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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9화 (9/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9화

다음 날,제니가 조심스럽게 노 크를 하고 들어왔다.

“저기, 아가씨.”

책을 보고 있던 내가 고개를 들자 그녀가 약간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

“마님께서 선물을 보내셨어요.”

“선물?”

“네…… 아가씨께서 단것을 좋 아하신다고 하셨다면서요.”

나는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었다.

‘아니다.’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니, 맨 첫날 페렐르만 자작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분명 공작 부인이 페렐르만 자작에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물어 본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딸기 케이크를 보내셨어요.”

“아, 그래요? 네,잘 먹겠습니다.”

“그런데 크기가……”

나는 제니가 조심스럽게 밀고 들어오는 트레이를 보고 기절초 풍할 뻔했다.

살면서 그토록 큰 케이크는 본 적이 없었다.

보육원에 갖다 줘도 모두가 한 조각씩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케이크 위 에 있던 짧은 메모를 펼쳤다.

[덕분에 푹 잘 수 있어서 오늘 아침이 매우 상쾌했다.

단것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좋 은 오후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약소한 선물을 보낸다.

황궁 수석 디저트 요리사를 섭외하려고 하니 조금만 기다리렴.]

약소한 선물이라니, 황궁 수석 디저트 요리사라니!

아무리 세르이어스 영지가 풍족한 시기라고 해도 가히 충격적인 스케일이었다.

나는 난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석 달 열흘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입맛에 안 맞으시면 바로 주방 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주방장을 자르신다고.”

“아, 아니에요.”

오래 겪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공작 부인은 묘하게 극단적이었다.

어쨌든 이건 혼자 다 못 먹었다.

심지어 며칠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나는 손백을 치며 불현듯 말했다.

“그럼 에르안 님과 함께 먹어도 될까요? 지나치게 양이 많으니까 말이에요.”

분명히 방 안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것이다.

‘원래 누워 있으면 누워 있을수 록 기운이 빠지고 몸이 축 늘어지는 법인데……’

빨리 친해진 다음 이것저것 시켜야지.

신분상 차이가 나니 어쩔 수 없이 내가 먼저 꼬리를 흔들어야 했다.

***

“어머니가 케이크를 보내셨다고?”

에르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에르안에게 케이크를 한 조각 주고 나는 세 조각을 먹으며 말했다.

“어제 잠을 잘 못 주무시기에 좀 도와드렸거든요.”

“어떻게?”

“왜요?”

“……나도 밤에 잠이 잘 안 와.”

“그건 많이 안 움직이시고 햇빛을 안 보셔서 그런 거예요.”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에르안 님의 두통은 마님의 두통과 좀 달라요.”

“하지만..”

“잠이 안 오신다면,오늘 밤 제 가 잘 주무시게 해 드릴까요?”

에르안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넌 정말 대단하구나.”

“네?”

“어제 그랬잖아. 어머니께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아, 대단한 건 아니고요.”

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냥 저는 거짓말을 안 한다는, 뭐 그런 큰 맥락에서 봐 주시면 돼요.”

“그럼 좋아.”

에르안이 케이크의 마지막 조각을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을 들을게. 오늘 밤 잘 자도록 해 줘.”

“그럴까요? 잠시만 손 좀……”

손을 잡는 건 개인의 마력을 확인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무심코 그의 손을 잡은 나는 깜짝 놀랐다.

“에,에르안 님?”

나는 벌떡 일어나 그의 이마를 짚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 고, 케이크를 먹기에 멀쩡한 상 태인 줄 알았다.

“머리 아프지 않으세요? 아니, 이렇게 열이 오르는데 왜 말씀을 안 하셨어요!”

나름 남의 안색을 보기만 해도 아픈지 안 아픈지는 알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눈치채지 못 했다.

에르안은 조용히 내 시선을 피했다.

“설마,제가 귀찮아할까 봐…… 요? 다른 조수들처럼?”

“낯선 사람에게 유약한 모습을 쉽게 보이면 안 된댔어,어머니 께서.”

“하지만 공자님은 아프고 어리시잖아요.”

나는 재빠르게 그를 일으켜서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복도를 지나가던 하녀에 게 해열제와 온갖 약초,노트와 펜을 가져오라고 급하게 부탁했다.

침대에 누운 채로 에르안이 조용히 물었다.

“……내가 왜 아픈지 알아?”

“솔직히 말씀드리면, 잘 모르겠어요.”

열심히 진단을 해 보았지만 이 렇다 할 병명을 찾을 수 없었다.

하기야, 쉬운 지병이라면 페렐르만 자작이 이미 알아챘을 것이다.

나는 30분마다 한 번씩 그의 마력 흐름과 다양하게 처방한 약초의 효과를 꼼꼼하게 기록했다.

침대에 누워 약을 먹으니 긴장이 풀렸는지,그의 얼굴에 비로소 숨겼던 병색이 드러나기 시작 했다.

이 상태로는 당연히 저녁 식사를 할 수도 없을 것이 뻔했다.

나는 열꽃이 오르기 시작한 그 의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을 몇 번이나 갈아 주었다.

“……가 봐. 이 정도 아픈 건 괜찮아. 곧 좋아질 테니까.”

그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 말했다. 이 정도의 증상을 숨기는 것이 익숙한 듯했다.

“좋아지는 게 아니라,익숙해지 는 거예요. 그리고 질병이 익숙해지면 몸은 점점 더 나빠져요.”

나는 물수건을 빠느라 차가워진 손을 그의 볼에 대 주면서 말했다.

“일단 주무세요. 그리고 이 정도 아픈 건 괜찮은 게 아니에 요.”

“어차피…… 못 고칠 거 아냐.”

“그래도 당장은 좀 괜찮아지실 거예요.”

“계속해서 이렇게 아플 거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최선을 다하면 조금이라도 나 아져요.”

나는 그의 가날픈 팔목을 쥐고 수액을 주사해 주었다.

“천재인 제가 최선을 다했는데 완치되시지 않을 리 없어요.”

“..............”

“제가 꼭 그렇게 만들 거예요. 믿어 주세요.”

“대체 왜?”

“에르안 님을 걱정하고 있으니 까요. 참된 의사의 자질이죠.”

나는 씩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수액에 수면제의 효과가 있어서 그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일단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마력을 잠재우면 그의 몸도 훨씬 더 편안해질 것이다.

***

에르안이 눈을 떴을 때에는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케이크를 가져온 리체와 티타임을 했던 것이 오후이니까, 거의 열두 시간을 넘게 잔 것이었다.

만성적으로 그를 괴롭히고 있던 두통이 사라지고 머리가 말끔했다.

그는 원래 성에 드나드는 사용인에게 별달리 의미를 두지 않았다.

특히 페렐르만 자작의 조수라면 워낙에 많이 그만두니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그의 열을 잰다거나 페렐르만 자작의 심부름으로 약을 전달하거나 할 때 자주 아픈 그를 귀찮 아하는 것이 종종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그는 조 수를 부르는 벨도 누르지 않고 혼자 고통을 감수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완전히 낫지도 않을 텐 데,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치부를 보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공작 부인은 영지를 다스리는 데 바빠서 그를 엄하게 키웠고, 따라서 그는 어리광을 부리는 것 보다는 경계하는 것이 익숙했다.

당연히 이번에 들어온 어린 조 수에게도 별 기대가 없었는데….

공놀이를 같이 하자며 다가왔을 때, 또래라서 반가웠다.

하지만 너무 정을 주어서 떠날 때 슬프면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작은 동갑내기 소녀 가 그 까다로운 페렐르만 자작의 인정을 받고,철옹성 같은 어머 니의 마음도 얻어 내고…….

리체가 케이크를 들고 찾아왔을 때 그는 솔직히 반가웠다.

그래서 더더욱 아픈 것을 티 내고 싶 지 않았다.

그런데 리체는 단박에 그의 상 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곧바로 이런저런 처치를 하기 시 작했다.

에르안은 자신의 머리맡에서 엎드려 자고 있는 리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마에 얹힌 물수건이 여전히 차가웠다.

밤새 자신의 옆에서 간호를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 어떤 조수도 ‘어차피 낫지 않을 병’을 위해 이렇게 밤새 그 의 곁을 지키지 않았다.

페렐르만 자작이 처방해 준 약을 투여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라며 쌩하니 나가 버리기에 바빴다.

에르안의 시선이 리체의 옆에 있는 노트로 향했다.

30분마다 변하는 그의 상태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약초 에 반응하는 마력의 변화까지도 아주 세심하게.

“최선을 다하면 조금이라도 나 아져요.”

자신을 조금이라도 낫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그녀의 말은 사실인 듯했다.

에르안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새로 온 이 작은 조수 에게 벌써 조금은 정을 줘 버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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