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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6화 (16/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6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지 만, 나는 에르안의 머리카락을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디엘과 페렐르만 자작을 따라 마차에 올랐다.

공작성은 꽤나 커서,빠져나가 는 데만 해도 꽤 오랜 시간이 홀 렸다.

생각해 보니 공작성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밖에 나가는 것이었다.

‘심지어 쇼핑!’

물론 공작 부인이 불러 준 재단사가 직접 내 사이즈를 재고 옷도 한껏 만들어 주었지만, 아무 래도 직접 물건을 보고 사는 재 미는 없었다.

옷보다는 실험 기 구가 취향이기도 하고.

“크홈,그 옷은……”

마차를 타고 가는데,페렐르만 자작이 내 노란색 옷을 보고 말 을 걸었다.

“아, 마님이 선물해 주신 옷 중 하나예요. 이 귀걸이도요.”

“……별로야. 장식도 별로 없고.”

“옷 디자인은 제가 골랐어요.”

“보다 보니 단정하고 보기 좋다. 하지만 귀걸이는 너무 화려 하군.”

“저는 이게 제일 예쁘다고 생각 했는데……”

“하지만 단정한 옷에는 화려한 장신구가 어울리는 법이지.”

옆에서 디엘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것이 보였다.

둘 다 무시하고 고개를 돌리다가 나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내가 창가에 붙다시피 하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디엘이 상냥하게 설명해 주었다.

“경비병들이 집시를 끌고 가는 것 같군요.”

“집시라뇨?”

집시에 대해서는 회귀 전에도 별달리 아는 바가 없었다.

그냥 떠도는 사람들이며 거의 다 마법 사라는 것밖에는.

집시가 자신이 집시라고 밝히는 경우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실제 로 마주한 적도 없는 것 같았다.

“허락받지 않은 마법을 쓰는 사람들이죠. 금지된 마력 실험도 마구 한다는군요.”

“아.”

“허가가 나지 않은 마법에는 늘 부작용이 있는 법인데 말입니다.”

생각해 보니 나는 마법에 대해 서는 잘 몰랐다.

마력을 다루지만,의료적인 측면 외에는 그다 지 관심이 없었다.

“저렇게 끌려가는 걸 보니 뭔가 금지된 마법을 썼나 봐요.”

“그럼 저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재판을 받은 뒤에 어디론가 쫓 겨나겠죠. 너무 큰일을 벌였으면 사형까지 처해질 수 있고요.”

사형이라니.

실제로 사형수가 되어 본 적 있 는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다시 끌려가는 집시를 멍 하니 보다가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세상에.’

어디서 익숙한 실루엣이다 했더니,익숙한 할머니였다.

바로 나를 회귀시킨,감옥을 같이 쓴 그 이름도 모르는 할머니!

‘집시였나 봐!’

내가 죽는다는 생각에 너무 좌 절해서 별달리 할머니의 정체를 신경 쓰지도 않았다.

‘잠깐만,그럼 그거 금지된 마법 이야?’

하긴, 시간을 돌린다는 마법은 듣도 보도 못했다.

나는 할머니의 몸속에서 정상적이지 않게 부딪치던 마력을 떠올 리며 손톱을 깨물었다.

지금 저 할머니의 정체가 중요 한 게 아니었다.

‘부작용?’

늘 부작용이 있다면 마법이 걸린 내겐 대체 무슨 부작용이 생 겼을까…….

쫓아가 물어보고 싶어도 이미 경비병과 할머니는 사라진 후였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마차에 머 리를 기대고,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

[저, 저는 그냥……. 음,옛날의 에르안 님과 지냈던 그때가 더 좋았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거 였어요.]

내가 원래 이렇게 당황한 어조 로 말하는 사람이던가?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검은 눈의 청년이 보였다.

가늘게 쭉 뻗은 눈매와 호를 그 리고 있는 붉은 입술.

잘 알고 있는 에르안의 이목구 비였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던 에르안 과는 무언가 좀 달랐다.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진달까.

커다란 몸집의 그는 귀여움이라고는 전혀 없고, 이상하게 짐승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 뭐, 어릴 때 말하는 거 야?]

그가 내 손을 잡아 딸기를 하나 쥐여 주었다.

[그럼 먹여 줘. ]

[……네?]

어머, 얘 진짜 미쳤나 봐. 이렇게 큰 청년이 뭘 먹여 달래?

나는 딸기를 든 손으로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늘 내게 음식을 먹여 주었잖아.]

[그건 아이일 때……]

[나 그때랑 별로 변한 거 없는 데.]

그가 느릿하게 내 손목을 잡아 들어 내 손에 있는 딸기를 물었다.

그의 입술이 손가락에 닿자 귀 에 열이 올랐다.

[또…… 언제나 손도 잡고 있었 는데. 기억 안 나?]

나머지 한쪽 손으로 천천히 깍 지를 끼며 그가 선득하게 웃었다.

[안 날 리가 없는데,우리 똑똑 한 리체가. ]

아직도 내 손가락에 그의 입술 이 머물고 있었다.

그가 앞니로 살짝 내 손가락을 건드리며 입술로 고정시켰다.

목 뒤가 긴장되면서 이상하게 훌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뭐라고 대답할까 아무리 생각해 도 모든 뇌세포가 마비된 기분이 었다.

그때, 시야가 흐릿해지면서 몸이 흔들렸다.

“……체,리체 님!”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도착했어요.”

“네?”

“실험 기구 전문 가게요.”

디엘이 나를 흔들며 깨우고 있었다. 어느새 마차 안에서 잠든 것이 틀림없었다.

이 와중에 졸아 버린 것이 부끄러워,나는 재빨리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곧 눈앞에 펼쳐진 온갖 실험 기구의 향연에 흐릿해지는 꿈 내용은 또 잊어버리고 말았다.

***

호아킨 리암 키싱턴.

공작성의 기사단장인 그는 어느 새 하얗게 세어 버린 백발에 초 록색 눈을 가진 노장이었다.

그는 갑자기 찾아온 에르안을 보고 깜짝 놀라 검을 떨어트릴

뻔했다.

그가 알고 있던 에르안은 또래 보다 키가 작고 왜소했으며 몸을 움직이는 걸 싫어했다.

하기야 한 달에 몇 번씩이나 앓아눕기 일쑤니,공작성의 모두는 그냥 그가 무사히 살아만 있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기골 자체는 훌륭하게 태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에르안이 본격적으로 아프기 시작한 일곱 살 전까지, 호아킨은 어린 에르안이 장난감 검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면서 흐뭇해하곤 했다.

에르안의 외양은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가졌던 선대 공작과 눈동자 색만 빼고 여러 모로 닮았다.

그래서 요절한 선대 공작만큼이나 실력이 뛰어날 것이라고 기대한 적도 있었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나 검술 배울래.”

손자뻘의 에르안을 보며 호아킨은 잠시 당황했다.

에르안은 턱을 치켜들며 한 번 더 말했다.

“키도 크고, 덩치도 커질 거야. 튼튼해지고 말이야. 그러려면 리체가 운동을 좀 해야 한다고 했어.”

“그건 맞지만……”

지금까지 리체는 에르안에게 달 리기 정도만 시키곤 했다.

괜히 다른 운동을 잘못 가르치 면 안 된다며,체력을 좀 기르고 기사단의 전문 인력에게 배워야 한다고 했다.

에르안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그냥 리체와 시 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같이 밖에서 운동하고 간식을 먹고 책을 읽고 잠이 드는 일상이 만족스러웠다. 굳이 다른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이유 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리체는 저런 사람이 좋아?]

페렐르만 자작이 리체의 친구로 디엘을 보냈다는 것은 매우 큰 충격이었다.

디엘은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어른스럽기까지 했다.

리체가 열아홉의 똑똑한 친구를 필요로 한다면 자신이 얼른 더 커야 했다.

“에르안 님,아프고 힘들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요샌 좀 괜찮아. 그리고.......”

그동안 그가 방에 틀어박혀 아 무도 만나지 않은 것은 웨데릭이 끊임없이 ‘넌 남들 앞에서 뭔가 하면 우스워 보일 거다.’라고 속 삭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귀족 영식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검을 잡는다는데, 자신은 아파서 열셋이 되었는데도 제대 로 검을 잡는 법을 몰랐다.

그래 서 자격지심에 더더욱 숨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제 자격지심 같은 것 에 빠질 여유조차 없었다.

자신의 손을 놓고, 디엘의 손을 잡은 채 마차를 타던 리체의 뒷 모습이 떠오르자 이상하게 초조 해지기 시작했다.

리체는 똑똑하고,예쁘고,자신 보다 키도 컸다.

리체도 똑똑하고,멋지고,키도 큰 친구를 늘 꿈꿔 왔다면……

남들 앞에서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었다.

“튼튼해지고 싶어서 그래.”

“에르안 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희야 다행이죠.”

호아킨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세르이어스 공작가의 주인은 역 대로 늘 검술과 지략 모두 뛰어났다.

“올바른 선생부터 붙여 드리겠 습니다. 지켈!”

호아킨이 크게 소리치자 붉은 눈에 붉은 머리를 가진 청년이 금세 뛰어왔다.

이제 갓 성년을 넘겼지만 몸이 단단하고 덩치가 몹시 커서,에 르안은 마른 침을 삼켰다.

“지켈 카이스입니다, 에르안님.”

“가장 검술이 뛰어난 기사는 아니지만 어린 훈련병들을 가장 잘 가르치는 기사입니다.”

호아킨은 수염을 쓸며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훈련 방식이 좀 가혹합 니다. 인성이 홀륭한 친구는 아 니어서요. 괜찮으시겠어요?”

“응”

에르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둣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보다 많이 늦었잖아, 이미. 몇 배는 더 열심히 해야지.”

호아킨도 지켈도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호아킨이 조심스럽게 공작 부인 께 에르안의 훈련에 대해서 말하면, 공작 부인은 초반에 아픈 아들을 다그쳤다가 서로 상처만 받은 일화를 떠올리곤 했다.

그래서 결국엔 그냥 살아만 있 어도 다행이니 건드리지 말자는 결론이 나오곤 했던 것이다.

그 배경에는 에르안의 유약함이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러나 에르안의 표정은 담대하기 까지 했다.

“언제까지나 어린애처럼 굴 수 는 없어.”

에르안의 말에 기사단은 모두 다 기쁨의 눈짓을 교환했다.

드디어 자신들이 모실 어린 주 군에게서 희망을 발견했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다들 전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만일 리체가 ‘지금의 에르안 님이 너무 좋아요.’ 같은 말을 했다면 에르안이 기사단에 찾아오는 일 따위는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즉, 이 모든 일은 리체가 아무 생각 없이 제니에게 한 말 때문에 일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날부터 에르안은 지켈에게서 검술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에르안이 리체의 얼굴을 떠올리며 검을 쥐는 법을 다시 처음부터 꼼꼼히 배우고 있을 때, 리체는 에르안을 까닿게 잊고 행복하게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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