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22 화
“그래,오랜만에 산책을 하니 기분이 좋구나.”
공작 부인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니 다행이에요.”
나는 대답하면서도 고개를 가웃 거렸다.
‘이건 뭔가 그림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나는 오늘도 에르안과 공작 부인,셋이서 저녁을 먹었다.
내가 눈을 부라리니 에르안은 깨작거리면서도 어제보다는 더 많이 먹는 것 같았다.
나는 계획대로 식후에는 몸을 움직여 주는 것이 좋다며,온실 에 키푸르츠가 잘 자라고 있으니 구경할 겸 산책을 하자고 제안했다.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공작 부인이 가운데에 서고 키가 작은 나와 에르안이 양옆에서 걸을 줄 알았는데, 공 작 부인도 에르안도 자연스럽게 내 옆에 섰다.
한 손은 공작 부인에게, 한 손 은 에르안에게 잡힌 나는 졸지에 가운데 서서 천천히 정원을 돌고 있는 중이었다.
“에르안,웨데릭이랑 안 놀아도 되니?”
“오후에 함께 승마를 했어요.”
“숭마?”
“네,지켈이 말 타는 법도 가르 쳐 줘서.”
“그렇구나.”
공작 부인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겼어요.”
에르안은 무심하게 말했지만 나 는 감격에 겨워 에르안을 내려다 보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웨데릭을 이겼다니 좋아 죽을 것 같았다.
하나하나 더 성취 경험을 쌓아가면 웨데릭의 말에 흔들리지 않게 될 것이다.
“잘하셨어요.”
나는 방긋 웃으며 에르안을 내 려다보았다.
“제가 구경 갔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러게. 내가 이길 줄 알았으면 보여 줄걸.”
“이기지 않았어도 에르안 님을 엄청 응원했을 거예요.”
에르안의 뿌듯한 표정이 귀여워 서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쉬운데요.”
“그럼 다음에 응원하면 되지.”
“다음에도,그 다음에도 에르안 님만 응원할게요.”
“그래.”
에르안이 씩 웃었다.
“평생.”
그때 내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에서 번쩍번쩍 빛이 났다.
디엘의 호출이었다.
에르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왼손을 바라보았다.
“뭐야?”
“아,이제 온실에 좀 가 볼까 요? 바로 저기 모퉁이만 돌면 돼 요.”
나는 걸음을 바삐 옮기며 두 사 람을 이끌었다.
온실에는 불도 들어와 있지 않 았다.
하지만 역시, 구석진 곳에 있는 온실의 문 자물쇠가 풀어져 있었다.
“어? 왜 문이 열려 있지? 디엘이 안에 있다면 아직 환할 텐데.”
“문이 열려 있다고?”
공작 부인 역시 미간을 찌푸렸다.
달려가서 온실에 들이닥친 나는 곧바로 마법구를 밝히며 크게 소리 쳤다.
“누구야?”
특, 하고 둥근 키푸르츠가 떨어 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 린 곳에서는 하녀복을 입은 여자 가 덜덜 떨고 있었다.
내 뒤에서 공작 부인과 에르안 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녀의 사색이 된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긴,이시더 남작이나 웨데릭 이 직접 홈칠 리는 없었다.
바로 배후를 잡을 수 있을 것이 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다소 김이 샜다.
그래도 꼬리를 잡은 게 어딘가 싶어,나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내 키푸르츠를 훔치려고?”
“아, 아니……”
하녀의 붉은 눈이 불안하게 흔 들렸다.
“이건…… 디, 디, 디엘 님이 부 탁하셔서……”
“난 그런 부탁한 적 없는데.”
비료 더미 사이에서 허리를 두드리며 디엘이 기어 나왔다.
역 시 시킨 일은 엄청나게 잘했다.
그가 덜덜 떨고 있는 하녀의 손을 간단하게 결박한 뒤 내 앞에 무릎을 꿇렸다.
나는 황당한 표정의 공작 부인 과 에르안을 뒤에 두고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키푸르츠의 향은 워낙에 특이해서 초저녁 아니면 훔치기가 좀 힘들지요?”
“리, 리, 리체 님…… 그냥 먹어 보고, 먹어 보고 싶어서……”
“뭘 먹어 봐. 참외랑 똑같은 맛 인데요. 딱히 미식에 유명한 과 일은 아니잖아요? 수요가 없으니 까 구하기도 어렵고.”
“그, 그게…”
“키푸르츠의 강한 향은 특별히 비릿한 히피스꽃의 향으로 중화 되고.”
뒤를 돌아 공작 부인을 흘끗 본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히피스꽃은…… 각혈, 두통,복통 둥을 오랫동안 일으 키는 중독성 꽃이잖아요. 알고 있죠?”
공작 부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 은 여기서 공작 부인뿐이었다. 디엘이나 에르안은 공작 부인의 중세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하녀의 턱을 치켜들었다.
“요새 저 때문에 주방에 해산물이 싹 다 없어졌죠. 주기적으로 투입해야 하는 히피스 꽃잎을 어딘가 숨길 음식이 이제 하나도 없어져서 난감했을 거예요.”
하녀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딱히 대찬 첩자는 아닌 모양 이었다.
“그런데 그 향을 없앨 수 있는 키푸르츠가 바로 이 정원 온실에 나타났으니…… 탐이 나긴 했겠지.”
“그, 그게……”
“디엘이 워낙에 여기저기 키푸르츠 향을 홀리고 다니니 몰랐을 리가 없고.”
“죄, 죄, 죄송해요.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정말, 그냥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에요.”
하녀가 사색이 되어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리체,어떻게……”
에르안이 눈을 깜빡이며 묻자 나는 디엘의 손을 들어 보였다. 나와 같은 일회용 통신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사실,다 함정이었거든요. 통신
용 마법 아이템을 가지고 디엘과 함께 계획했어요.”
여기까지가 내 역할이었다.
나는 공작 부인을 다시 돌아보 았다.
“에르안.”
공작 부인은 차갑게 말했다.
“호아킨 경을 불러와라. 직접 심문해야겠다.”
역시,내 예상대로 공작 부인은 일을 비밀리에 진행시키고 싶은 모양이었다.
언제부터 음독했는지 알 수 있 는 방법이 없었다.
냉정한 공작 부인은 에르안의 지병마저 알려져 있는 판에 괜히 영지에 불안감을 조성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게다가 공작성에서 일하는 하녀 라니……. 보안상의 심각한 문제 까지 걸려 있었다.
‘뭐 그거야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고.’
나는 조용히 멸리는 공작 부인의 손을 잡아 주었다.
공작 부인이 나를 가만히 바라 보더니 갑자기 와락 껴안았다.
“고맙다, 리체.”
귓가에 대고 그녀가 떨리는 목 소리로 속삭였다.
직접 심문하겠다며 냉정하게 말하던 어조와는 전혀 달랐다.
나는 작은 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
그날 밤,디엘이 고개를 절레절 레 저으며 찾아왔다.
“그 하녀, 고문을 시작하자마자 혀를 깨물었대.”
“그래?”
나는 연구실에서 책을 넘기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이렇게 쉽게 모든 일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작 부인에게 누 군가 공작가를 노리고 있다는 경 각심만 줘도 어느 정도 성공이었다.
‘에르안이 성년이 될 때까지 꾸준히 망가트려 온 작자들이야.’
실망하지 않으려 애쓰며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쉽게 끝날 리가 없지.’
오랜 시간 공작성에 근무한 하 녀가 이시더 남작의 이름을 댈 리가 없었다.
가족의 생계라든가 하는 절실한 무언가를 미리 잡아 두었을 것이다.
“4년 전에 들어왔고, 추천서를 써 준 사람은 이미 공작성을 떠난 사람이야. 부엌에서만 일하는 하녀였는데 고향도 거짓말 같대.”
“추천서를 써 준 사람이 누군데?”
“그 당시 페렐르만 자작님의 조수 ”
나는 책을 탁, 하고 덮었다.
페렐르만 자작의 조수는 열흘을 채 못 버티는 것으로 유명했다. 다르게 말하면, 외부인이 아무 의심 없이 드나들기 딱 좋은 환경이라는 것이었다.
‘그럼 내가 이 자리에 계속해서 버티고 있다면 내가 위험해지겠군.’
이제 내 안위도 걱정해야 했다.
바짝 긴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 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리체.”
디엘이 나를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뭔가 잡아낸 거지?”
“응.”
“사실 키푸르츠 향이니 히피스 꽃이니 잘 모르는 얘기였지만…… 네 계획대로 된 거 맞 지?”
“당연하지. 어차피 다 의학적인 지식이니까 일반인들은 모르는 게 당연해.”
“이시더 남작님이 그 자리에 계셨으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 셨으려나.”
“뭐?”
“아,이시더 남작님은 의사는 아니신데 그런 쪽에 지식이 좀 많으셔.”
처음 듣는 얘기였다.
역시, 약초에 대한 지식이 없지 않고서야 이렇게 치밀하게 계획 을 세울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본인이 당사자였다니.
“그래서 페렐르만 자작님의 따님도 직접 받아 주셨다고 해.”
“자작 부인께서 이시더 남작님의 영지에서 7개월 만에 조산하 시는 바람에 페렐르만 자작님은 따님의 얼굴도 몰라. 그냥 자작 부인을 쏙 빼닮은 금발에 녹안이 라는 것밖에는……”
“그렇구나.”
“그래서 대륙에 있는 금발의 녹 안인 열세 살 여자애들을 다 뒤 지고 계시잖아.”
그것까지야 별 관심이 없었지만,이제 모든 퍼즐이 맞춰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이시더 남작은 악랄하 고 계획적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 친누나와 친조카를 무너트리 고 이 영지를 홀라당 날려 버린 인간.
“어쨌든 리체,너 오늘 좀 멋있 었어.”
“말이라고.”
나는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나 정도로 똑똑하면 이 정도 일이야 별것도 아냐.”
“그, 그래.”
“하지만 네 덕분에 모든 일이 수월했어. 일 잘해 줘서 고마워.”
“뭘.”
디엘이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앞으로도 시킬 것 있으면…… 아니, 부탁할 것 있으면 언제든 말해.”
“페렐르만 자작님 떠나시고 나니 내가 왔다며 투덜거렸잖아.”
“그건 그런데……”
디엘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네 말을 들어주는 게 더 뭔가 뿌듯한 것 같아. 카타르시스가 있어.”
“그것 참 다행이구나.”
앞으로도 디엘은 내 말이라면 기꺼이 다 들어줄 것 같은 기색이었다.
“근데,나 말고도 좀 짜릿한 표정을 짓는 사람이 있긴 했어.”
내 멀뚱한 표정을 보며 디엘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잘 알아들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겠지만, 에르안 님도 완전 눈을 반짝이며 널 바라보고 있던걸.”
“아, 그래?
“역시 멋있다고 생각하셨나 봐.”
뭐, 그거야. 나는 대수롭지 않다 는 듯 어깨를 으쪽하며 말했다.
“알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