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3화
“리체? 리체!”
맨 처음 시야에 들어온 것은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트리는 검은 눈동자였다.
“……에르안 님?”
“괜찮아?”
“네.”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틀 정도 되었겠군요.”
에르안이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소심한 게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뻔했다.
‘에휴, 그런 게 아닌데.’
나는 어쩐지 그가 안쓰러워졌다.
그가 문득 나를 와락 껴안았다.
“……걱정했어.”
들릴 둣 말 듯한 작은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연약한 체구에 걸맞지 않게 나 를 안은 에르안의 힘이 얼마나 센지,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에르보니아 구렁이 독은 잘 해독하면 이틀 만에 일어날 수 있거든요. 페렐르만 자작님이 잘 처방해 주셨을 거라고 믿어요.”
나는 억지로 그를 떼어 내며 싱긋 웃었다.
“그건 그렇지만, 너무 불안했어. 네가 다시는 눈올 뜨지 못 할까 봐. 대체 왜 나 대신 물린 거야?”
“저는 건강하니까 이런저런 약을 쓸 수 있지만,에르안 님은 지병이 있으셔서 약초 쓰기가 까다로워요. 제가 물리는 게 여러 모로 낫죠.”
하지만 에르안은 납득하지 못한 기색이었다.
“리체, 앞으로 절대 그러지 마. 나와 약속해.”
에르안은 초조한 얼굴로 내 손을 꾹 쥐었다.
“……약속은 못하겠어요. 에르안 님의 건강은 제게 최우선인 걸요.”
나는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에르안이 뭐라고 말하려고 할 때,문이 열리며 페렐르만 자작과 공작 부인이 들어왔다.
그들도 어찐지 내가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지병이 없는 네가 물리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었겠지만……”
페렐르만 자작은 한숨을 쉬며 내 몸 상태를 확인했다.
그는 나 를 가만히 내려 보더니 낮은 목 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에르보니아 구렁이가 아니라 더 독성이 강한 치명적인 뱀이었으면 어쩌려고……
“에르보니아 구렁이가 확실하니 까 그런 생각은 안 했죠.”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머리가 살짝 어지럽고 입이 마르는 걸 봐서 치료가 잘 되었나 봐요, 자작님.”
“내가 이런 기초적인 치료도 못 할 것 같으냐.”
“믿고 물렸어요.”
공작 부인은 아무런 말도 못하 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숨만 쉬었다.
그녀는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도 할 수가 없다며 중얼거리기만 했다.
페렐르만 자작의 말대로, 정체 모를 지병을 가진 에르안이 물리기라도 했다면 훨씬 더 처방이 까다로웠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웨데릭이 좋은 곳 이라고 살살 꼬드겼다고 했지.’
에르보니아 구렁이는 군집을 이 루어 사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 언덕 자체가 에르보니아 구렁이들의 서식지라는 뜻이었다.
‘아마도 그냥 막 던져 놓은 함정 중 하나겠지.’
하여튼 웨데릭이라는 이름이 얽혀서 좋은 게 하나도 없었다.
“일단 정신을 차렸으니 쉬도록 놔둬야 합니다.”
페렐르만 자작은 울먹이며 내게 매달리는 에르안을 떼어 내며 말 했다.
“안정이 필요하니 다들 나가도록 하죠.”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말했다.
“수면제 하나만 처방해 주세요. 달맞이꽃 들어간 거로.”
“이미 준비해 왔다.”
페렐르만 자작이 준 수면제를 먹고, 모두가 나간 조용한 방에 서 나는 잠이 들었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나는 꿈을 꾸었다.
배경이 흐릿해서 장소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깜짝 놀랄 만큼 잘생긴 검은 눈의 남자가 나를 뒤에서 꽉 끌어 안고 있었다.
[감기 걸리면 어떻게 해,리체. 한겨울에 머리카락도 안 말리고. ]
갈색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나 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있었다.
[보육원 출신이라 그냥 대충 두는 거에 익숙해서 그래요. 말리 는 것도 귀찮잖아요. ]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네가 아 프면 내가 너무 겁나서 안 돼. ]
부드러운 손길이 내 머리카락을 쓸었다.
[귀찮으면 내가 해줄게]
그가 향유를 발라 내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이 너무 부드러워서 이상하게 마음이 노곤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아…….]
그런데 조금씩 귀나 목 뒤에 그 의 긴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솜 털이 삐죽 서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 탓인가.’
그때 남자가 조용히 물었다.
[다른 귀찮은 거 뭐 없어?]
[네? ]
[내가 다 해 줄게. 네가 귀찮은 모든 일들.]
그가 내 귓가에 대고 말해서 숨 결이 간지러웠다.
[혹시 씻는 건 안 귀찮아? ]
[뭐라고요?]
내가 펄쩍 뛰며 뒤를 돌아보는 데, 그의 엄지손가락이 내 목을 타고 내려가 움푹한 쇄골을 살살 눌렀다.
야릇한 느낌에 어깨를 움찔하자 그가 빙긋 미소 지었다.
[왜,이상한 생각 했어?]
[…그런 의도가 다분한 말씀이셨어요. 하지만 지나치게 이상한 생각은 안 했어요.]
[이왕 하는 거 진하게 해. 억울 하지라도 않게. ]
어이가 없어서 내가 혀를 차는 데,향유가 좀 남았는지 그가 미끄러운 손바닥으로 내 귓가를 매 만지기 시작했다.
[난 안 억울하게,정말 많이 상상했거든. ]
[진짜!]
내가 돌아서서 그를 때리려고 하자,그가 재빨리 자신의 뺨을 가져다 댔다.
[가슴 때리면 단단해서 네 손이 아파. 여기 때려.]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야,이 사람 진짜 이상해…….
진짜 다정하기 그지없는데,어딘가 핀트가 엇나간 상냥함이었다.
[조금이라도, 절대로 아프면 안 돼,리체…. 그런 경험은 한 번이면 된단 말이야.]
[그런 경험이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경험 말이야.]
다시 그가 부드럽게 나를 꼭 끌 어안았다.
[그때 알았어. 네가 이미 내 세 상이 된 걸 말이야…….]
[아주아주 옛날 일 아니에요?]
[내가 지병이 있다는 게 그때만큼 싫었던 적이 없었어……. 네가 깨어날 때까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가슴이 단단하다는 그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몸이 얼굴만큼이나 몹시 착하네……. 약간 정신 나간 것 같긴 하지만 뭐 그 정도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잠에 서 설핏 깼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을 때에 는 완전히 그 꿈을 잊어버렸다.
***
페렐르만 자작의 처방에 따라 나는 빠르게 회복했다.
연구도 못 하고 누워 있었지만, 아예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공 작성의 사람들에게 완전한 신뢰 를 얻게 된 것이다.
애초에 그걸 노리고 대신 뱀에 게 물린 건 아니었는데,어쨌든 잘된 일이었다.
페렐르만 자작은 나를 공작성에 두고, 딸을 찾기 위해 저 멀리 남쪽의 이르비아로 떠나겠다고 말했다.
공작 부인과 에르안도 나만 남기고 가는 것에 완전히 동의했다.
나는 빠르게 내 자리로 복귀했다.
완벽하게 내게 마음을 연 에르 안과도 매일매일 붙어 있었지만, 그하고만 시간을 보낸 건 아니었다.
나는 공작 부인에게 두통약 한 번, 복통약 한 번을 처방해 주었 으며 뜬금없게 티타임에도 한 번 초대받았다.
공작 부인도 나도 워낙에 서로 쓸데없는 말을 안 하는 성격이라 딱히 즐거운 티타임은 아니었다.
다만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화려한 티푸드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장 맛있는 게 뭐니?”
“네?”
“각각 다른 셰프들의 야심작들을 모아 놓은 거란다.”
공작 부인은 비장한 어조로 말 했다.
“네가 가장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고르면 그 셰프를 고용하마.”
“그분도 직장이 있을 텐데……”
“연봉의 두 배를 주면 되지.”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정말 황실에 비견될 만큼의 부 를 갖고 있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하긴, 그러니까 이시더 남작과 웨데릭이 홀라당 집어삼키려고 지금부터 밑 작업 중일 것이다.
아무래도 웨데릭이 에르안을 건강하지 못하게 길들이고 있는 것 자체가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이 잘사는 풍요로운 영 지를 반란군에게 넘기고 쫄딱 망해 버리다니...
차라리 반란군이면 유능하기라 도 했어야지,여러모로 한숨 나 오는 결과였다.
“공정한 채용이지 않니?”
내 복잡한 표정을 잘못 해석했는지,공작 부인이 고개를 갸웃 하며 물었다.
“이것이야말로 완전한 블라인드 테스트잖아.”
“블라인드 테스트가 문제가 아니고……. 비싼 셰프를 고용하시려면 단것 외에도 여러 가지 음 식 솜씨를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다른 거 못하면 네 디저트나 만들라고 하면 되고.”
공작 부인은 대수롭지 않계 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