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21 화
식사를 꼬박꼬박 잘하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나는 영양소가 풍부한 각종 약초 가루를 탄 우유를 에르안에게 직접 타 주었다.
“에르안 님.”
나는 얌전히 받아 마시는 에르 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웨데릭 님이 그렇게 좋으세요?”
“응, 내 유일한 친구고 또래 혈 육이니까.”
“그럼 저랑 한번 만나게 해 주시면 안 돼요? 저도 같이 놀아요.”
대체 무슨 수작을 계속 걸고 있는지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런데 혼쾌히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던 에르안이 고개를 저었다.
“싫어.”
“네? 왜요?”
나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화들짝 놀라 물었다.
“웨데릭 형이 네가 예쁘장하대.”
“꼴에 보는 눈은 있으시군요. 근데 그게 왜요?”
“너도 나이 많은 사람 좋아하잖 아.”
“어린애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뿐인데……”
에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하튼 안 돼. 요새 디엘하고도 많이 친해진 것 같던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디엘과 친해졌나?’
서로 반말을 쓰기로는 했지만 딱히 엄청나게 친한 친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페렐르만 자작이 내게 남겨 준 수족이나 측근 같은 친구?
내가 보기엔 디엘은 선천적으로 복종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실 컷 부려먹어도 투덜거리며 속으 로 기뻐하는 타입이 분명했다.
“근데 웨데릭 형까지 만나고 싶 어 해?”
에르안은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리며 중얼거렸다.
“바람둥이.”
“……네?”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바람둥이가 옆에 있으면 고생 한다고 하던데.”
“그런 단어는 누가 가르친 거예요? 무슨 뜻인지는 알고 쓰시는 거예요?”
“지켈”
그 문제의 검술 선생이었다.
몰래 알아보니 검술 자체는 잘 가르치지만 인성에 있어서는 평판이 좋지는 않던데…….
나는 이마를 짚었다.
“내가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하니까 이런저런 얘기를 해 주셨 어.”
“이런저런 얘기라면요?”
“어른들의 얘기.”
지켈이 들려줬다는 어른들의 얘기를 묻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얼른 에르안올 눕히고 이불을 덮 어 주었다.
‘일단 자라. 지금 이게 급한 건 아니지.’
에르안은 익숙하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아 주며 에르안 의 검은색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에르안 님.”
내일도 웨데릭은 공작성에 머물 예정이었다. 아무리 여기서 호의호식해도 나는 평민이고 그들의 만남올 막을 재간이 없었다.
“웨데릭 님이 좋아요, 제가 좋아요?”
“응?
“아니다. 웨데릭 님의 말을 믿으세요,제 말을 믿으세요?”
“..............””
“에르안 님, 우리는 서로에게 유일하기로 했잖아요. 제가 에르 안 님을 가장 많이 생각하는 사 람이라고 했던 거 잊으셨어요?”
나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 며 말했다.
그러자 에르안이 시무룩하게 대 답했다.
“의사는 거짓말 안 한댔으니까, 리체를 더 믿어.”
“믿는 사람을 곁에 두어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웨데릭 님이 아 무리 나이가 많아도 남작가의 영식이세요.”
나는 에르안의 눈을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
“에르안 님은 이 성의 주인이고,그러니 에르안 님의 생각이 가장 중요해요. 다른 사람들 말 고요. 에르안 님이 옳다고 생각 하는 거,원하는 거,마음에 드는 거 앞에서 다른 사람 말 듣지 말아요.”
“……지켈이랑 비슷한 얘기를 하네.”
“당연하죠,소공자님.”
나는 그의 가슴을 도닥여 주었다. 잠시 후 그의 눈이 사르록 감겼다.
***
‘여긴 어디지?’
눈이 돌아갈 정도의 화려한 공 간이었다. 웅장한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고, 사람들이 짝지어 춤을 추고 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연회인가?’
시선을 내리니, 나 역시 한 번 도 입어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드레스 차림이었다.
‘나는 평민인데 대체 왜 이런 곳에서 이런 차림으로 서 있는 거지?’
그것보다 내 모습이…… 이건 열셋의 몸이 아닌데?
무언가 약속이 있는지 나는 발 코니로 향하고 있었다.
발코니의 문을 여니, 까만 머리 카락의 청년이 눈을 반달 모양으로 해 보이며 웃었다.
[늦었네,리체. 빌어먹을 황태자 랑 춤은 잘 췄어?]
분명히 웃고 있는데, 이를 갈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살짝 뒷걸 음질 쳤다.
짙은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는데 도 남자는 아름다웠다.
내가 뭐라고 대답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장면이 흐릿해져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일어나 문을 닫고 내 허리를 감쌌다.
[혹시 그 늑대 같은 인간이 네 허리에 손을 계속 얹고 있었던 건 아니지?]
내가 뒷걸음질 치자 그가 내 귀 에 대고 속삭였다.
[또 어디야,그 새끼와 살이 맞 닿은 곳이. ]
더운 숨결이 느껴져서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어릴 때부터 네가 바람둥이인 건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너무해 ]
워낙에 키 차이가 많이 나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내 갈색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쓰다듬자 어깨에 소름이 돋았다.
[바람둥이여도 괜찮아-]
굉장히 억울한 발언이었지만 허 리에 느껴지는 단단한 손길 때문에 나는 숨을 멈췄다.
[언제나 내 곁에만 있어 주면 돼.]
욕망이 어린 검은색 눈동자가 어지러운 시야에서 빙빙 돌았다.
[너도 내 생각대로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잖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청년을 제대로 보기 위해 나는 눈을 부 릅떴다.
어디서 꽤 본 것 같은,조각같 이 아름다운 외모와 이상하게 눈길이 가는 붉은 입술…….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할 때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여러 사람들이 당황해하는 소리 에 나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았다.
“리체! 리체!”
나는 벌떡 일어났다.
내 방이었다.
“리체! 깼어? 문 좀 열어 봐!”
나는 흐릿하면서도 뭔가 섬뜩한 꿈의 잔상에서 벗어나려고 고개 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건 디엘 의 목소리였다.
어느새 아침 햇살이 환하게 방 에 들어오고 있었다.
대충 잠옷 위에 가운을 걸쳐 입고 나는 문을 열었다.
디엘이 동그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네 말대로야.”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물론 뭔가 찜찜했던 꿈 역시 모두 잊었다.
“온실 열쇠가 사라졌어.”
걸렸다,요놈!
디엘이 공작 부인의 허가를 받아 꾸며 준 내 온실은 정원 근처 에 있었다.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여러 가 지 까다로운 환경의 약초를 키우기에는 충분했다.
구하기가 쉽지 않거나 바로 따 서 섭취해야 하는 약초 둥을 기르기 위해 의사들은 모두 작은 온실을 갖고 있었다.
페렐르만 자작은 본인이 약초를 전문으로 하는 상단을 꾸리고 있 었기에 예외였다. 그는 디엘에게 한마디만 하면 모든 약초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나 역시 그럴 수 있었지만,그때는 디엘에게 ‘뛰어난 사람에게 복종하는 취미’가 있는 줄 몰랐다.
어쨌든 온실의 열쇠를 갖고 있 는 사람은 나와 디엘, 둘이었다.
며칠 전 나는 디엘에게 미리 일 러두었다. 커다란 인형이 달린 온실 열쇠를 책상에 두고 다니며 방문을 잠그지 말라고.
그리고 드디어 열쇠를 도둑맞은 것이다.
즉 범인은 이제 온실에 나타날 예정이었다.
그동안 키푸르츠 농사를 밤낮없이 열심히 지었던지라, 디엘이 움직일 때마다 키푸르츠의 향기가 흑 끼쳤다.
“디엘.”
나는 온실에서 주렁주렁 열매를 맺은 키푸르츠 열매들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진로 다시 한번 생각해 봐. 귀농할 생각 없어? 이렇게 잘 키우다니.”
“적성에 맞지는 않았어.”
디엘이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그냥 네 말이라 최선을 다한 것뿐이야.”
페렐르만 자작이 왜 디엘을 가 장 가까운 수족으로 부리는지 알 것 같았다.
“넌 정말……”
나는 감격한 얼굴로 디엘을 올려다보았다.
“뭐든지 잘하고,무엇보다 엄청 난 노예근성을 가지고 있어.”
“노예라니. 친구의 부탁을 들어 준 것뿐이야.”
“디엘,똑똑하고 영리한 사람의 말을 듣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 야.”
“내 마지막 자존심이야.”
그의 분홍색 머리카락을 보면서 나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
디엘은 부담스럽다는 듯이 고개 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키푸르츠에 꼼꼼하게 물을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페렐르만 자작님이 보는 것 같으니까.”
나는 통통한 키푸르츠 열매 하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리고 온실 벽면 한쪽에 가득 쌓인 비료 포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네가 할 일은……”
“응,뭔데?”
냉큼 대답하는 디엘을 보며 나 는 속으로 노예근성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저기 숨어 있는 거야.”
“저기에?”
“분명히 열쇠를 홈친 범인이 다 시 올 건데……. 우리 둘이 잡아 봤자 의미는 없고. 마님이랑 같이 현장을 덮쳐야 해.”
“언제 오는데?”
“키푸르츠의 향기가 좀 줄어드는 초저녁이겠지.”
나는 디엘의 손에 1회용 통신 마법 반지를 끼워 주며 말했다.
“그러니 네가 잠복하고 있어.”
“저,저기에서?”
“응
“.........”
“그리고 누가 오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 초저녁 내내 이 근처에 있을 테니까.”
오늘은 저녁을 먹고,공작 부인 에게 산책을 제안할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