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4화
나는 민망해져서 열은 한숨을 쉬고 난 뒤, 공작 부인의 안색을 살피고 화제를 돌렸다.
“시녀들에게 얘기하셔서 목욕하실 때 달민들레꽃 향유를 첨가해 보세요. 혈색이 훨씬 좋아지고, 피부 결이 부드러워질 거예요.”
“……그래?”
“두통이나 복통에는 별 효과가 없는 미용 측면의 처방이라 페렐르만 자작님께서는 여기까지 살피시지 않으셨을 거예요.”
“..............”
“그래도 사람이 거울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면 하루의 시작에 활기가 도니까, 장기적으로 건강에 좋을걸요.”
페렐르만 자작은 상당히 무심한 사람이다. 젊은 과부인 공작 부인의 안색에 대해서는 조금의 신 경도 안 쓰고 있을 것이 뻔했다.
공작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억해 두겠다고 한 뒤 아주 살 짝 웃었다.
“요즈음 네가 에르안도 잘 돌봐 준다던데. 하나하나 생활 습관부터 잘 잡아 주고 있다고.”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면역력에는 운동과 숙면이 중요하니까,어릴 때부터 습관을 잘 잡아 놓아야 해서요.”
그동안 나는 천천히 에르안의 기초 체력을 기르고 근육 발달을 도와주었다.
“정말 고맙구나. 지난번 뱀 사건만 해도 네게 너무 고마운데……”
공작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그 애는 내 말을 잘 안 들어 서. 사실 에르안이 어릴 때부터 내가 너무 바쁘고 아이는 너무 자주 아파서,애착이 형성될 기 회가 없었단다.”
“아.”
“그 와중에 나는…… 강하게 키 우고 싶어서 자꾸 나약해지면 안 된다고 쓴소리를 했더니, 이제는 어떻게 가까워져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구나.”
“어쩔 수 없죠.”
색이 고운 마카롱을 하나 집어 먹으며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전 딱히 공작성 밖에서 할 일 도 없으니,에르안 님을 잘 보살필게요.”
“에르안과 동갑인데, 왜 이렇게 믿음직스러운지 모르겠어.”
공작 부인은 차를 마시다가 문득 내 옷차림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런데 그 옷들은 다 페렐르만 자작이 사 준 거니? 고급스럽긴 하지만 요즘 유행하고 있는 트렌 드와는 좀 다른데.”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맨 처음 페렐르만 자작이 말한 대로 대답 했다.
“아뇨. 따님 건데요,저한테 버리셨어요.”
“뭐?”
공작 부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 무심한 사람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이상하게 날이 선 목소리였다. 잠시…… 둘이 뭐 딱히 돈독하지는 않아도,서로의 영역을 인 정하며 사이가 꽤 좋지 않았었나?
“내일 오후에 시간을 비워 두도록 해라.”
“네?”
“아니다. 수도에 있는 모든 재단사의 이번 시즌 카탈로그를 제니 편에 보낼 테니 마음에 드는 재단사를 골라. 곧바로 부르도록 하지.”
***
“아가씨,식사는 입에 맞으세요?”
“네.”
공작성에 온 지 벌써 한참 지났 는데 새삼. 제니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나는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다 맛있어요. 영양소도 아주 풍부하고, 주방에서 내 요청도 잘 들어주고.”
“옷은요?”
“다 좋죠, 뭐. 솔직히 보육원에 서 입던 거랑 비교가 안 돼요.”
“하지만 마님께서 카탈로그를 보내셨잖아요...”
“그건 그냥 자작님과 마님의 취향 차이에서 벌어진 해프닝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산더미 같이 쌓인 카탈로 그를 휘리릭 보고, 가장 활동하기 편할 것 같은 옷을 지어 주는 재단사를 고른 참이었다.
딱히 중요한 일도 아닌 것 같은 데, 왜 제니가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다른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네,다 좋아요.”
옷이든 밥이든 다 보육원에 비 할 바는 아니었고, 문제는 내가 아직 에르안의 지병을 제대로 파 악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동안의 의료 일지와 처방 후 반응 둥을 꼼꼼히 살펴보는데도 눈에 띄는 게 없었다.
심지어 에르안과 꽤 자주 붙어있었는데도 원인을 찾지 못했다.
오히려 나와 지내며 에르안은 내가 보기에 상당히 건강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활기가 전달되는지, 공작성의 모든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에르안을 살펴보곤 했다.
‘다음 달에 웨데릭이 올 때까지 어떻게든 나를 더 좋아하게 만들 어야 해.’
웨데릭과 이시더 남작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방문하곤 했다.
이시더 남작은 누나인 공작 부인의 안부를 묻고,웨데릭이 외롭고 병약한 에르안과 말상대가 되어 준다는 명목이었다.
‘아무래도 정기적으로 뭔가 염 탐을 하거나 사람을 심어 두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느라 나는 바쁘 기 그지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친자 검사 연구는 페렐르만 자작에게 넘겨 버렸으니 더 신경 쓰지 않았다.
부디 포상처럼 연구실 이용이 허락되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러니 제니가 물어보는 쓸데없 는 것들이 귀에 들릴 리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페렐르만 자작이 당장 친자 검사 방법을 더 연구 하라며 연구실 열쇠를 줄 줄 알았다.
하지만 충분히 떡밥을 뿌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그는 만나도 복잡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기만 할 뿐 결국 의료 일지나 공유하다가 헤어지곤 했다.
“저,아가씨.”
“네.”
“그럼…… 좋아하시는 거,뭐 식성이나 옷 같은 것 아니더라 도…… 그런 것 있으세요? 아, 매일 의학 서적을 보시니까 의학 서적?”
“의학 서적 보는 게 좋긴 하죠. 근데 여기는 이미 충분히 많아서 더 필요 없어요.”
“혹시 또래 친구가 필요하신가요? 에르안 님과 가까워지신 걸 보면……”
“아뇨.”
또 다른 열세 살은 필요 없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동갑내기 친구,이런 건 별로예요. 제가 정신연령이 높은 편이라. 굳이 찾자면 열아홉 전후의 좀 똑똑한 애?”
솔직히 말하면 그런 친구도 필 요 없었다.
그냥 제니에게 뭐라 도 대답해야 할 것 같아 대충 둘 러댄 말이었다.
성의 없게 대답하고 나서 나는 담담하게 잘라 말했다.
“정말로 불편한 것도 없고 필요한 것도 없어요. 그러니 제 눈치를 보지 않으셔도 돼요.”
이만 나가 보라는 뜻으로 고개 를 돌리자 제니의 얼굴이 거의 사색으로 변했다.
그제야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채고 미간을 찌푸렸다.
“뭐예요? 무슨 일 있죠?”
“그게……”
제니는 한숨을 쉬며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페렐르만 자작님께서 아가씨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 오라고.......”
“왜요?”
“의심해서 미안하고, 또 고맙다는 말을 전하시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럼 직접 하시면 되잖아요?”
“……그럴 성격이 아니셔서.”
“그건 그렇죠.”
나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게 생긴 그 무뚝뚝한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 의사를 정확히 전달 할 필요는 있었다.
“제가 좋아하는 건 연구예요.”
제니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생긋 웃었다.
“뭐, 여러 가지 약초를 다룰 수 있는 멋진 연구실 정도……가 아 쉽네요.”
‘제발, 제발 페렐르만 자작님의 연구실을 쓸 수 있게 해 줘!’
부디 잘 전달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
제니의 말을 전달받은 아르가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안 그래도 솔직히 말하면 사정 사정해서 부탁하고 싶었다.
부디 친자 검사에 대해 더 연구해 달라고.
하지만 맨 처음 차갑게 약초를 거절했던 것 때문에 차마 염치가 없어 말을 못 꺼내고 있올 뿐이 었다.
뱀에게 에르안 대신 물리기까지 한 아이인데,그동안 의심해서 감시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어떻게든 제니로 하여금 리체가 좋아하는 것을 알아내려고 애를 썼는데…….
“멋진 연구실이라.”
아르가는 깊은 내적 고뇌에 빠 졌다.
친자 검사에 대해 더 연구해 달라는 속이 너무 뻔히 들여다보이 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목적도 있지만, 리체에게 정말로 뭔가 해 주고 싶은 마 음인데…….
공작 부인이 카탈로그와 재단사를 보냈다는 것도 신경 쓰였다.
그 무심하고 까칠한 사람이 왜 리체에게 잘해 주는지도 모를 일 이었다.
“또, 다른 건 없어?”
“음…… 이건 그냥 지나가둣 말 씀하신 거긴 한데.”
제니는 자신 없다는 말투로 덧 붙였다.
“동갑내기 친구는 별로고, 열아홉 전후의 좀 나이 많은 친구가 낫다고 하셨던 것 같아요.”
“아,그래.”
“워낙에 영리하신 분이니, 똑똑한 친구가 필요하기도 하겠죠? 에르안 님은 어릴 때부터 아프셔 서 가정교육도 제대로 안 받으셨으니.”
“아프기 전에는 수재라고도 불렸는데……. 허.”
안타깝다는 둣이 혀를 찬 아르가는 갑자기 생각난 둣이 오른쪽 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오른쪽에는 그가 수족같이 부리는 소년,디엘이 서 있었다.
“너 열여덟이지?”
디엘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한 건 확실하고……”
“아.”
분홍빛 머리의 소년은 어설프게 웃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가,감사합니다?”
“감사하라고 한 말은 아냐.”
아르가는 냉담하게 말한 뒤 씩 웃었다.
“난 이르비아로 간다. 그럼 넌 딱히 할 일이 없지?”
“할 일이야 언제나 만들면 되죠”
디엘은 엄밀히 말하자면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서 있는 열여덟 살의 늘씬한 남자였다.
페렐르만 상단에서 아주 어릴적부터 일해 온 평민이었으며 아 르가의 눈에 들 정도로 영리했다.
또래보다 키가 훌쩍 크고,부드 러운 인상에 온화한 성격을 가진 그는 아르가의 가는 눈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물론 슬픈 예감은 엇나가지 않는 법이었다.
아르가는 씩 웃으며 말했다.
“마님이 재단사를 보내 옷을 선물했다면……”
“자,자작님.”
“나는 디엘을 보내 연구실을 선 물하면 되겠군.”
아르가가 이르비아에 가 있을 동안 휴가를 즐기려던 디엘의 표정이 굳었다.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르가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이르비아로 떠날 동안에 리체에게 화려하고,넓고, 온갖 실험 기구가 다 갖춰진 최고의 연구실을 만들어 주거라.”
“네? 그냥 자작님의 연구실을 쓰라고만 하더라도……”
“리체의 것으로. 내 연구실보다 훨씬 더 멋있게.”
“자작님…… 여기는 세르이어스 공작성인데요. 페렐르만 자작저가 아니라.”
“상관있나? 공작 부인에게 허락 받아 와.”
“……네.”
디엘은 남의 성에 연구실을 만들라는 그 뻔뻔함에 질릴 지경이었다.
황당한 표정의 디엘을 보며 아 르가가 턱을 치켜들고 덧붙였다.
“그리고 네가 연구실을 만들어 준다는 명목으로 리체의 아주 친 한 친구가 되어 줘.”
디엘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 였다.
어차피 그에게 선택권이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