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5화
‘제니에게 충분히 힌트를 준 것 같은데,왜 연구실을 쓰라는 말이 없지?’
나는 정원에서 에르안과 간식을 먹으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곧 페렐르만 자작은 떠날 것 같던데.’
에르안에게 온갖 영양분이 가득 담긴 약초 가루를 탄 우유를 주고 있는데,갑자기 누군가 우리 에게 다가왔다.
“리체 님이시죠?”
분홍색 머리가 예쁘고 아주 키 가 큰,부드러운 인상의 남자였다.
“네, 그런데요?”
“페렐르만 자작님께서 보내셨어요. 나이가 좀 있는 친구를 선호하신다고 하셔서.”
그건 그냥 한 말이었는데…….
내가 뭐라고 대꾸하려는데,갑자기 에르안이 내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이상하게 번득이고 있었다.
“다 드셨어요? 잠시만요. 저분 하고 얘기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나는 에르안에게서 잔을 받아 든 다음,한쪽 손이 꽉 잡힌 채로 디엘에게 고개를 돌렸다.
“페렐르만 자작님께서 제게 친구를 보내셨다고요?”
아니,분명히 원하는 걸 말했는데 왜 쓸데없는 걸 보냈지 싶었다.
“디엘 몰레킨이라고 합니다. 페렐르만 상단에서 오래 일했으니 영리함은 보장되었고,나이는 열 여덟입니다.”
그게 뭐 어쨌다고, 하는 표정으로 굳이 친구가 필요 없다고 하려던 찰나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디엘의 말에 내 입꼬리는 슬금슬금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리체 님의 전용 연구실을 만드는 총괄 역할에 저를 임명하셨습니다.”
‘전용 연구실? 총괄 역할? 그게 그렇게 거창할 일이던가?’
“어…… 저는 그냥 자작님의 연구실을 써도 되는데요.”
“더 넓고, 화려하고,멋지게 만들어 드리라 하셨습니다.”
연구실을 빌려 달라고 했는데 새로 지어 준다고?
역시 부자들은 스케일이 달랐다.
나는 뼛속까지 평민이라 거 기까지는 생각도 못했다.
물론 나만의 공간으로 새로 지어 준다는데 나쁠 건 없었다.
생각만 해도 좋아서 나는 디엘의 푸른 눈을 바라보며 히죽 웃 었다.
“그럼 뭐,사양하지 않고.”
“일단은 제가 마님께 말씀드려 공간을 확보해 놓았습니다. 혹시 온실 부지도 필요하신가요?”
“있으면 좋죠.”
“그럼 전체적인 인테리어와 가구, 필요한 실험 기구 둥은 차차 의논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고생하시겠어요.”
디엘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제 일인데요.”
그리고 그가 웃는 얼굴로 덧붙였다.
“물론,아가씨께서 열아흡 즈음 의 나이인 똑똑한 친구가 필요하 다고 해서 제가 차출된 건 맞아요.”
“흠.”
“그럼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온실 부지 후보를 조사한 뒤 연락드릴게요.”
“네.”
페렐르만 자작이 보냈으니 어련 히 똑똑하고 일처리도 깔끔할까.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페렐르만 상단 사람들은 일도 잘하고 여러 모로 똑 부러진다고 들었다.
애초에 사람을 잘 뽑아 놓았으니 딸에 미쳐 있는 페렐르만 자 작이 이끌고 있어도 상단이 엄청난 이익을 쌓을 수 있는 것이었다.
디엘은 예의 바르게 나와 에르 안에게 인사하고 멀어졌다.
‘책상은 최대한 넓은 게 좋고, 온갖 비싼 실험 기구를 다 사 달라고 해야지.’
신나서 콧노래를 홍얼거리는데,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에르안 님?”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 라보았다.
“어디 불편하세요? 아프시다거나.”
“……아니.”
에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친구가 필요했어,리체?”
“네?”
“열아홉 즈음의 똑똑한 친구?”
이상하게 추궁당하는 기분이라 나는 살짝 망설이며 대답했다.
“뭐…… 딱히 필요하지는 않았는데, 친구라면 그런 조건이 좋았던 건 사실이죠.”
에르안이 내 손을 워낙에 꽉 쥐 고 있어서 살짝 아플 지경이었다.
“왜 열아흡이어야 하는데?”
그건 내 회귀 전 나이니까…….
나는 난감해하며 그 손을 놓으 려고 손가락 하나하나를 떼기 시 작했다.
“그냥,대화가 좀 통할까 해서?”
“그래서……”
나는 문득,에르안의 새초롬한 눈매가 이상하게 공작 부인이 페 렐르만 자작을 언급하며 분노할 때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리체는 저런 사람이 좋아?”
“저런 사람이라면……”
저런 사람이 뭐지?
나는 디엘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디엘은 내게도 낯선 사람이었다.
아직 좋고 싫고 할 것도 없이,아무 생각이 없어서 대답하 기가 난감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이 얼얼해서 나도 모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에르안 님,일단 손 좀 놔주세요.”
“리체는 나를 가장 위하는 사람이라며.”
그가 힘을 주어 말해서 나는 선선히 대답했다.
“그건 맞죠.”
“근데 친구가 필요해?”
“있음 좋고,없음 마는 거예요.”
“나는 리체의 친구가 아냐?”
“네?”
가까스로 그의 손을 떼어 낸 나는 기겁을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큰일 날 소리 하시네요, 에르 안 님. 에르안 님은 귀족이고,이 세르이어스 가문을 물려받으실 후계자예요. 전 평민이고요. 친구 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하지만 그의 샐쭉한 표정으로 나름의 서운함을 알아챈 나는 부드럽게 그의 입에 딸기 한 조각을 넣어 주며 덧붙였다.
“저희는 친구보다 훨씬 더 유대 감이 있는 사이죠.”
“……정말?”
“그럼요.”
또 조만간 웨데릭이 올 것이다.
나는 아직 오지 않은 그 소년을 경계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친구보다도,혈연보다도 훨씬 더 끈끈한… 서로에게 유일한 관계라고요.”
“약속이야.”
“그럼요.”
그의 새까만 눈을 바라보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안 님이야말로 변하시면 안 돼요.”
“응. 하지만……”
에르안은 우물거리며 눈을 내리 깔았다.
“나도 키 크고 싶어.”
‘이럴 수가!’
나는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똑똑해지고도 싶고.”
‘잘 생각했어!’
밖으로는 표현하지 못했지만, 나는 뿌듯함에 눈물이라도 홀릴 것 같았다.
“열아홉이 아니더라도, 열아흡 같아질래.”
그의 투정 어린 말투가 너무 귀여웠다.
생전 애들 보고 귀엽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내리깐 긴 속 눈썹이나 보들보들한 볼살 같은 것을 보고 있으면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아마 내가 키우고 있다고 생각 해서인 것 같았다.
토라지고 시무룩한 표정조차도 어딘가 어린애 같아서 엉덩이를 토닥여 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럼 제 말대로만 하세요.”
나는 딸기를 하나 더 먹여 주면서,키 크는 데 좋다고 알려졌지만 다소 쓴맛의 풀장미 가시환도 입에 넣어 주었다.
평소 같으면 쓴 건 안 먹겠다고 짜증 냈을 에르안이 아무 투정없이 받아먹었다.
“제가 권하는 음식 잘 드시면서 운동도 더 열심히 하시고,잠도 제때 잘 주무시면 돼요. 운동은 좀 더 전문적인 사람이 필요하긴 한데.”
“리체 아니면 필요 없어.”
“흐응,키 크고 튼튼해지려면 저보다 기사단 사람들이 더 도움이 될 텐데요.”
“그럼 똑똑해지는 건?”
“당연히 그것도 저랑 밤에 책 좀 잠깐 읽는 것으로는 부족하죠”
나는 의학 지식은 풍부했지만 귀족들의 교양 같은 건 잘 몰랐다.
당연히 이 또한 전문가에게 맡 겨야 할 영역이었다.
“가정교사도 슬슬 들이시고,공 작성에 있는 책들을 다 읽으면 좋겠죠.”
아직도 에르안은 나보다 덩치도 키도 작았다.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쉽게 내게 정을 준 게 안쓰럽기도 했다.
오물거리는 붉은 입술을 바라보며 나는 이유 없이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
며칠 뒤, 페렐르만 자작은 딸을 찾으러 이르비아로 떠났다.
“3개월 안에는 꼭 돌아오겠습니다.”
공작 부인은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꼭 따님을 찾으시길 바라요. 마음 놓고 잘 다녀오세요.”
보통 공작 부인은 난색을 표하며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돌아와 달라고 부탁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도 아쉬워 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공작 부인은 내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싱긋 웃었다.
“리체가 있으니까요.”
그동안 공작 부인은 페렐르만 자작을 한 번도 찾지 않았다.
내게 완전히 처방을 맡기고 나서 안색이 훨씬 더 좋아진 것도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페렐르만 자작보다 조금 더 세밀한 처방을 했기 때문이다.
“잘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에르안 역시 내 손을 잡고 별로 아쉽지 않다는 둣이 말했다.
그동안 잘 먹이고 잘 재웠더니 훨씬 더 튼튼해진 티가 났다.
확실히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변화가 빨리 나타났다. 살도 좀 오르 고,눈동자도 반짝거렸다.
페렐르만 자작은 떨떠름해하며 내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거든 비둘기를 보 내. 바로 달려올 테니. 평소에 주 기적인 편지 왕래야 당연하고.”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무슨 소리.”
페렐르만 자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넌 나를 항구까지 배웅해야지.”
“네?”
“내 조수잖아.”
에르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끼어 들었다.
“하지만 그동안의 조수들은 한 번도...”
“좀 시킬 게 있습니다.”
페렐르만 자작은 딱딱하게 말했다.
“디엘과 함께 따라 오거라. 가는 길에 실험 용품 가게도 들를 겸.”
내 연구실과 온실은 디엘의 주 도하에 착착 잘 준비되고 있었다.
지금 그 연구실에 비치할 실험 용품들을 보러 가자는 듯했다.
페렐르만 자작 옆에 있던 디엘 역시 상냥하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자작님께서 리체 님에게 선물을 직접 주시고 싶으신가 봅니다. 같이 가시죠.”
“말은 바로 해.”
페렐르만 자작이 툴툴거렸다.
“그냥 실험 기구를 잘 볼 줄 아 는가,못 미더워서 같이 가는 거 니까.”
“아…… 네.”
돈이라면 엄청나게 많을 페렐르만 자작과 함께 실험 기구를 산다면 나쁠 건 없었다.
‘최대한 고급스러운 것으로 직접 골라야겠다.’
나는 내 손을 잡고 있는 에르안 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에르안 님,저 다녀올게요.”
“……그래.”
아쉽다는 둣 에르안의 손이 떨어졌다.
그의 경계심 어린 눈이 디엘을 향했다가 다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믿을게”
‘……대체 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