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1화
나는 새로운 친자 검사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여유 시간마다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아예 백지 상태라면 모를까, 대충 배경 지식이 있는 상태에서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대충 비율도 알 것 같고, 추가로 더 들어갈 약초도 감이 잡힐 무렵 나는 페렐르만 자작에게 직 접 찾아갔다.
“에토프 꽃잎을 달라고?”
나는 보통 제니를 통해 약초를 받곤 했으나 에토프 꽃잎은 직접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에토프 꽃잎은 장시간 복용하면 독약으로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세르이어스 공작성에 온 지 얼마 안 된 외지인이었다.
“안 돼.”
페렐르만 자작은 예상대로 단호 하게 거절했다.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딱딱하게 말을 이었다.
“네게는 선택권이 두 개 있다.”
“뭔데요?”
“지금 당장 꺼지는 것. 그리 고……”
그의 눈빛이 의심으로 번득였다.
하긴, 지금 세르이어스 공작가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았다.
공작은 죽었고, 공작 부인은 매 일같이 아프고,에르안의 지병은 원인 불명이고.
게다가 선대 공작은 외아들이었다.
에르안은 세르이어스 영지를 물려받을 단 하나의 핏줄이었다.
“년 이유를 말하고,그 이유가 뭐든 간에 난 믿지 않을 거고, 그렇게 서로 시간 낭비를 하다가 꺼지는 것.”
내가 워낙에 영리하여 그의 마음에 든 건 사실이지만,이렇게 경계하는데 연구실을 쉽게 얻어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뭐,자신의 환자를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하는 주치의의 입장에 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대로 그의 앞에서 얌전히 꺼질 생각이 없었다.
졸라서 얻어 낼 수 없다면 스스 로 주게 하면 된다.
“그러면 제 보고서부터 먼저 읽어 주실래요?”
나는 그동안 간단히 정리해 놓 은 보고서를 내밀었다.
미간을 찌푸리던 페렐르만 자작 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제 목 자체가 ‘친자 검사 간략화를 위한 연구’였던 것이다.
“보고서를 다 읽어 보시면 알겠 지만, 에프론 풀하고 시리카 뿌 리를 3:1의 비율로 조합하고,80 시간 이상 끓인 뒤에 에토프 꽃 잎을 좀 넣어 우려내면……”
페렐르만 자작은 내 설명을 들 으면서 정신없이 보고서를 넘기 고 있었다.
그의 눈이 빠르게 활자를 훌었다.
“친자 검사에 걸리는 시간을 사흘 정도 앞당길 수 있고,절차도 상당히 간략해지죠.”
“대, 대체 이걸 어떻게……”
“원래 에토프 꽃잎의 정량을 맞춰 보기 위해 마지막까지 제가 실험해 보고 싶었는데,저를 못 믿으시면 자작님께서 직접 해 보 세요.”
페렐르만 자작은 이미 내 보고 서의 내용을 모두 다 이해한 둣 했다.
상당히 복잡한 내용이었는데, 역시 똑똑하긴 똑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도 에르안을 살리지는 못했다. 결국 내 어깨가 무겁다는 뜻이었다.
“이런 발상을……. 아, 세상에.”
“뭐, 저는 똑똑하니까요.”
회귀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쉽 게 알아내지는 못했을 조합이었지만,굳이 그런 걸 설명할 필요 는 없었다.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별것 아 니라는 둣이 말했다.
“자작님께 유용할 것 같아서 연구 좀 해 본 것뿐이에요.”
무뚝뚝한 데다가 말투도 냉랭해서 그다지 호감이 가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자세히 뜯어보면 불쌍한 사람이었다.
아내도 딸도 잃고, 딸을 찾겠다고 대륙 끝까지 갔다가 친한 친구도 잃고.
죄책감에 그 친한 친구의 집에 머무르며 정신은 다른 곳에 팔고 있는 그의 인생이 안쓰러웠다.
저렇게 조금도 안 웃는 건 정말 웃을 일이 하나도 없어서일 것이다.
뭐,오만하고 고집불통인 성격 은 선천적일 수도 있겠지만.
“딱히 뭐 자작님이 엄청 좋거나 한 건 아니고요.”
오해할까 봐 나는 딱 잘라 말했다.
“그냥,제계 따님의 방도 주셨는데 저도 자작님께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었어요.”
페렐르만 자작은 머리를 감싸며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무심하 게 인사를 했다.
뭐,저 성격에 미안하다거나 고 맙다는 말이 바로 나올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 눈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는 걸 보니 아까의 말을 상 당히 후회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근데 제가 주치의여도,함부로 조수한테 에토프 꽃잎을 주지는 않았을 거예요.”
나름대로의 위로인데 알아들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럼 쉬세요. 나머지 연구는 자작님께 맡길게요.”
그리고 흘리듯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뭐…… 더 본격적으로 연구하면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지도요.”
제발 걸려라,제발.
“따님 방은 너무 아기자기해서 연구실로 쓰기엔 좀 그렇거든요. 아,물론 방은 엄청 마음에 들어요”
혹시나 아늑하고 편한 방을 빼 앗길까 봐 재빨리 덧붙인 나는 총총거리며 페렐르만 자작의 방 을 나갔다.
***
아르가는 리체가 준 보고서의 내용을 보며 다시 한번 혀를 찼다.
지금까지의 조수들은 어떻게 해 서든 붙어있기 위해 그에게 잘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곤 했다.
하기야, 아내와 딸의 실종으로 중간에 연구를 박차고 나온 전례 때문에 황궁 주치의가 못 되었을 뿐이지 그의 실력은 대륙에서 굉장히 유명했다.
오죽하면 부족할 것 없는 세르이어스 공작가에서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어도 좋으니 제발 머물러 달라고 간청했겠는가.
하지만 리체는 달랐다.
가장 어리면서도 가장 영리했고,그러면서도 생글생글 웃거나 애교를 부리지 않았다.
그냥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능력 을 당당히 보여 줄 뿐이었다.
확실히 그가 지금까지 데리고 있던 조수들과는 결이 완전히 다른 애였다.
어딘가 사고방식이 묘하게 그와 비슷해서,딸뻘인데도 대화가 잘 통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제니.”
“네, 자작님.”
제니는 자작저에서부터 그와 함 께 있던 하녀로, 그녀를 리체에게 붙여 둔 데에는 다소 감시의 뜻도 있었다.
워낙에 공작저 사람들의 상황이 좋지 않다 보니, 그 역시 책임감으로 아무나 들이고 있지는 않았 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무 마음에 드는 아이 가 적시에 나타난 것이다.
리체가 워낙에 뛰어나 조수로서 욕심이 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 고 해서 너무 경계심을 풀면 안 된다는 나름의 마음가짐이기도 했다.
“그동안 수상한 기색은 하나도 없었나?”
“딱히……
제니는 말꼬리를 흐리다가 주섬 주섬 종이 뭉치를 꺼냈다.
“그런데 좀 특이한 날은 있었습니다.”
“뭔데?”
“리체 아가씨가 여기 올 때부터 가져온 노트가 있었는데요. 에르안 님을 밤새워 간호하시던 날 빼곡하게 채워 오는 것 같더라고 요.”
아르가는 제니가 건넨 종이 뭉 치를 받아 들어 빠르게 읽기 시 작했다.
“혹시나 해서 제가 다 베껴 오 긴 했는데, 저는 무슨 말인지 하 나도 몰라서……. 하지만 그 외 에는 정말로 특이 사항이 없었습 니다.”
“아.”
제니가 베낀 기록을 재빠르게 보던 아르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조금이라도 위험할 수 있는 약초는 하나도 쓰지 않았고,그러면서도 온갖 치료법올 모두 시도 하고 있었다.
세심한 양 조절이 필요한 마력 주입과 그 양상까지 자세하고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다.
그 기록을 본 아르가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감시는 그만둬도 될 것 같군.”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진정성이 돋보이는 기록들이었다.
진심이 없다면 이렇게까지 희귀 하고 번거로운 처방까지 할 리가 없었다.
딱히 알아낸 것이 없어서, 그렇 게 밤새 온갖 방법을 시도해 가며 간호했는데도 보고하지 않았 던 것일까.
괜한 생색을 내지 않았다는 사 실까지 모두 마음에 들었다.
그는 목을 가다듬으며 거만하게 말했다.
“리체에게 케이크라도 좀 보내 줘. 고맙고, 무작정 의심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아르가는 제니가 이게 무슨 일이냐며 한껏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제니 는 난감한 얼굴로 머뭇거렸다.
페렐르만 자작은 고개를 모로 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만한 일이 있어서 그래. 딱히 개를 아낀다거나 하는 건 아냐.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어… 그게……”
“난 내 딸이 최우선이다. 개가 내 딸의 방을 쓰고 있더라도 특별히 잘해 줄 생각은 없어.”
“아뇨,자작님.”
제니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고요.”
“그럼?”
“사실은 어제 마님께서 엄청난 크기의 딸기 케이크를 보내셨어요.”
페렐르만 자작의 입이 벌어졌다.
“……뭐?”
그제야 그는 공작 부인이 그날 아침에 지나가듯 리체는 무엇을 좋아하느냐 물었던 것이 기억났
맨 첫날 얼핏 들었던 ‘달콤한 것’이라는 대답과 첫 오찬 때 아껴서 먹던 푸딩이 기억나 그 역시 가볍게 ‘단걸 좋아하는 것 같 더군요.’라고 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꽉 쥐 었다.
“밤중에 두통으로 한 번 부르셨다고 해요. 그때 처방이 마음에 드셨나 봐요.”
그 건이라면 리체가 쓴 의료 일지에서 얼핏 보았다.
적절한 처방과 수면까지 신경 쓴 후처리에 역시 야무지다고 생 각한 뒤 넘겼을 뿐이었다.
물론 마력을 집어넣는 건 아주 섬세한 작업인데 훌륭하다고 살짝 감탄하긴 했다.
“그래서 트레이를 가득 채운 3 단 케이크를……. 아마 아무리 단것을 좋아하셔도 오늘은 케이크가 당기지 않으실걸요.”
페렐르만 자작의 표정이 저절로 심각해졌다.
그 뒤에 이어지는 중얼거림 때 문에 제니는 살짝 놀랐다.
“……가르쳐 드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네?”
“제니.”
페렐르만 자작은 그 어느 때보 다 심각한 표정으로 외알 안경을 들어 올렸다.
“리체가 또 다른 걸,뭘 좋아하는지 알아 와.”
“그건 직접 하문하시면......”
“내가 물으면 오해할 것 아냐. 뭐, 자기를 마음에 들어 한다거나 아낀다거나 하는 그런 오해.”
“..............”
“몰래 알아 와. 케이크 쪼가리 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 분명 있을 테니.”
“음…… 네.”
“아.”
제니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가려는데 페렐르만 자작이 재빨리 그녀를 불렀다.
“주의할 것이 하나 더 있다.”
“말씀하세요.”
“절대로 마님께 먼저 알려 드리지 말고 보안을 유지해라.”
“..............”
제니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고개 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냥 예를 갖춘 뒤 조용히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