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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2화 (12/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2화

공작성에 온 지도 벌써 일주일 이 흘렀다.

그동안 에르안은 한 번 어지럼 증으로 쓰러져 크계 앓아 누운 것 빼고는 비교적 건강하게 지냈다.

에르안이 식은땀을 흘리며 발작 을 시작했을 때,페렐르만 자작은 익숙하게 처방을 하고 방에 눕혔다.

“이 정도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 지.”

그의 처방으로 인해 반쯤 진정 된 에르안은 반쯤 눈을 감은 채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막상 작은 꼬마가 앓고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일 아침이면 괜찮아지실 거다.”

현재 상황으로써는 맞는 말이었지만,나는 그가 이러다가 결국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페렐르만 자작이 자리를 떴어도 쉽사리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리체, 너도 가렴. 내가 남아 있 을게.”

“아니에요. 마님이야말로 가셔서 쉬세요. 내일 아침 일찍 처리하 실 일이 있다고 들었어요.”

나는 물수건을 꼭 짜며 에르안의 머리맡에 앉았다.

“주치의의 조수니까, 이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요. 지난번에도 밤새워 간호한 적이 있고요.”

공작 부인은 결국 알겠다며 고 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그래서 나는 밤새워 에르안의 곁을 지켰다.

“……리체?”

의식이 거의 없던 에르안은 한 밤중에야 정신이 드는지 게슴츠 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주무세요, 에르안 님.”

나는 그를 토닥여 주며 말했다.

“이번에도 계속…… 여기 있을 거야?”

“네, 내일 아침에 괜찮아지실 때까지.”

에르안이 힘없이 손을 내밀었다.

‘아기 같아……’

나는 그의 손을 잡아 주며 싱긋 웃었다.

“네, 손도 잡아 드릴게요. 얼른 다시 주무세요.”

“응……”

그가 다시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계속 여기 있어 줘.”

“네.”

푹 자라는데도,에르안은 그날 밤 몇 번 깨서 내가 있는지 확인 했다.

그렇게 깊은 밤이 꼬박 지났다.

나는 그날 밤도 결국 에르안의 다른 중상을 찾아내지 못했다.

여전히 그의 병세의 원인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다.

두 번의 밤을 꼬박 새운 이후로 정말 경계가 풀렸는지,에르안은 정말로 나와 붙어 지내기 시작했으니까.

게다가 에르안은 매일 내가 시 키는 대로 하루 일과를 보내곤 했다.

그래서 우리의 하루하루는 알차게 돌아갔다.

“와, 에르안 님! 어제보다 더 빨 라지신 것 같아요!”

나는 영혼 없이 외치며 에르안이 뛰는 것을 아름드리나무에 기대어 바라보곤 했다.

“뛰세요! 뛰라고요! 면역력을 길러야 하니까!”

아무리 신분 차이가 있다고 하 지만, 아무래도 시키는 입장이 되니 말이 조금씩 편해지기도 했다.

몇 바퀴를 실컷 턴 에르안이 헉 헉거리며 내 옆에 앉았다.

“어제보다 한 바퀴 더 뛰었어.”

“어때요? 몸을 움직이시니 기분 좋으시죠?”

“응,개운한 것 같아.”

나는 그의 땀을 닦아 주고, 물을 마시게 해 주었다.

쉬는 동안, 영양소가 풍부히 들어간 샌드위치도 입안에 직접 넣어 주었다.

억지로 안 먹겠다고 할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식사는 남기지 말고 다 드셔야 해요. 그래야 놀아드릴 거에요.”

다행히 에르안은 내가 직접 먹 여 주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없었다.

“아마 오늘 밤도 잠이 잘 오실 거예요.”

“그렇겠지.”

에르안이 입을 오물거리며 대답 했다.

자꾸 보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귀여운 것 같았다.

나는 애들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보육원에서는 생각보다 나를 따르는 애들이 많았다.

툴툴대면서도 챙겨 주던 생각이 나서 나는 에르안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살짝 닦아 주기까지 했다.

에르안은 빤히 나를 바라보다가 씩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놀아 준다며. 그렇다면 오늘은 일찍 자고 싶지 않은데.”

“일찍 자야 튼튼해져요.”

“그래?”

에르안의 눈이 이때다 싶었는지 흡족하게 가늘어졌다.

“그러니까 오늘 밤도 옆에 있을 거지?”

“네?”

“네가 손을 잡아 줘서 잠이 빨리 든 거잖아.”

그게 아닌데…….

나는 살짝 당황스러워졌다.

나는 그냥 키 좀 키우려고,빨 리 잠들게 하기 위해 손을 잡아 주고 눈을 감도록 한 것뿐이었다.

“지난번에 아팠던 그날 밤도 네가 손을 잡아 줘서 다 나았어.”

그것도 아닌데…….

그건 페렐르만 자작의 처방 때문이었다.

나는 그 점을 분명히 하려고 애썼지만 에르안은 막무가내였다.

“요새 진짜 몸 상태가 좋아진 것 같아.”

에르안은 씩 웃으며 말했다.

“심지어 오늘은 어지럼중이 완전 사라졌거든. 푹 자서 그런가 봐.”

“뭐…… 거듭 말하지만,숙면은 건강의 조건이니까요.”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나를 믿으라고 그렇게 큰소 리를 쳤는데,이 정도는 해야 지…….

“알았어요. 오늘 밤도 잠들 때 까지 곁에 있어 드릴게요.”

이런 대화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슬슬 혼자 자도 상관없을 것 같 았지만,에르안은 굳이 내가 옆에 있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오늘 밤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뭐, 그래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불면중에 시달리다 오랜만에 잘 자면 당연히 애라도 기분이 좋겠 지 싶었다.

“하지만 좀 더 일찍 주무셔야 해요.”

‘그래야 키도 크고 더 튼튼해지 지.’

어느새 처음 볼 때보다 혈색도 좀 더 나아진 것 같고, 표정도 풍부해진 것 같았다.

‘진짜 잘 키우면 멋있어지겠다.’

나는 물을 마시고 있는 그를 보 면서 멀뚱히 생각에 잠겼다.

내가 이렇게 범인류적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조금은 사적인 욕심을 채워도 되지 않을 까 싶었다.

회귀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에르안은 너무 매력이 없었으니까, 키우는 보람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왕 건강하게 키울 거면 좀 내 취향으로…….

‘이목구비는 예쁘니까 이대로만 크면 될 것 같고. 몸집은 좀 큰 게 좋은데. 키도 크고 몸도 단단하고……. 목소리도 변성기가 오 면 좀 더 낮아지겠지? 낮으면 낮 을수록 멋있으니까 목 관리도 좀 시켜야겠다. 앞으로 샌드위치에 변성기에 좋은 메레로 뿌리 좀 넣어 달라고 해야지.’

살짝 퇴폐적이면서도 잘생긴 혹 발의 청년 이미지가 희미하게 떠오르다가 사라졌다.

기억력이 좋은 편인데도 왜 갑자기 그런 잔상이 떠올랐는지 알 수가 없었다.

‘회귀 전에 그런 환자를 본 적 이 있었나? 이상하다. 그렇게 잘 생긴 사람이라면 기억할 텐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의 열세 살 에르안을 보면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등산도 운동이야?”

문득 에르안이 질문을 해서 나 는 헛생각을 빠르게 지워 버렸다.

“그럼요.”

“그럼 내일은 성 뒤쪽의 언덕에 가 봐도 돼?”

“좋죠. 거기 가 보고 싶으셨어요?”

“응.”

“네, 내일 가요.”

조용히 웃는 앳된 얼굴에 설렘 이 가득했다.

나는 그의 볼을 쓰다듬어 주며 환히 웃었다.

***

성 뒤쪽에는 산이라기보다는 동 산에 가까운 작은 언덕이 있었다.

“에르안 님,괜찮으세요?”

숨이 차는 게 눈에 보이는데, 그래도 그는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 뒤로는 기사단 두 명이 호 위로 따라 붙고 있었다.

“여기를 오고 싶으셨어요?”

“웨데릭 형이 여기에 앵두가 많 다고 했어.”

“어머,그래요?”

나는 눈을 반짝이며 그의 손을 잡고 걸었다.

“잔뜩 따서 가야겠어요.”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둣이 태 연하게 말했다.

“좋아할 것 같았어.”

“네?”

“지난번에 저녁 식사를 할 때 과일 후식을 아껴 먹길래.”

“출신이 보육원이라…… 맛있으면 아껴 먹게 되더라고요.”

하늘도 파랗고, 날씨도 좋고,여기저기서 새가 울었다.

내 손을 꼭 잡은 에르안의 손은 따뜻하고,돌림노래를 부르며 걷 는 길은 평화로웠다.

‘이렇게 여유롭게 소풍 나온 건 나도 처음인 것 같은데.’

언덕 중턱에 올라, 우리는 잠시 간식을 먹기로 했다.

호위 기사들이 피크닉 바구니를 준비할 동안 우리는 양지바른 곳 에 나란히 앉았다.

“좋다.”

“좋네요.”

에르안은 올라오면서 딴 앵두를 내밀었고,나는 사양하지 않고 냉큼 받아먹었다.

“힘들더라도 몸을 음직이고 햇 빛을 보니까 기분도 좋고 가뿐 해.”

“제 말이 맞죠?”

앵두를 받아먹은 보답을 하기 위해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도 올라오면서 비르테 풀을 땄어요. 드시면 성장에 도움이 될 거예요. 이 풀 드세요.”

“……이상하게 생겼는데.”

“그래도 제가 시키는 대로 다 하기로 하셨잖아요.”

그는 내가 내미는 풀을 한 입 먹다가 맛이 없다는 듯이 튀ᅵ,하고 뱉었다.

“엄청 써. 맛도 없고.”

“아, 그냥 말대꾸 하지 말고 먹 으세요.”

나는 시무룩해하는 에르안의 입 에 억지로 비르테 풀을 넣어주며 달랬다.

“대신 제가 풀피리도 불어 드리고, 토끼풀꽃으로 반지도 만들어드릴게요.”

“그게 뭔데?”

“이런 데 놀러 나오면 하는 거 예요.”

토끼풀꽃 몇 개와 풀피리를 불 적당한 풀을 찾으려고 내가 잠시 다른 곳에 정신을 팔았을 때였다.

간식 준비가 다 되었다는 기사 들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리는 데,에르안의 발목으로 뱀 하나 가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에르안 님!”

나는 깜짝 놀라서 토끼풀꽃을 후드득 떨어트리고 그에게 달려 갔다.

붉은 몸통에 검은 점박이라면, 가벼운 독성을 가진 에르보니아 구렁이임에 틀림없었다.

약하디약한 에르안이 물린다면 큰일이 날 것이 뻔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급하 게 그를 끌어안고 옆으로 뒹굴었다.

내 발목에 시큰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윽고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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