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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20화 (20/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20 화

“리체,맛있니?”

“네. 정말, 정말 맛있어요.”

나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공작 부인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렇게 순진무구한 어린애인 척을 하는 건 정말 적성에 맞지 않 았지만 당분간은 어쩔 수 없었다.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마님.”

“이게 무슨 부탁이라고.”

내 부탁은 단순했다.

늦여름 해산물이 너무 비려서 못 먹겠으니, 당분간만 모든 식단에서 해산물을 빼 달라는 것이었다.

해산물이 주방에 있는 것만 해도 향이 배어 못 먹겠다고 억지를 피웠다.

물론 내 부탁에 공작 부인은 주 방에 말해서 모든 해산물은 물론,바다 향 조미료까지 외부로 반출했다.

그리고 한 달 동안은 주방에서 해산물 사용을 아예 금했다.

공작 부인이 중독된 히피스꽃은 향이 비려서 해산물 요리에만 몰래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니 해산물을 주방에서 모두 치우라고 하면 범인은 굉장히 초조해질 것이다.

꼬박꼬박 독을 주입해야 하는데 그 시기가 지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이 상황에서 범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단 하나뿐이었다.

‘잡아내고 만다.’

나는 나도 모르게 포크를 꽉 쥐었다.

공작 부인에게까지 계획을 말하 지 않은 것은 공작 부인이 이시더 남작에게 상담이라도 할까 봐 서였다.

어쨌든 둘은 친남매였고 그러면 내 계획이 완전히 흐트러질 수도 있는 셈이었다.

‘될 수 있으면 이시더 남작까지 이참에...”

혹시나 둘이 나가서 식사를 할 까 봐 이시더 남작이 머무는 동안은 식사 약속도 다 내가 잡아 두었다.

그렇게 이틀 연속 저녁을 나와 에르안,공작 부인이 함께 먹게 된 것이었다.

“해산물 향이 비려 그동안 식사도 제대로 못했겠구나.”

“그러지는 않았는데, 많이 참긴 했어요.”

“이런,한창 클 나이에.”

공작 부인이 안타깝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옆에서 거의 먹지 않고 있는 에르안을 보며 한마디 했다.

“에르안,요즘도 입맛이 별로 없니?”

“예.”

에르안은 물을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먹으면 속도 좋지 않 고……”

‘그럴 리가.’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요새 에르안은 식사를 잘 했다.

많이 음직이고 잘 자니 식욕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이제야 살도 좀 오르고 튼튼해지나 했더니, 웨데릭이 오 자마자 다시 저 꼴이었다.

‘오늘 오후에 둘이 놀고 있는 것 같더라니……’

평소 같았으면 내가 먹여 주기 라도 했을 텐데,공작 부인과 함 께 있으니 그마저도 힘들었다.

‘정말 이 집안은 내가 없으면 안 되겠다.’

나는 혼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스테이크를 먹었다.

공작 부인의 독살도 막아야지, 에르안의 정상적인 성장도 도와야지…….

정말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학지만 귀족 생활은 참 좋다.

‘그것도 돈 많은 귀족.’

엄밀히 말하면 난 여전히 평민 이었지만, 귀족 영애들이 입는 고급 옷을 입고 하녀도 있었으며 널찍한 방에 개인 연구실까지 갖 고 있었다.

작은 의원에서 조수를 하며 살던 예전 삶과는 비교도 되지 않 는 환경이었다.

‘그러니 좀 도와주자.’

해산물이 온통 사라져 난감해하 고 있을 범인을 생각하며 나는 에르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공작 부인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작게 속삭였다.

“왜 이렇게 안 드세요?”

“별로 입맛이……”

아무래도 웨데릭과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자세한 대화는 이따가 잠들 때 해요.”

나는 에르안을 향해 빠르계 속삭였다.

아무래도 오늘 밤 재워 줄 때 한 번 더 단단히 정신 무장을 시켜야 할 것 같았다.

디엘은 온실에서 때 아닌 키푸르츠 농사를 짓고 있었다.

키푸르츠는 구하기 힘들었지만 키우기가 어려운 과일은 아니었다.

씨를 뿌리고 마법 비료를 열 심히 뿌리면 3일만에도 열매를 맺었다.

“나 같은 고급 인재를……”

열심히 물을 주던 디엘은 피식 웃으며 허리를 폈다.

이 말도 안 되는 농사를 시킨 사람은 그의 어깨에도 키가 오지 않는 작은 여자애였다.

“하여간 페렐르만 자작님하고 똑같다니까. 친구가 아니라 상전이야,상전.”

혼자 투덜거리면서도 디엘의 얼 굴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천성이 온화한 그는 지금까지 딱 한 명에게만 뒤에서 구시렁거 렸는데,리체를 알고 나서는 그 상대가 두 명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구시렁거리는 만큼 그는 페렐르만 자작과 리체를 꽤 좋아했다.

맨 처음,페렐르만 자작이 열세 살짜리 여자애와 친구로 지내라고 했을 때 그는 하다 하다 정말 이상한 걸 시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단에 소속되어 있는 입장으로서 어쩔 수 없이 말을 들어야 했다.

무슨 놀이라도 해 주어야 하나, 싶었는데 리체는 깜짝 놀랄 만큼 페렐르만 자작과 똑같았다.

냉담한 표정에 뻔뻔할 정도의 엄청난 자신감, 약간 무심한 성 격까지.

연구실을 빨리 만들라고 닦달할 때의 리체는 정말로 페렐르만 자 작의 분신 같았다.

물론 그 말을 리체에게 했다가 살벌한 눈 흘김을 받아야 했다.

이상하게 같이 대화를 하고 있으면 열세 살짜리 같지가 않아서 그는 자연스럽게 말했다.

“맨 처음 페렐르만 자작님은 리체 님과 친구가 되어 주라고 하 셨습니다.”

“필요 없어요. 그냥 한 소리인 데 오지람은……”

리체는 어깨를 으쏙했다.

“사실상 친구보다는 제 연구실 이나 온실 등을 관리해 주라고 붙여 주신 거 아닌가요?”

“……그건 그렇죠.”

“그럼 제 아랫사람?”

디엘은 그 말에 대꾸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슬폈다.

실제로 페렐르만 자작이 그를 공작성에 남겨 둔 것은 자신이 없을 동안 여러모로 리체를 지원 해 주라는 뜻이었다.

“우리 같은 평민이니까, 그렇게 까지 슬픈 표현은 쓰지 맙시다.”

“그래요,그럼 친구 해요.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 정도로 알고 있을게요.”

“좀 더 편하게 지내도 돼요. 서 로 말 놓을까요?”

리체의 새침한 말에 디엘은 부드럽게 제안했다.

서로 평민인데 리체 님이니 디 엘 님이니 경어를 붙이는 것이 어색했기 때문이다.

리체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디엘이 나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위인데, 어떻게 그 렇게 쉽게…… 놓을 수 있지, 난.”

“……으,응?”

어쨌든 묘하게 당당한 여자애였다.

실제로 페렐르만 자작이 인정한 천재이기도 하고, 그녀도 그 사 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딱히 디엘을 필요로 하 지는 않았지만, 얼마 전에 황당한 부탁을 하나 했다.

“온실에 키푸르츠를 심어 줘.”

“응?”

밑도 끝도 없는 일방적인 명령 에 디엘은 상당히 당황했다.

“키푸르츠 씨앗은 구하기가 힘 든데……”

“페렐르만 상단은 할 수 있잖아.”

“그것도 뭐,그렇지.”

“키푸르츠는 향기가 꽤 세니까, 네가 돌아다니기만 해도 향기가 배어 남들이 다 물어볼 거야.”

“그렇겠지?”

“그럼 내가 연구에 필요하다고 했다면서 키푸르츠를 키운다고 여기저기 소문내 주면 고맙겠어.”

“이유를 물어도 돼?”

“안 돼.”

디엘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 덕였다.

뭐,상전의 조수가 시킨다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디엘도 알게 될 거야, 곧 ”

그러나 리체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지켜본 그녀는 페렐르 만 자작이 인정할 정도로 야무졌기 때문이다.

그가 리체의 온실 부지와 연구 실을 허락받기 위해 공작 부인에게 갔을 때,너무나 혼쾌히 허락 이 떨어져서 솔직히 굉장히 놀랐다.

세르이어스 성에서 한낱 주치의 의 조수에게 주치의보다도 더 큰 장소를 제공한다고?

그러나 리체가 오고 나서 확실히 성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 누구에게도 관심 없던 페렐르만 자작이 그녀에게 딸의 방을 준 것부터 시작이었다.

일단 공작 부인의 안색이 환해 지고 불면도 덜하다는 시녀들의 증언이 있었다.

가장 많이 바뀐 것은 에르안이었다.

리체가 붙잡고 운동도 시키고 밥도 먹여서 그런지, 방에서 틀어박혀 있던 신경질적인 소공자 는 어느새 얼굴에 혈색이 도는 소년이 되어 있었다.

물론 에르안은 디엘을 별로 마 음에 들어 하는 것 같지 않았지 만….....

‘에르안 님만 마주치면 이상하게 뒤통수가 따갑단 말이지.’

디엘은 키푸르츠에 물을 주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쨌든 나한테 이런 일을 시킨, 아니 부탁한 걸 보면…… 뭔 가 일이 벌어지긴 벌어지겠지.”

이상하게 기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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