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공작가에서 고용한, 페렐르만 자작이 고용한 조수였다.

어차피 예쁜 옷이고 장신구고 다 공작성에서만 입어 야 한다는 뜻이었다.

시내를 나간다고 해서 굳이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시큰둥한 표정을 보고 페렐르만 자작이 살짝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어?”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뒤집는 한 방이 있었다.

“이건…… 정말 난생처음 보는 약초 인데요?”

내가 눈을 반짝이며 숨을 몰아 쉬었다.

회귀 전에도 본 적이 없는 특이한 약초였고,조금만 살펴봐도 엄청난 효능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나도 처음 봐서 갖고 왔어. 거기서는 ‘살살이풀’이라고 부르던데. 남부라 이름이 이상해.”

페렐르만 자작이 드디어 뿌듯하다는 둣이 고개를 들었다.

“이르비아 지역의 기후가 특이 해서 확실히 희귀한 약초들이 많더군.”

“하긴, 거긴 사시사철 덤다면서요.”

“평소 같았으면 아직 효능도 밝혀지지 않은 그런 땅의 약초엔 관심이 없었을 텐데……. 크홈.”

“없었을 텐데요?”

“네, 네가 연구를 좋아한다고…… 하니……”

“아.”

“딱히 뭐,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고.”

페렐르만 자작의 뒤에서 디엘이 그냥 넘어가 주라는 둣 천천히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깨를 으쪽하며 대답했다.

“네. 저의 연구 때문에 특별히 관심도 없으셨던 희귀 약초까지 구해 오신 건 절대 아니라는 걸 꼭 기억해 두겠습니다.”

“그래. 잘 기억해 둬.”

페렐르만 자작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 풀의 신선도를 유지하려고 아주 비싼 전용 용기를 사야 했으니까.”

그 말에 죄책감을 느낀 나는 알아서 자진으로 고백했다.

“친자 검사 연구는…… 더 진행 하지 못했어요. 하루 종일 에르안 님을 돌보느라.”

“그래. 우선순위는 에르안 님이지.”

“아무리 노력해도 지병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해서……”

“어려울걸. 나도 계속 살펴보았 지만 도저히 모르겠던데.”

페렐르만 자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속상해서 중얼 거렸다.

“규칙적인 수면과 올바른 식습 관으로 면역력을 많이 올리긴 했지만,도저히…… 무슨 독에 중독된 것 같기도 하고요.”

“그 생각도 해 봤지만 일단 중독된 이상 해결책을 알지 못하면 의미가 없어.”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디엘이 끼어들었다.

“그럼…… 자작님과 사이가 좋 지 않은 건 알지만, 그래도 황실 의료진에 의뢰해 보는 건 어떨까요?”

그 어처구니없는 말에 우리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동시에 대답 했다.

“우리가 모르는데 황실 의료진이 알 것 같아?”

“우리가 못 알아내는데 황실 의료진이 어떻게 알아?”

디엘은 살짝 질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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