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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0화 (10/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0화

내가 계속해서 에르안의 곁을 지킨 그 밤 이후,그의 상태는 꽤나 좋아졌다.

완치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단 지속적으로 그를 괴롭히던 고열이 많이 호전된 것이다.

내가 열심히 기록해서 세심하게 약초 처방을 한 덕분이었다.

“……고마워.”

에르안은 내 방에 찾아와 목을 가다듬으며 직접 감사의 인사를 했다.

“많이 좋아졌어.”

“당연하죠. 누가 처방했는데.”

“……그날 피곤하지 않았어? 밤 새워 간호하고.”

“계속 약초 투입하고 마력 관찰하고…… 물수건 바꿔 드리고…… 악몽을 꾸시는 것 같으면 손잡아 드리고,마력이 날뛴다 싶으면 진정시키고……. 힘들긴 했죠.”

“그래도 덕분에 잘 잤어. 그렇 게 푹 잔 건 거의 처음이야.”

“숙면은 건강의 필요조건이죠. 어젯밤은 잘 주무셨어요?”

에르안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또…… 잘 자고 싶지만 네가 그렇게 힘든 건 싫어.”

나는 잘됐다 싶어 눈을 빛내며 냉큼 말했다.

“그렇게 안 해도 잘 주무실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뭔데?”

“제 말 다 들으실 거예요?”

“……어.”

“진짜죠?”

나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제 말,무조건 다 듣는 거예요.”

“……당분간은.”

그가 천천히 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당분간’이라는 조건이 걸렸지만,어쨌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씩 웃었다.

‘걸려들었다!’

이제 웨데릭의 말보다 내 말을 더 잘 듣도록 잘 훈련시켜야 했다.

“다 먹고 우선 나가요. 몸을 좀 움직이셔야 해요. 햇빛도 좀 보고.”

짧은 티타임을 얼른 끝내고, 나 는 에르안의 손목을 이끌었다.

오늘은 날씨도 좋고, 햇빛도 따 뜻했다.

“저기까지 달리기 시합하실래요?”

에르안의 지병도 지병이지만, 현재 면역력이 형편없는 수준이 었다.

그냥 보통 열세 살도 이렇 게 안 움직이고 안 먹으면 비실 비실할 수밖에 없었다.

“많이 안 움직이셔서 처음엔 힘 드실 거예요. 이것부터 먼저 드 시고……”

나는 에르안이 눈을 깜빡이는 사이 신체 능력을 좀 강화시켜 주는 약초를 먹였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누워서 지냈으니 당분간은 이런 처방이 있어야 가벼운 운동이라 도 가능할 것이다.

그래도 지난번 공놀이를 할 때 운동신경이 좋은 것 같았으니, 금방 재미를 붙이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간단한 것들은 내가 좀 시키고,체력이 좀 붙었다 싶으면 기사단에 넘기는 것이 내 계획이 었다.

어차피 훈련으로 몸을 만드는 데에는 기사들이 나보다 뛰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몸을 움직이는 것의 즐거움부터 학습시 켜야 했다.

달리기 시합은 미끼였고,그 다음은 내내 시키기만 했다.

“에르안 님! 달려요! 더!”

나는 아름드리나무 밑에 앉아 제니가 가져다준 레몬주스를 마시며 소리쳤다.

“한 바퀴 더요! 뛰는 모습이 너 무 멋있으니까요!”

대충 한 소리였는데,에르안이 나를 홀끗 보더니 더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열심히 달리게 했으니 식사량도 늘 것이다.

어쨌든 성장기에는 많이 움직이 고, 많이 먹고,많이 자는 것이 가장 좋았다.

“두 바퀴만 더 뛰고,저희 저녁 같이 먹어요!”

실컷 뛰고 숨을 고르는 그를 데려다가 저녁도 함께 먹었다.

“에르안 님,다 드셔야 해요.”

“.......하지만.”

“배고프시잖아요. 다 드세요. 얼른요.”

나는 균형 잡힌 식단을 잘 계산하며,여러 가지 성장에 좋은 영양소들로 가득 찬 음식들을 먹이 기 시작했다.

영 안 먹는 그를 위해서 스테이크도, 샐러드도, 해산물도,직접 잘라서 입에 넣어 주기까지 했다.

내가 포크를 내밀면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둣이 받아먹곤 했다.

웨데릭이 끊임없이 세뇌시킨 ‘먹으면 안 된다. 네 체형이 엉망이 되어 다들 너를 우습게 알 거다.’라는 잘못된 믿음을 어떻게 해서든 깨야 한다는 신념으로 나는 열세 살짜리 소공작에게 열심 히 포크를 들이밀었다.

‘보육원에서 동생들 돌보는 것 같네.’

입을 벌리는 그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 이상한 뿌듯함을 느꼈다.

“자, 이제 씻으시고 잠이 올 때 까지 책을 보시는 거예요. 제가 계속 곁에 있어 드릴게요.”

“책?”

“네, 여기 책 많잖아요.”

세르이어스 공작령에 대한 서비스 정신으로, 나는 후계자의 공부까지 봐 주기로 했다.

하인의 도움을 받아 씻고 나온 그는 실내복 차림으로 침대에 반 쯤 누웠다.

나는 그에게 가장 두꺼운 책을 쥐여 주며 나 역시 친자 검사 시약을 위해 약초책을 펼쳤다.

“보시다가 살짝 잠이 올 듯 말 듯할 때 말씀하세요.”

평소와 다르게 오늘 꽤 많이 움 직였으므로,당연히 지루한 책을 보면 잠이 올 것이다.

그러나 그건 내 착각이었고, 에 르안은 자정이 넘어가도록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안 되는데. 일찍 자야 쑥쑥 크 는데.’

살짝 당황한 나는 에르안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에르안 님,안 졸리세요?”

“책이 재밌어. 오랜만에 보니 까.”

“오랜만에요?”

“웨데릭 형이 읽지 말라고 할 때까지는 많이 읽었었거든.”

하여튼 웨데릭이 문제였다.

나는 부드럽게 제안했다.

“……그럼 책 덮고 그냥 주무실래요?”

“잠이 안 오는걸.”

“일단 누워 보세요.”

조명을 어둡게 한 뒤에,나는 그의 침대 머리맡에 앉아 공작 부인에게 한 것처럼 희고 작은 손을 가만히 잡았다.

에르안은 흠칫 놀라더니 씩 웃으며 내 손을 마주 잡았다.

두통이 없으므로 굳이 마력을 집어넣을 필요는 없었지만,그래 도 뭐라도 하는 척을 해야 했다.

“눈감고 이대로 계시면 잠이 올 거예요.”

“불편하지 않아, 리체? 그렇게 앉아 있으면?”

“네? 괜찮은데요.”

“여기 넓은데,같이 누워 있을 래? 너도 피곤할 것 아냐.”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열세 살이 순수한 마음으로 제 안했다고 해도,나는 도저히 남자의 침대에 나란히 눕는 것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괜찮아요, 에르안 님. 그냥 조 용히 눈 감고 가만히 잠드시면 돼요. 저는 에르안 님 잠드는 걸 보고 갈게요.”

나는 그의 긴 속눈썹과 붉은 입 술, 높게 뻗은 콧날 등을 천천히 보며 그를 도닥거렸다.

잠드는 걸 보고 가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는데 조명이 어두워 지자 내가 깜빡깜빡 잠이 왔다.

생각해 보니 어제도 잘 못 자고 오늘도 새벽부터 연구하느라,나 역시 잠이 부족했다.

나는 내가 졸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한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

[리체]

에르안의 침대였다.

‘분명히 나는 침대에 같이 눕지 않겠다고 했는데……’

어느새 내 손을 에르안이 부드럽게 움켜쥐고 있었다.

‘어,그런데 손이 왜 이렇게 크지?’

눈을 들어 에르안을 본 나는 숨 을 삼켰다.

열셋의 꼬마가 아니라,깜짝 놀 랄 정도로 단단한 몸을 가진 몸집 큰 청년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꿈? 꿈인가 봐……’

꿈인 걸 자각하면서도 나는 너 무 놀라 아무런 말도 못했다.

내가 회귀 전에 본 에르안의 비 쩍 마른 모습과는 전혀 달랐지만, 수려한 이목구비와 새까만 눈동자는 분명히 에르안의 것이 었다.

“너는 거짓말 같은 거 안 한다 며.”

퇴폐적이고 서늘한 분위기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내 위로 올라와 있는 그의 존재 감이 너무 커서 숨이 막혔다.

누가 봐도 숨이 멎을 만한 외모 에 어딘가 위압감이 느껴지는 남자였다.

[네가 내 주변 사람 중 가장 영리하고 올곧고…… 나를 유일하게 위하는 사람이라고.]

어……. 분명 내가 그렇게 말하 기는 했다.

눈을 깜빡이며 아무 말도 못하 고 있자, 그가 뚫어지게 나를 바 라보았다.

[내가 봐도 네 말은 항상 옳았어.]

어느새 다리가 얽혀 있었고, 그 가 유혹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런데 내가 너를 놓을 수 있 겠어? 바보도 아니고 말이야. ]

그의 숨결마저도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나는 이상하게 꼼짝할 수가 없 이 그의 긴 속눈썹을 바라보기만 했다.

난생처음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기 전에도 안 그랬는데.

내가 떨리는 입술로 뭐라고 말 하려는 찰나, 문득 눈이 떠졌다.

***

“아.”

마찬가지로 에르안의 방이었다.

나는 열세 살이었고,마찬가지 로 열셋의 에르안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개꿈인가 봐……”

슬슬 내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에르안과 잡고 있던 손을 놓으려 는데,자면서도 어찌나 손아귀 힘이 센지 잘 놓아지지 않았다.

혼자서 끙끙대며 씨름하다가 간 신히 손을 빼낸 나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서 흐릿했던 꿈을 어느 새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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