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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24화 (24/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24 화

공작 부인과의 티타임을 끝내고 온실이나 둘러볼까 하여 정원으로 나오니, 에르안과 웨데릭이 라켓으로 공놀이를 하고 있는 것 이 보였다.

“오.”

한 달 전에도 둘이 놀고 있는 걸 봤었는데.

그때와는 다르게 에르안의 눈빛에 승부욕이 걸려 있었다.

축 처져서 미안하다는 표정만 지어 보이던 그 꼬마에 비하면 정말 한 달 만에 정신적으로 많 이 컸다.

엉덩이라도 두드려 주고 싶은 마음으로 나는 가까운 나무 그늘 에 앉았다.

“에르안 님!”

나는 크게 외쳤다.

“이기세요! 파이팅이에요!”

그 말에 에르안도 웨데릭도 나를 흘끗 보았다.

몇 번 공을 주고받더니, 웨데릭이 결국 에르안의 공을 놓치고 말았다.

웨데릭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심 하다는 듯 말했다.

“에르안,공을 이렇게 주면 어떡해? 반칙이야.”

“응?”

“라켓 끝에 맞아서 빗나간 거잖아. 내가 말했지,넌 운동신경 없 다고.”

“빗나가지 않았어. 원래 거기로 보내고 싶었어.”

“넌 경기 규칙도 몰라? 하…… 그러니 하인들이 다 너를 무시하 지.”

나는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또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상황 같았다.

“아닌데요.”

야! 우리 애 왜 기 죽여!

나는 성큼성큼 걸어서 에르안의 옆에 섰다.

내 모습을 보고 놀란 웨데릭과 에르안의 앞에서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봤는데, 라켓 끝에 맞지도 않았고 반칙도 아니에요.”

“네가 뭘 안다고?”

“웨데릭 님이 팔만 조금 더 뻗으면 맞출 수 있었어요. 이건 웨데릭 님의 실책이에요.”

“야,너 페렐르만 자작님의 새 로운 조수 맞지? 어디서 시건방 지게……”

그 말에 앞으로 나선 건 에르안이었다.

“시건방지다니.”

에르안이 턱을 치켜들었다.

“리체한테 말 함부로 하지 마.”

웨데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 역시 에르안이 이렇게 무서 운 표정을 지어 보일 수 있다는 걸 상상도 못 했기에 깜짝 놀랐다.

그것도 자신에게 함부로 대해도 어쩔 줄을 몰라 하던 사촌 형을 대상으로.

“아무리 형이라고 해도 리체에게 화내면 가만있지 않겠어.”

“에르안, 너 지금 나한테 대드는 거야?”

“여긴 세르이어스 공작성이야.”

나는 순간 울컥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아이의 성향이 빠르게 바뀌지?

역시 성장기의 아이는 주변 환 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법이었다.

기사단에서 검술 수업을 받 더니 패기가 좀 늘었나 싶었다.

“나는 세르이어스 공작성의 차기 주인이고,형은 내 영역에서 내 사람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어.”

“내 사람?”

웨데릭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너 지금…… 나보다 리체가 더 가깝다는 거야? 공작성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어디서 온지 도 모르는 이 평민 여자애를?”

그 말에는 내가 대답했다.

“그런 것 같은데요.’

왠지 모르게,아직은 에르안을 내가 지켜 줘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나는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당연하지 않나요? 제가 더 예 쁘고 귀엽잖아요.”

“뭐?”

“이게 비교가 될 일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여러모로 제가 압승 인데.”

웨데릭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하지만 차마 자기가 더 예쁘고 귀엽다는 말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말을 하면 손거울을 내밀 어 주려고 했는데.’

물론 그가 평민 어쩌고 하며 더 난동을 피우고 싶어 하는 것이 눈에 흰히 보였다.

하지만 에르안이 생각보다 강경 하여 숨만 격렬히 몰아쉬는 중이 었다.

“아…… 제가 좀 더 똑똑하기도 하고요.”

“너, 진짜!

그의 눈 핏줄이 벌겋게 달아오 르고 나서야 에르안이 달래듯 그 의 팔을 툭 쳤다.

“오해하지 마, 형. 난 형도 참 좋아해. 하지만 리체에게 함부로 대하는 건 안 된다고 경고한 것 뿐이야.”

“에르안,너……”

“너무 서운해하지 말길 바랄게. 사실 리체 말이 다 사실이잖아.”

세상에, 감격에 겨울 지경이었다.

“리체, 갈까? 방까지 데려다줄게.”

나는 열일곱 살인 웨데릭에게 새침한 표정을 지어 보인 뒤 에 르안 몰래 혀를 살짝 빼물었다.

이상하게 승리감이 들었다.

씩씩거리는 그를 놔두고 돌아서는데, 에르안이 내 왼손부터 살 폈다.

“그 반지 안 꼈네?”

“네?”

“어제 디엘이랑 나눠 꼈던 거.”

나는 에르안을 바라보며 대수롭 지 않게 말했다.

“그건 일회용 통신 마법 아이템 이라,이제 더 못 써요.”

“그럼 버렸어?”

“아직 버리지는 않았고요, 연구 실에 있어요. 왜요?”

“아.”

에르안이 씩 웃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 었다.

“일회용이니 이제 버리긴 버려야겠죠.”

“그럼 나랑 같이 버리자.”

에르안에게 물건 버리는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다.

뭐 어려운 것도 아니고, 웨데릭 앞에서 내 편을 들어 준 게 기특 해서 나는 혼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웨데릭과 이시더 남작이 떠나고 평화로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공작성을 떠난 지 정확히 100일 만에 아르가가 돌아왔다.

디엘은 직접 항구로 아르가를 마중 나갔다.

약간의 기대를 가 지고 그를 기다렸으나 당연히 따 라오는 작은 여자애는 없었다. 역시 이르비아에서도 그의 딸을 찾는 건 실패한 듯했다.

이제 다른 지역을 뒤져야 한다 는 생각에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대륙은 넓었고,금발에 녹안을 가진 열셋의 여자애들도 흔치는 않았지만 꽤 있었다.

이제 페렐르만 자작이 공작성에 머무는 동안 자신은 또 그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자작님.”

오랜 항해로 약간은 거칠어졌지만,아르가는 꽤 잘생긴 얼굴이 었다.

열은 쌍꺼풀이 진 갈색 눈과 매 끈한 턱선,늘씬한 풍채 둥은 여전히 여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실제로 몇몇 귀족 여자들이 추파를 보내기도 했다.

물론 그 연 서들을 태워 버리는 것도 디엘의 일이었다.

아르가는 재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오로지 사랑하는 아내를 꼭 닮았다는 딸을 찾느라 인생을 다 바칠 것 같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르가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만 봐도 고생만 진탕 하고 수확은 하나도 없었음 을 알 수 있었다.

대신 그의 뒤에 일꾼들이 잔뜩 짐을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저건?”

연이어 내리는 짐들을 보며 디엘이 미간올 찌푸렸다.

보통 아르가는 최대한 단출하게 움직이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뭐,이것저것……”

“이것저것?”

“오다 주운 거야.”

“네?”

디엘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뒤통 수를 긁었다.

“그, 그래서 오다 주우신 것들이 뭔데요?”

“이르비아 지역의 장신구라든가 귀족 영애들이 입는 드레스라든 가 구두……”

“..............”

“고급 실험 기구,신선한 약초,최신 의학 서적과 새로 나온 약물 등.”

“정말 많이 주우셨군요.”

아르가는 외알 안경을 치켜올리며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디엘은 그와 함께 마차에 올라타며 어깨를 으쑥했다.

“그리고 다 리체에게 버리실 셈 이신가요?”

“공작성에서 이 물건들을 쓸 만 한 애는 리체뿐이니 어쩔 수 없지.”

“그냥 솔직히 말하세요. 생각나서 샀다고.”

“친자 검사 연구를 더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지 몰라. 괜히 부담 주고 싶지 않아.”

“오다 주웠다고 하며 저걸 다 주면 부담스러워하지 않고요?”

“안 그럴 것 같은데.”

아르가의 말에 디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는 리체라면 새침하게 감사하다고 잘 쓰겠다고 말한 뒤 냉큼 다 받을 성격이었다.

“뭐,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디엘이 한마디 하면 자신은 이 런 걸 받을 가치가 있을 정도로 공작성과 아르가에게 필요한 존 재라며 당당하게 말할 것이다.

근데 또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 도 없었다.

아르가는 팔짱을 끼고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다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어조로 말했다.

“디엘.”

“네?”

“내가 없는 사이…… 마님이 혹시 리체에게 뭘 해 주셨나?”

“어…… 음……”

“내가 갖고 가는 것들보다 더 대단한 걸 사 주기라도 했어?”

“아, 아뇨.”

아르가의 추궁과도 같은 질문에 디엘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리체가 별로 원하지 않았어요.”

“그래. 그 뼛속까지 까칠한 귀족 여인이 의사가 될 리체가 원하는 걸 알 리가 없지.”

“어…… 하지만 더 원하는 걸 해 주시고 계세요.”

아르가가 빨리 말해 보라는 둣 눈을 부릅떴다.

디엘은 얼어붙은 마차의 분위기 를 피부로 느끼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리, 리체가 친부모를 찾는 걸 도와주시고 계세요. 공작령 전체에 리체의 부모로 추정되는 사람 들을 찾고 있다는 칙령을 내리셨거든요.”

“친부모?”

“가끔 갈색 머리에 녹색 눈을 가진 열세 살 딸을 잃어버렸다는 사람들이 찾아오긴 하는데,아직 까지는 아무도 친자 검사를 통과 하지 못했어요.”

“..............”

“그,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면 어떨까요.”

디엘이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리체가 자작님만을 위해서 친자 검사 연구를 하는 게 아니다 뭐 이런.

본인도 부모님 찾으면 좋잖아요.”

물론 마차의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는 일 같은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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