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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7화 (17/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7 화

마차가 도착한 곳은 완전한 천국이었다.

거대한 상점에선 온갖 실험 기구들을 다 팔고 있었다.

“그러니까 비커는 어떤 조합이……”

디엘은 실험 기구 사이를 바쁘 게 오가는 나와 페렐르만 자작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꼼꼼하게 기록했다.

“당연히 크기별로.”

“크기별로 다 있어야죠.”

페렐르만 자작과 나는 즉시 대답했다.

“그럼 주사기는 어떤 것으 로……”

디엘이 한마디 할 때마다 페렐 르만 자작과 나는 동시에 말했다.

“주사기는 무조건 베리아 영지 에서 나온 것으로.”

“베리아 영지의 주사기가 제일 위생적이에요.”

모든 물품에 대하여 의견이 같 아서 민망할 정도였다.

디엘은 꼼꼼하게 기록하며 물건의 상태를 확인하다가 페렐르만 자작 몰래 내게 속삭였다.

“의사들은 다 보는 눈이 똑같은 가요?”

“아뇨. 그럼 뭐,상점에서 다 똑 같은 물건만 갖다 놓게요?”

“그런데 왜 다 같은 걸 고르시 는 거예요?”

“취향이 비슷한가 보죠.”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디엘이 저 멀리서 수술 도구를 살펴보고 있는 페렐르만 자작을 흘끗 보며 말을 이었다.

“갈색 머리 두 분이 동시에 똑 같은 말을 계속하시니까, 가족 쇼핑에 낀 것 같아요.”

“디엘.”

나는 한숨을 쉬었다.

“대륙에서 가장 흔한 머리 색이 갈색이에요.”

“그렇죠.”

디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워낙에 판박이 같으셔서.”

“..............”

“이런 말에 절대로 그냥 안 넘어가는 것도 완전 똑같으셔요.”

“칭찬 아닌 건 알고 있어요. 얼른 가요. 자작님이 아주 못마땅 한 표정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세요.”

나는 디엘의 손목을 잡아끌고 재빠르게 수술 도구를 들고 있는 페렐르만 자작에게 다가갔다.

어쨌든 돈 쓰는 건 이 사람이었다.

상점 주인의 입이 귀에 걸릴 만 큼 비싸고 희귀한 재료와 기구를 잔뜩 주문하고 있자니 역시 페렐르만 상단이 쌓은 부는 대단하다 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영지를 가진 자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가격 안 보는 쇼핑이 가능하다니…….

‘그러니까 매년 딸의 방을 리모 델링하고 나이에 맞는 옷과 장신 구들을 채워 놓고 있겠지.’

하긴, 아내와 딸만 잃지 않았어도 지금쯤 연구진에서 활약하여 백작 위는 가지고 있을 것이다.

황자가 직접 이끄는 황실 의료 연구진은 대단한 것을 발견해 내 지는 못했지만 들어가기조차 어 려운 최고 연구 기관이었다.

나 역시 평민 출신만 아니었더 라도 지원서를 썼을 것이다.

‘페렐르만 자작이 뛰쳐나오지 않고 계속 있었다면 엄청난 성과를 발표했을지도 모르지.’

적어도 저렇게 미친 눈으로 온 대륙을 헤매고 다니지는 않았을텐데,참 불쌍한 사람이었다.

천재가 천재를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페렐르만 자작과 나는 서로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서로가 꽤 영리하다는 것을 무언으로 인 정하고 있었다.

디엘이 노트 한 권을 다 쓸 정도로,나는 사양하지 않고 갖고 싶은 것을 모두 구매했다.

배송은 공작가로 해 준다고 했고,어차피 디엘이 알아서 다 처 리할 예정이었다.

다시 마차에 올라탄 우리는 정말로 이제 페렐르만 자작을 배웅 하러 항구로 떠났다.

“감사합니다.”

나는 마차에 올라타서 페렐르만 자작을 향해 말했다.

“이것저것 잘 연구할게요. 친자 검사 방법도요.”

이럴 때 좀 웃으면 어디 덧나나 싶었는데, 페렐르만 자작은 침묵만 지켰다.

“물론 그 방법이 필요 없어지도록, 꼭 이번에는 따님을 찾길 바랄게요.”

“그래.”

페렐르만 자작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고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 던 페렐르만 자작은 헛기침을 한 뒤 도저히 못 참겠다는 둣 말문을 열었다.

“리 체.”

“네?”

“그러니까…… ”

“네.”

“..............”

“말씀하세요.”

“……드레스보다는 낫지?”

나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한동안 멍하니 고개를 갸웃해야 했다.

‘드레스? 무슨 드레스?’

디엘이 재빨리 속삭였다.

“마님이 선물해 주신 드레스들이요.”

나는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리고 말았다.

“3단 트레이 딸기 케이크 같은 것보다 훨씬 낫잖아.”

“……뭐.”

“역시 의사의 마음은 의사가 제 일 잘 알지.”

제대로 대답도 안 했는데,페렐

르만 자작은 흡족한 얼굴로 팔짱 을 끼며 의자에 몸올 기댔다.

“여러 모로 내 선물이 나아. 그렇지?”

디엘은 한숨을 쉬며 조용히 말했다.

“그냥 그렇다고 하세요. 제발요.”

“그, 그래요.”

여러모로 참 이상한 배웅이었다.

***

시간이 애매하여 저녁까지 먹고 들어오니,에르안이 근육통이 있다는 말을 전해 와서 나는 한밤 중에 그의 방에 가야 했다.

“검술 훈련이요?”

일시적 통증 완화에 효과가 있 는 약초를 다리에 붙여 주며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어전지, 단순한 달리기 정도로는 아프지 않도록 약을 조심스럽게 잘 처방해 주고 있었는데.

“아직까지는 그냥 달리기면 된다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네가 언제까지나 달리기만 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나는 비쩍 마른 에르안의 다리 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물론 필요하지만,아무래도 아직은 좀 아기 같으셔서……”

“아기라니.”

에르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지켈이 엄청 잘한다고 했어.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왜 못 믿어요?”

“웨데릭 형은 내가 몸이 금뜨다고 했거든. 다른 사람들이야 내가 소공자니 제대로 말올 못하겠 지.”

“아니에요. 첫날 공놀이할 때 제가 에르안 님 공을 못 받아쳤잖아요. 운동신경이 좋으실 거예요.”

“뭐, 네 말은 믿어야지.”

에르안이 다리가 아픈지 살짝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얼른 주무세요. 제가 옆에 있어 드릴게요.”

이제는 에르안이 잠들 때까지 손을 잡아 주는 것이 아예 습관 이 되었다.

나는 에르안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조명을 어둡게 한 뒤 에르 안의 한쪽 손을 잡았다.

긴 속눈썹 사이로 검은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리체.”

“네?”

“오늘 재미있었어?”

“오랜만에 나가니까 좋긴 좋았어요”

“저녁은 디엘하고 둘이 먹었어?”

“하인 하나랑 마부랑, 넷이 먹었어요. 전 평민이니까요.”

“그래?”

“왜 웃으세요?”

“내일은 나랑 둘이 먹어.”

“그러죠, 뭐.”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해. 새벽 부터 훈련한다고 지켈이 그랬어.”

“그럼 얼른 주무세요.”

나는 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주고 이불 밖으로 그의 가슴을 토닥여 주었다.

“계속 여기 있어 드릴게요.”

이윽고 에르안이 눈을 감았다.

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살짝 쓸 어 주며 미소 지었다.

“있잖아, 리체.”

“네.”

“자고 일어나면 죽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어두워지면 더 아픈 것 같고,그래서 밤이 되는 게 싫었는데……”

나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가뜩이나 몸이 아프면 마음이 약해지는 법인데,얼마나 외롭고 불안했을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 었다.

“네가 잠자리를 지켜 준 후부터 밤이 하나도 싫지 않아.”

나는 그의 발간 볼을 쓰다듬었다.

“제가 밤보다 더 무서운 것들로 부터도 지켜 드릴게요.”

그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나도 약속할게. 꼭 건강해져서, 온갖 것들로부터 널 지켜 줄 거야.”

딱히 믿음이 가지는 않았지만,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건강해져서 세르이어스 영지만 잘 지켜도 정말 많은 사람을 지키는 셈이었으니까.

“예.”

그의 검은 눈을 바라보며 나는 대답했다.

“기대할게요.”

에르안이 잠드는 것을 보고 방 에 돌아오자 비상벨이 울리고 있었다.

‘붉은빛! 마님!’

하녀나 시녀를 시켜서 나를 불러올 만도 한데,이렇게 벨만 울리는 것을 봐서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 뻔했다.

‘대체 언제부터 울리고 있었던 거야?’

나는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나는 너무 급해서 간다는 기척을 하지도 않고 빠르게 뛰어 공작 부인의 방 에 들어갔다.

에르안의 방에 있을 동안 벨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혹시나 골든타임을 놓친 거라 면!’

아직 공작 부인이 죽을 시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다.

어쨌든 그녀는 6년 후에 죽으니까.

내가 급히 달려 공작 부인의 방 문을 노크도 없이 열었을 때였다.

“……리체?”

“마님!”

나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다리 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공작 부인이 아주 당황한 얼굴로 손수건을 툭 떨어트렸다.

그 리고 그 손수건에는 피가 응어리 져 있었다.

적은 양도 아니었다.

흥건하게 고여 있는 피를 보며 나는 숨을 삼켰다.

‘진료 일지에는 각혈 같은 증상 이 전혀 쓰여 있지 않았는데!’

그런데 공작 부인의 얼굴에는 각혈에 대한 두려음보다,내게 들켰다는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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