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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8화 (18/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8화

“가, 각혈

나는 순간적으로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러면 처음부터 처방을 모두 다시 해야 했다.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지만, 결국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건 나였다.

나는 차분하게 약초를 새로 배 합하여 일단 공작 부인에게 건네 고,그 앞에 앉았다.

“각혈…… 숨기신 거죠?”

공작 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만약 오늘 공작 부인이 하염없이 기다리지 않았거나,내가 노크라도 했다면 난 아마 계속 몰 랐을 것이다.

그냥 손수건을 숨기고 태연하게 머리가 아프다 하면 되는 얘기니까.

“왜 숨기신 거예요?”

6년 후,공작 부인의 죽음이 이 것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증상을 숨기면 의사는 제대로 된 처방을 할 수가 없어요.”

공작 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안타까운 눈으로 피로 얼 룩진 손수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마 공작성의 누구도 이 사 태를 모르고 있을 것이다.

“페렐르만 자작이 7년 전 그만 두겠다고 한 적이 있단다.”

“..............”

“내 남편,세르이어스 공작이 각혈을 시작했을 때지. 각혈을 하면 심각한 사안이기 때문에 주치의가 계속 붙어 있어야 한다고 했어.”

“그건 맞아요.”

“하지만 자신은…… 딸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계속 붙어 있기 어렵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주치 의를 바꿨고, 결과는……”

그래서 세르이어스 공작은 죽었고, 페렐르만 자작은 다시 돌아왔다.

“이제 와서 나도 각혈을 한다고 하면, 페렐르만 자작이 같은 이유로 떠나 버릴 거야.”

공작 부인은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나보다는 에르안이 훨씬 더 중 요하단다. 그 애는 이곳의 유일 한 후계자야.”

이게 공작 부인이 각혈을 숨긴 이유였다. 혹시나 주치의가 바뀌 어서 에르안마저 잃을까 봐.

“나는 일찍 죽어도 상관없단다. 에르안이 성년이 되어 무사히 공 작 위만 물려줄 수 있다면.”

하지만 그동안 우리는 엉뚱한 처방을 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페렐르만 자작이 주치의로 머

무는 동안은 에르안이 무사히 살 수 있겠지. 벌써 몇 번이나 죽음 의 문턱에서 건져 주셨으니까.”

“어쨌든……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에 요.”

“……페렐르만 자작에게 얘기할 거니?”

“아뇨.”

그가 얼마나 비장한 눈빛으로 딸을 찾아 먼 길을 떠났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그리고 공작 부인의 말올 알 것 같아서 나는 단번에 말했다.

“일단은 그냥 제가 처방해 드릴 게요.”

“……고맙다.”

“저도 꽤 훌륭한 의사라서요. 어느 면에서는 자작님보다 낫고 요.”

“그건…… 그렇지.”

공작 부인은 상황에 맞지 않게 살짝 웃어 보였다.

“믿음직스럽구나.”

“조금 더 처방이 복잡해질 거예 요. 지금까지와는 완전 다를 예정이고요.”

“..............”

“각혈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어요. 분석이 완료될 동안은 정확한 처방이 어려워요.”

나는 공작 부인의 손수건을 챙겼다.

“이건 제가 가져갈게요. 분석을 위해서요.”

피의 성분을 분석해서 그 원인 을 알아낼 예정이었다.

내가 원인을 잘 찾아내면 공작 부인이 죽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마 페렐르만 자작은 공작 부 인의 각혈은 꿈에도 모르고 앞으로 6년 동안 똑같은 처방만 했을 테니까.

“리체, 남의 피인데 괜찮니?”

“피 보는 게 제 일인데요. 게다 가 이제 연구실도 생겨서……”

그 말에 공작 부인의 표정이 어두워 졌다.

“그래…… 연구실.”

“약초를 위한 온실 부지를 허락 해 주셨다고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네가 쓴다는데 어떻게 허락을 안 하니.”

공작 부인은 부드럽게 말했다.

“페렐르만 자작 때문에 허락한 건 아니었단다. 너를 위해서였어.”

하지만 목소리에 다소 다급함이 묻어났다.

“가, 감사합니다.”

“……페렐르만 자작이 엄청 멋지게 만들어 주겠다고 했겠지?”

“네, 오늘도 온갖 기구를 다 사 주셨어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는데 공작 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흥.”

그녀가 아랫입술을 잠시 깨물더 니 중얼거렸다.

“보나마나 돈으로 발랐겠지. 페 렐르만 상단에 있는 건 돈밖에

없으니까.”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건 드레 스를 잔뜩 주문한 공작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환자를 위한 인내 심으로 사실을 지적하고 싶은 마 음을 꾹 눌렀다.

“여튼…… 앞으로 제게는 절대 로 증상을 숨기시면 안 돼요.”

나는 공작 부인의 손을 꼭 잡으 며 말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말이에요. 저는 페렐르만 자작님이랑 달라서,딱히 꼭 떠나야 할 곳도 없어요.”

“……정말이니?”

“네, 아직 어린 제가 달리 어딜 가겠어요? 전 가족도 없는데요.”

실제로 에르안과 내가 성년이 되는 6년 후까지 나는 이곳을 떠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에르안이 무사히 건강해지고, 공작 부인도 될 수 있으면 살려 드리고.

공작 부인이 살짝 기침을 하다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그래, 알겠다.”

나는 문득,그녀의 검은색 눈이 정말로 에르안과 비슷하다고 생 각했다.

***

“네, 이제 제가 왼쪽으로 갈 겁니다.”

에르안이 지겔에게서 검술 수업을 받은 지도 벌써 열흘이 흘렀다.

지켈은 과연 소공자라고 해서 에르안을 봐주지 않았다.

그리고 에르안 역시 징징대지 않고 새벽 훈련을 열심히 했다.

지켈도 그렇고,호아킨도 그렇 고 그가 꽤 많은 재능을 갖고 있 다고 해 주었다.

7년 동안 웨데릭에게 세뇌당한 것이 있어서 그는 딱히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래도 멈추지는 않았다.

마음이 약해질 때면 디엘과 함께 있는 리체를 떠올렸다.

요즈음 두 사람은 리체의 연구 실 때문에 꽤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았다.

인테리어에서부터 각종 기구들 의 배치 등 의논할 사안이 많다 고 했다.

에르안은 디엘과 리체가 함께 있는 모습만 보면 속에서 이상한 분노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디엘을 멀리 보 내 버리고 싶었지만, 리체에게 꼭 필요한 사람인 것 같았다.

디엘에게 뭐라고 하기엔 아직 에르안의 자존감이 높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얼른 어른이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지켈에게 훈련 을 열심히 받았다.

“앗!”

지켈은 분명 그에게 왼쪽으로 간다고 해 놓고,오른쪽 옆구리 를 툭 쳤다.

에르안이 항의하는 눈길로 바라 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인생은 실전이에요, 에르안 님.”

“분명 왼쪽으로.....”

“남의 말을 다 믿을 겁니까? 거 짓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데요.”

억울하다는 에르안의 얼굴을 보며 지켈이 단호하게 말했다.

“무조건 경계해야 합니다. 남들 의 말을 다 믿어서는 안 돼요.”

“하지만 리체는 거짓말도 안 하 고 자기 말도 꼭 믿으라고……”

“그건 의사의 덕목이죠.”

지겔은 능글맞게 대답했다.

“의사는 당연히 거짓말도 하면 안 되고 환자에게 신뢰를 얻어야 하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얘기가 좀 달라요,에르안 님.”

“..............”

“에르안 님도, 저도 의사는 아 니잖아요?”

에르안은 분했지만 딱히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다들 에르안 님께 거짓을 말할 지 몰라요. 염두에 두고 계세요.”

“리체는 아냐.”

“리체 님이야 의사니까 그렇겠죠. 그 외의 사람들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지켈이 허리를 굽히며 그와 눈 을 마주친 채 낮은 목소리로 일렀다.

“에르안 님도 목적을 위해서는 누군가를 속일 수 있으셔야 합니다.”

“……난 의사가 아니니까?”

“그럼요. 마음도 숨길 줄 알아 야 하고, 다소 강압적이어야 할 때가 있을 수도 있고,말을 좀 바꿔야 할 때도 있죠. 왜냐하면 에르안 님은 이 영지를 다스려야 하니까요.”

에르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켈은 씩 웃으며 그에게 떨어진 검을 건넸다.

“성년이 되시면 바라는 것들이 훨씬 더 많아지실 겁니다.”

‘바라는 것’이라는 말에 에르안 은 문득 리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지금 리체와 함께하는 시간들이 몹시 행복했다.

“그럴 때마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하는 법입니다, 아셨죠?”

“알았어.”

에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에르안 님께 이 사실을 가르쳐 드리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처럼요.”

“거짓말은…… 딱히 하고 싶지 않지만……”

에르안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는 건 잊지 않을게. 굳이 정직하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예. 꼭 검술이 아니더라도, 에르안 님은 이제부터 매사에 계략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검을 고쳐 쥐는 에르안의 눈빛이 마음에 든다는 둣 지켈이 씩 웃었다.

“알았어. 잊지 않을게.”

“그럼,다시 한번……”

“아.”

에르안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둣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내일부터 일주일간은 훈련에 좀 늦을 수도 있어.”

“네? 왜요?”

“로만 외숙부님과 웨데릭 형이 오거든.”

며칠 전 웨데릭에게서 서신이 왔다.

예전 같았으면 가끔가다 오는 웨데릭을 손꼽아 기다렸을 텐데, 이제는 사실 웨데릭이 올 때가 되었다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지금만 같다면 굳이 웨데릭이 오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에는 훈련하느라 바빴고, 오후에는 며칠 전부터 부르기 시 작한 가정교사와 공부를 하거나 리체와 책을 읽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리체와 저녁을 함께 먹고 일찌감치 잠이 들었다.

웨데릭과 함께 있는 것보다 훨 씬 마음도 편하고 몸도 더 좋아 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웨데릭은 그가 외롭게 방치되었을 때 유일하게 함께 있어 준 사촌 형이었다.

자신이 좀 요새 바쁘다고 해서 귀찮다고 여기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지난번 웨데릭이 머물 때 리체가 왔으니 리체와도 한 달을 함께 지낸 셈이었다.

“아, 벌써 그렇게 됐나요?”

지켈이 뒤통수를 긁었다.

이시더 남작이나 웨데릭은 하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손님들이니 익숙했다.

“하긴, 그러고 보니 꽤 오래 못 뵌 것 같군요……. 아,이런!”

어느새 지켈의 목 위에 에르안 의 검이 올라와 있었다.

에르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나, 빨리 배우지?”

지켈은 순간 치솟아 오르는 불안을 억지로 눌렀다.

“하, 하.”

작은 아이가 속임수를 이렇게 잘 배울 줄은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천연덕스러운 연기 력이라니.

‘괘,괜찮겠지?’

순진해 보이는 에르안의 검은 눈을 바라보며 지캘은 어설프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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