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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9화 (19/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9화

나는 연구실을 최대한 빨리 만들어야 한다며 디엘을 들들 볶았다.

“페렐르만 자작님을 보내고 난 뒤에 더한 분을 만나다니.”

디엘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 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빠르게 연구실을 완성해 주었다.

온갖 장비가 다 갖춰진 연구실 에서 나는 무엇보다도 공작 부인의 피를 분석하는 것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각혈이 라……”

여러 가지 증상을 다 복합적으로 봤을때 딱히 떠오르는 자연 스러운 질병이 없었다.

페렐르만 자작마저도 계속 몰라 볼 만큼 특이한 조합이었다.

“뭔가 이상하긴 해.”

온갖 시약으로 검사를 해 본 결과, 나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독이네.”

나는 시리카 풀에 반응하는 공 작 부인의 피를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자연스러운 질병이 아니었다.

인위적으로 누군가 공작 부인에 게 독을 쓰고 있었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언제부터 독을 쓰고 있었던 건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히피스꽃을 쓴,아주 천천히 진행되는 독이야.”

나는 듣는 사람도 없는데 초조 하게 중얼거렸다.

히피스꽃을 쓰는 독의 특징은 평범한 두통과 복통을 일으킨다 는 것이었다.

그래서 절대 의심을 받지 않지만,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섭취해야 했다.

그것도 적어도 두 달에 한 번씩 은 미량이라도…….

“잠시.”

나는 검사 결과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독의 농도가 상당히 낮아져 있었다.

그 말인즉슨, 공작 부인에게 독을 투여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독에 중독되었다고 해 도 별수 없는 건 공작 부인도 마 찬가지겠지.’

정확히 독을 넣은 사람은 알 수 없었지만, 배후는 분명했다.

아마 이 세상에서 지금은 나만 알고 있을 것이다.

공작 부인이 죽으면서 가장 이익을 얻은 것은 이시더 남작과 웨데릭이었다.

‘하지만 이시더 남작은 공작 부인의 친동생이고.’

이시더 남작을 의심하는 발언을 했다가는 내가 쫓겨날지도 모르는 판이었다.

그러고 보니 곧 이시더 남작과 웨데릭이 공작성에 방문한다는 말을 들었다.

‘역시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를 찾아야겠다.’

나는 피곤한 눈을 비비며 다짐 했다.

‘어차피 히피스꽃이야 해독하면 그만이지.’

공작 부인의 몸을 해독해 주면 서 덫을 놓고 기다려야 했다.

2. 실마리를 찾아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정기적으 로 공작성을 찾는 손님이 있었다.

이시더 남작과 그의 아들 웨데릭이었다.

“누님, 잘 지내셨습니까?”

로만 자크 이시더 남작이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는 공작 부인과 똑같은 은발에 검은 눈을 가지고 있었으나,인상은 달랐다.

“뭐, 그냥 그렇지.”

공작 부인은 무심히 대답했다.

그녀는 원래 냉랭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남동생인 로만에게도 딱 히 사근사근하지 않았다. 그냥 어디 가서 사고만 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세르이어스 공작이 살아 있을 때에도 자주 찾아오는 것이 번거로웠다.

늘 누님을 보러 온다는 핑계를 대면서 조심스럽게 재물을 요청하곤 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뭘 하길래 계속 돈이 부족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세르이어스 영지는 풍족했기 때 문에 공작 부인은 보석 몇 개를 던져 주곤 했다.

어린 시절부터 로만과 함께 큰 공작 부인은 그의 특징을 잘 알고 있었다.

소심하고 추진력 없는 성격에, 의학 계열의 알량한 지식 빼고는 여러 모로 무능력했다.

하지만 어쨌든 로만은 친정 집안의 유일한 후계자였고 아무리 정이 안 가더라도 모르는 체할 수는 없었다.

“웨데릭은 에르안과 놀고 있습니다.”

로만은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한 동생이었다.

냉정한 공작 부인에 게도 늘 사근사근했고,어릴 때 부터 몸이 약했던 그녀를 일방적 으로 졸졸 따라다니며 돌봐 주었다.

세르이어스 공작이 죽고 나서, 로만은 그녀가 외로울 수도 있다는 명목 아래 더 자주 찾아왔다.

그는 가신들과 갈등이 생길 때에는 나서서 그녀의 편을 들어 주곤 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로만과 웨데릭에게 무심했으나 여러 가지 상황을 겪으며 로만에게 심리적 빚 이 있는 상태였다.

또한 웨데릭이 에르안을 잘 보 살폈기 때문에 그 방문을 막지는 않았다.

그녀 역시 갑자기 쏟아지는 책임감과 막중한 업무에 계속 지쳐서 에르안을 돌보기가 어 려웠던 것이다.

지속되는 질병은 사람을 끊임없 이 약하게 만들었다.

“아직도 많이 아프세요?”

“이젠 익숙하다.”

로만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한숨 을 쉬었다.

“……페렐르만 자작에게는 증상을 다 말하지 않았지요?”

“그래.”

“잘하셨습니다.”

로만은 천천히 차를 마셨다.

“에르안만은 지켜 내셔야죠.”

맨 처음 상태가 안 좋다는 것을 로만에게 들켰을 때,그는 심각한 증상이라면 페렐르만 자작에 게는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그것은 로만이 그녀에게 한 조언 중에 난생처음으로 마음에 든 소리였다.

그녀 역시 에르안이 가장 소중했고,페렐르만 자작은 대륙에서 가장 홀륭한 의사였다.

세르이어스 공작에 대한 죄책감으로 간신히 붙들고 있지만 자신마저 성가시게 하면 떠나 버릴지 도 몰랐다.

“그래도 안색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고맙구나.”

“그런데 그 차는 뭡니까? 색이 아주 고운데요.”

로만이 자신과 다른 수색의 차 를 보며 궁금한 둣 물었다.

“선물로 들어왔는데,남자에게는 별로 좋지 않다고 하더구나.”

“누가요?”

“새로 온 페렐르만 자작의 조수가.”

“아……”

로만은 미간을 찌푸리며 코 밑 을 긁었다.

“한 달 동안 안 바뀌고 있다는 그 조수 말이죠?”

“그래. 꽤 영리해서 페렐르만 자작의 마음에 든 모양이던데.”

공작 부인은 대수롭지 않게 생 각하며 차를 마셨다.

사실 이 차는 리체가 처방해 준 약초를 끓여 낸 것이었다.

그런데 리체는 이 차를 하루에도 수시로 마시라는 조언을 하며 한 가지 더 덧붙였다.

남자에게 좋지 않다는 말을 하면서 절대 남은 주지 말라는 것 이었다.

리체의 말에 따르면 남자들은 ‘남자들에게 좋지 않다.’라는 말을 하면 그 즉시 관심을 끊는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이 약초라는 말도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괜히 약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가 각혈한다는 것을 누군가가 역으로 추론해 낼 수 있다고 했다.

어쨌든 참 영리한 아이였다.

약을 차로 속여서 누구에게도 각혈을 들키지 않게 해 주다니.

에르안은 이제 열셋,너무 어렸다.

공작 부인이 심하게 아프다는 것이 알려지면 공작령 전체가 동요할 것이다.

사실은 리체가 공작 부인에게 해독제를 먹이고 있다는 걸 몰래 숨기는 의도였지만 공작 부인은 그 사정을 전혀 몰랐다.

“페렐르만 자작의 마음에 들었다고요? 허허,이거 한번 만나 봐야겠군요.”

로만이 콧수염을 쓸며 재미있다 는 둣이 말했다.

“저녁 식사 때 초대하는 게 어 떻겠습니까?”

“아.”

공작 부인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오늘 저녁은 웨데릭과 먹는 것이 좋겠다,로만. 방으로 식사를 보내 주마.”

“예?”

“선약이 있단다.”

“그럼 내일……”

“내일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점심은 늘 혼자 먹으니,점심 역시 알아서 먹거라.”

“아니,고작 3일 있다 가는데 누님은 그럼 저랑 저녁 한 번 못 먹어 주신단 말입니까?”

“대체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니.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다 하렴. 굳이 식당에서 할 필요가 있을까?”

로만은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공작 부인의 싸늘한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 상 말하지 못했다.

***

“검술 수업을 받는다고?”

웨데릭은 에르안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둣이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의 사촌은 얼토당토 않은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 말라고 했잖아,내가. 너는 형의 말을 뭘로 듣는 거니?”

웨데릭은 신경질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사촌은 그의 말을 조금 더 새겨들을 필요가 있었다.

“지켈은 나보고 잘한댔어.”

하지만 에르안은 평소와 다르게 미안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우유를 마시며 어깨를 으 쓱했다.

“실제로 요새 옛날보다 몸이 많이 좋아져서 괜찮아.”

“……그만 마셔. 살이 찐다고.”

“많이 움직여서 많이 먹어도 괜찮댔어.”

“누가?”

“리체.”

“그…… 페렐르만 자작님의 새로운 조수?”

웨데릭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물 었다.

그 리체라는 새로운 조수 는 어딘지 모르게 기분 나빴다.

맨 처음 귀족 영애인 줄 알고 깜빡 속아 넘어갔을 때부터 느낌 이 좋지 않았다.

이시더 남작이 찾는다는 거짓말 에 재빨리 성 안으로 들어갔는 데,막상 로만을 만나니 그런 말 은 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조수 한번 만나 보자.”

“안 돼.”

“뭐?”

웨데릭은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 이었다.

어찜 이렇게 애가 확 바 뀔 수 있는지 어안이 벙벙했다.

에르안이 자신에게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한다는 것이 믿기 어려웠다.

“왜?”

“형은 열일곱이잖아.”

에르안은 나이가 많은 사람을 선호한다는 리체의 말을 잊지 않 고 있었다.

“그게 뭐?”

“어쨌든 안 돼.”

어이가 없다는 웨데릭의 반문에 에르안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웨데릭은 당황하여 그의 양어깨 를 잡았다.

“에르안, 형 말을 잘 들어야지. 형이 보고싶다고 하면 보여줘야 착한 동생인 거야.”

“..............”

“나는 네가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했던 단 하나의 친구이자 사촌이라고. 그런데 그깟 예쁘장한 여자애 하나 못 보여 줘?”

‘예쁘장한’이라는 말에 에르안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에르안의 눈에 경계심이 잔뜩 어리는 것을 보고 웨데릭은 순간 상대가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뒷 걸음질을 칠 뻔했다.

“내 주치의야.”

“페렐르만 자작님의 조수지만, 페렐르만 자작님은 세르이어스와 계약한 사람이고, 그러니까 순차 적으로 보면 리체는 내 사람이라는 뜻이야.”

“너,너……”

“형한테 보여 주지 않을 권리가 있어.”

“나도 너랑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어. 그런데 무슨 권리?”

“하지만 형은 세르이어스가 아니잖아.”

웨데릭은 황당해서 혀를 차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눈치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그 여자애를 보여 주지 않겠다고, 무려 7년 만에 자신에게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너, 리체인가 니체인가 하는 그 여자애한테 잘 보이고 싶은가 본데……”

“..............”

“그러려면 살 좀 빼야 돼. 확실 히 너, 한 달 전에 볼 때보다 몸 이 불었다.”

“..............”

“당분간 밥 먹지 말고…… 이거 먹어.”

웨데릭은 늘 챙겨 오는 과자를 에르안에게 건넸다.

“하지만 리체는 잘 먹어야 한다고……”

“네 말대로 리체는 네 아랫사람이니 그런 소리를 할 수밖에 없 지.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말해 줄 수 있는 건 나뿐이야.”

“..............”

“괜히 없어 보이니까,리체에게 는 말하지 말고.”

“........알았어.”

과자를 받아 드는 에르안을 보며 웨데릭은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 달 전보다 확실히 몸이 튼튼해졌고 눈동자도 맑아 보였다.

“너, 내가 지난달에 준 과자 안 먹었지?”

“……요샌 이것저것 많이 먹어서 배고플 일이 없었어.”

“어쩐지 좀 못 생겨 보이더라. 식사 몇 번 건너뛰고, 형이 준 거 먹어.”

웨데릭은 에르안의 검은색 머리 를 쓰다듬으며 씩 웃었다.

“그럼 멋있어질 거야. 형 말이 지금까지 다 맞았잖아. 이건 남자들만의 비밀이야.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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