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23화
“멜라니가 잡혔다.”
한밤중,이시더 남작은 웨데릭을 앉혀 놓고 조용히 말했다.
“물론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고 혀를 깨물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잡힌 건지 아십니까?”
“새로운 조수의 키푸르츠 열매 를 홈치다가 걸렸다고 해. 그 이상은 모른다.”
이시더 남작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알 수 있는 게 없군. 단순히 과일 도둑으로 몰려 잡힌 건지, 아니면 계속해서 독을 주입하고 있던 것까지 들킨 건지.”
“공작 부인께서 아버지께도 말 씀 안 하셨습니까?”
“워낙에 말이 없는 사람이니. 하지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주의할 필요는 있지.”
웨데릭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직 에스더와 케인은 남아 있으니까요.”
“당분간 몸을 좀 사려야 해. 아 직 시간은 많아. 에르안은 아직 어리니까.”
“하지만……”
웨데릭이 미간올 찌푸렸다.
“좀 달라졌어요. 에르안이 그 새로운 조수랑 친해진 것 같아 서. 게다가 이제 제가 주는 과자 도 잘 먹지 않는 것 같아요.”
이시더 남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또 그 새로운 조수야?”
“네, 실력이 좋은가 봐요. 한 달 전하고 좀 많이 달라졌어요. 페렐르만 자작보다 훨씬 더 세심하 게 챙겨 주는 듯해요.”
“고작 열세 살짜리가 챙겨 줘 봤자지.”
“그래도 페렐르만 자작의 딸 방 을 쓰고 있다던데요. 떠도는 소 문에는 완전히 천재라,페렐르만 자작이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해서 연구실까지 마련해 줬대요.”
“..............”
“그 애가 조수로 계속 있으면 새로운 사람을 투입하기도 어려 워지 잖아요.”
“유의할 필요가 있겠군. 그 애 를 좀 네가 직접 만나 봐라.”
이시더 남작이 웨데릭에게 말했다.
“당장 뭘 할 건 아니지만, 길게 보면 어쨌든 없애는 게 좋을 법 한 애 같아 보여.”
“에르안이 끼고 돌긴 하는데, 한번 보기는 해야 할 것 같아요.”
웨데릭은 팔짱을 끼고 결연하게 대답했다.
현재 남아 있는 세르이어스 공작가의 핏줄은 대륙 전체를 뒤져 도 에르안뿐이었고, 자신의 대모 는 세르이어스 공작 부인이었다.
아버지의 계획만 모두 다 이루 어지면 이 공작성은 다 자신의 것이 된다.
이미 반란군 세력에 이름을 올 린 것도 올린 것이지만,웨데릭은 이 광활한 영지와 화려한 공 작성을 차지할 생각을 하면 가슴이 설랬다.
그것은 이시더 남작 역시 마찬 가지였다.
“얼른 네가 이 성을 차지하는 것을 보고 싶구나.”
이시더 남작은 흐뭇하게 웃으며 그의 하나뿐인 아들을 바라보았다.
구석진 영지의 그저 그런 변방 귀족이었던 이시더 남작에게 어 느 날 갑자기 다가온 어떤 제안 은 마치 꿈결 같았다.
[일이 잘 되면 세르이어스 영지 가 다 자네 아들의 것이 될 거야.]
반란군의 최종 배후인 그는 이 시더 남작에게 이 모든 일을 지시했다.
[페렐르만 자작의 아내와 그 배 속의 딸만 처치해 주면 되네. ]
그 ‘배 속의 딸’의 끝을 직접 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어쨌든 이시더 남작은 그 사람이 원했던 결과는 이뤄 주었다.
그 딸은 살아 있을 가능성도 거의 없어 보였고, 살아 있다고 해도 페렐르만 자작은 절대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자네는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만 하면 돼. 알겠는가?”
늘 누나인 세르이어스 공작 부 인에 비해서 소심하고 무능력하다며 무시를 받아 온 그였다.
공작 부인은 절대로 자신이 세르이어스 공작령을 노리고 있다고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 한 깜냥이 되지 않겠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이시더 남작이 ‘그 사람’ 에게 이런저런 지령을 내려 받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그 두 목숨의 대가세르이어스 공작령이면 충분히 이득이 되는 거래 아닌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겠지 만, 지금까지는 성공적이었고 그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얼른 세르이어스 공작령을 삼키고, 그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가 반역에 성공하여 가장 높 은 자리에 섰을 때, 웨데릭은 이 광활한 땅을 차지하여 대귀족의 지위를 누릴 것이다.
***
다음 날,나는 공작 부인과 티 타임을 가졌다.
“선대 공작님이 돌아가시고…… 누군가가 나를 챙겨 준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 거의 처음이구나.”
공작 부인의 입꼬리가 아주 살 짝 올라갔다.
그녀는 내가 처방해 준 분홍빛 차를 잘 마시고 있었다.
이제 꾸준히 이렇게 오랜 시간 정화만 해 준다면 예전처럼 급사할 일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비밀까지 지켜 주다니. 대부분의 성 사람들은 그저 도둑질을 해서 내가 자비 없이 처형 한 것으로 알고 있단다.”
“도둑질 때문에 혀를 깨물 정도 로 심문한다는 건…… 공작성의 평판에 별로 좋지 않을 텐데요.”
“본디 나는 자비로운 이미지가 아니니 괜찮아.”
그건 맞는 말이었다.
회귀 전에도 공작 부인은 일처 리를 잘한다는 평은 있어도 성격 이 좋다는 소문은 없었다.
잘못한 이에게 자비라고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 영지 방방곡곡에 다 알려져 있었다.
지금은 덜하지만, 공작 부인이 막 대리인이 되었을 때 공작성 입구에는 계속해서 죄인의 시체가 걸렸다.
늘 두통과 불면에 시달렸으니 사람이 예민하고 날카로운 건 어 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은근히 극단적이기까지 했으니…….
“새로 들어오는 사람에게도 경각심을 줄 수 있겠지.”
“누가 마님을 해하려 하는지조차 모르시잖아요.”
차마 친동생인 이시더 남작이 배후라는 말도 못 하고 나는 차 분히 말했다.
“계속해서 조심하는 것이 좋아 요. 아주 작은 것이라도 절대 증상을 숨기지 마시고,정기적으로 채혈을 해서 검사하는 게 좋겠어요”
이시더 남작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테니, 꾸준히 중거를 모아 야 했다.
이쪽에서도 시간은 많았다.
“전문적인 의학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배후에 꼭 껴 있을 걸요.”
나는 의미심장한 어조로 덧붙였다.
어느 정도 의학 교육을 받은 사 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 그를 바로 지목할 수는 없지만,그래도 알고 있으라는 뜻에 서였다.
“그리고 마님을 해칠 의도가 있 다면 에르안 님도 위험할 수 있 겠죠”
“어쩌면 에르안의 지병도……”
“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리 체.”
공작 부인이 내 손을 꼭 잡았다.
“부탁이다. 나보다는 에르안을 꼭 챙겨 줘.”
“그렇지 않아도 열심히 붙어서 지켜보려고 하는 중이에요. 아직 원인은 못 찾겠지만, 꾸준히 알 아봐야죠. 마님께서는 그러니 공 작성의 경계를 잘 살펴 주세요.”
이제는 두통도, 복통도 점차 사 라질 테니 못할 것도 없었다.
나 때문에 페렐르만 자작의 조수로도 못 들여보낼 테니 어떤 경로로 밀정을 투입시킬지 모른다.
이번에 잡힌 하녀 외에도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아랫사람들이 있 을 것이다.
“리체…… 약속해 주겠니?”
“뭘요?”
“절대, 절대 공작성을 떠나지 말아 주렴.”
“적어도 이 일이 모두 해결되고, 에르안 님이 안전해지실 때까지는 절대 안 떠날게요.”
흡족해할 줄 알았던 공작 부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 뒤에는?”
“……어……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성인이 된 후에는 공작성에서 계속 주치의로 있는 건 어떠니?”
“페렐르만 자작님이 있는데요?”
“내쫓으면 되지.”
‘아니, 살려 줬다고 이렇게 태세 전환을 해도 되나?’
제발 있어 달라고 부탁까지 했 다면서…….
내 떨떠름한 얼굴을 보며 공작 부인이 미소 지었다.
“그 사람도 얼씨구나 하며 딸을 찾아 떠날 거란다.”
“어…… 음……”
“그 어떤 곳보다도 대우를 더 잘해 주마. 응?”
“새, 생각해 볼게요. 아직 멀었 잖아요.”
그렇게 먼 미래까지는 계획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 이 무너져 가 는 공작가부터 살리는 것도 어려운 마당에…….
“이번 일의 보답으로 뭐라도 해 주고 싶은데, 원하는 건 없니?”
“제 인생에 이렇게 호화로운 의 식주는 처음이에요.”
나는 정말로 부족함 없이 지내 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래도 하나 부탁드릴 것이 있다면…… 제 가족을 좀 찾고 싶어요.”
“가족?”
“제가 보육원 출신이라서요.”
“아……”
“공작령 변방에 버려져 강물에 흘러온 걸 보면,그래도 이 영지 와 관련이 있지 않올까요?”
말을 하다 보니 간절해져서 나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갈색 머리에 녹색 눈을 가진 열세 살 여자아이를 잃어버린 사람이 있다면 친자 검사를 받아 보고 싶어요.”
공작 부인은 내 손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 리체. 공작령 전체에 전달하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가족…… 그래. 가족이 필요할 수 있겠지. 그건 당연한 건데,내 가 생각이 짧았구나.”
문득 나는 맨 처음 그녀를 봤을 때의 냉랭한 표정이 생각나지 않는 것을 의식했다.
누군가 공작 부인이 내게 이런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엄청 놀랄 것이다.
남들 앞에서는 도둑질한 하녀의 혀를 끊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싸늘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필요하면 나를 어머니라고 생각하렴.”
“무슨 소리세요!”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저는 평민이고,마님은 대귀족 이세요. 그런 말씀은 너무 부담 스러 워요.”
제국 내에서 귀족과 평민의 신 분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결혼조차도 불법인데, 어머니처 럼 생각하라니…. 이전 생이었 다면 눈도 못 마주칠 정도의 윗 사람이었다.
내 실력에 당당한 것과 평민으 로서의 주제를 아는 것은 별개의 문제 였다.
“……그러니.”
어쩐지 공작 부인이 아쉬운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