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8화
“그럼 물러나겠습니다.”
공작 부인은 어쨌든 영지 관리에 바빴고,우리는 빠르게 비켜 줘야 했다.
그녀는 페렐르만 자작을 말리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인사에 대꾸를 하지 않는 것으로 못마땅함을 표시했다.
나와 페렐르만 자작, 에르안은 결국 같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페렐르만 자작은 공작 부인의 방을 나오자마자 에르안에게 건성으로 인사한 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에르안과 나는 함께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내가 그에게 인사하고 방에 들어가려는데,에르안이 나를 올려 다보며 씩 웃었다.
“페렐로만 자작님이 널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건 사실이구나.”
“그럼요.”
열아흡 때 멀리서 에르안을 볼 때엔 조금도 멋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열셋의 에르안은 보면 볼수록 이상하게 귀엽고 오밀조밀하게 잘생긴 것 같았다.
공작 부인을 닮아서 길게 휘어진 눈매라든가 짙은 눈썹, 새까 만 머리카락과 흰 얼굴이 상당히 인상적 이었다.
“말했잖아요. 전 거짓말 안 한 다고.”
나는 방에 들어가며 나도 모르게 에르안의 머리카락을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아까 제니에게 들었는데, 에르안 님과 마님의 방에 제 방으로 연결되는 벨을 설치해 두었대요. 혹시 어딘가 불편하시면 꼭 벨을 누르세요. 제가 바로 갈게요.”
“알았어.”
그가 살짝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는 의심이 많으셔. 원래 좀 냉랭하시고. 나한테도 그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예민해지 시기도 했으니까, 기분이 상했더라도 이해해.”
“의심이 많은 게 적은 것보다 낫죠. 기분 상하지 않았어요.”
실제로 나는 별다른 일이 아니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태연히 대답했다.
“결국 제 훌륭한 실력을 보시고 저를 인정하시게 될 테니까요.”
에르안이 새까만 눈으로 나를 뻔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 네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맞겠지. 지켜볼게.”
웨데릭과 함께 있을 땐 마냥 철 안 든 아기 같더니, 말하는 게 생각보다 위엄이 있었다.
턱을 치켜든 뒤 당당하게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는 에르안의 뒷 모습올 보면서 나는 살짝 웃었다.
“에르안 님, 오늘 저녁도 남기 지 말고 다 드셔야 해요! 약속이에요! 절대,남들이 우습게 안 본 다니까요. 절 믿으세요! 약속!”
에르안이 뒤를 돌아 살짝 고개 를 끄덕여서 나는 흡족하게 웃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잘 키우고 싶었다.
***
방에 들어온 나는 곰곰이 생각 에 잠겼다.
페렐르만 자작이 나를 조수로 맞아들이고, 3일 만에 진료의 전권을 준다는 것만으로도 파격적 인 대우였다.
하지만 연구실을 자유롭게 출입 하도록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래도 아까의 대화로 인해 자 작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을 알아냈다.
‘친자 확인 검사. 그걸 개발해 봐야겠어.’
지금 이 시점에 친자 확인을 하 려면 거의 10개의 검사를 진행해 야 한다.
게다가 각각의 검사는 상당히 까다롭고 굉장히 오래 걸 린다.
하지만 나는 6년 후에 새로운 친자 검사 방법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 봤자 10개의 검사를 7개로 줄여 주어 사흘 정도 빨라지는 것이지만,그래도 그게 어딘가.
‘아마도…… 에프론 풀하고 시리카 뿌리를 조합했던 것 같은 데.’
나도 신문 기사로만 읽고 직접 재현해 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몇 번만 실험해 보면 재현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열흘 안에 만들어서 결과를 내 주면 연구실도 쓰게 해 주지 않을까. 더 빠른 검사 방법을 찾아준다고 하면.’
나는 제니에게 에프론 풀과 시리카 뿌리, 간단한 실험 기구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리고 오후 내내 틀어박혀서 연구를 시작했다.
적절한 배합만 잘 찾아내면 되 는 간단한 일이었지만,당연히 몇 번의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무조건 열흘 안에 알아내야 한 다는 생각에 나는 저녁도 대충 빵으로 때우면서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는 사이, 노을도 저물고 달도 기울었다.
“거의 다…… 알 것 같은데.”
공작성 전체가 어둠에 물든 밤.
여전히 시리카 뿌리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침대 머리맡에 있는 벨이 울렸다.
마법 아이템을 담당하는 하녀 말로는 벨이 초록색으로 울리면 페렐르만 자작의 호출이라고 했 고,푸른색으로 울리면 에르안의 호출이라고 했다.
‘그리고 붉은색으로 울리면 공작 부인의 호출이라고 했지.’
나는 연구를 멈추고 긴장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밸의 색깔은 붉은색이었다.
‘마님께서? 한밤중에?’
싸늘한 공작 부인의 얼굴이 떠 올랐다.
딱히 이 오밤중에 둘이 마주하고 싶은 상대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당장 달려가야 할 때였다.
***
“머리가 아프구나.”
공작 부인은 파리한 얼굴로 이 마를 짚으며 말했다.
그녀는 별달리 신경 쓸 것이 아 니라는 표정으로 내뱉듯 말했다.
“진통제를 좀 주렴.”
“평소처럼 오른쪽 편두통이세요? 아니면 쿡쿡 쑤시는 증상이 신가요?”
공작 부인이 나를 뻔히 바라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쑥했다.
“진료 일지에 다 나와 있어요. 그리고 중상은 자세히 말씀해 주실수록 좋아요.”
내 대답에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쿡쿡 쑤신단다.”
“네.”
나는 준비해 온 두 가지 약 중 하나를 내밀었고, 공작 부인은 단숨에 마시고는 다시 누웠다.
약병을 받아 든 나는 침대 옆 머리맡에 앉아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공작 부인은 의아하다는 눈빛으 로 나를 바라보았다.
“안 가니?”
“잠드실 때까지 있어 드릴게요.”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살짝 웃었다.
“그리고 두통이 있을 때 이렇게 직접 마력을 주입하면 약간의 수면제 효과가 있거든요.”
“..............”
“페렐르만 자작님은 아마 남자라서 이런 처방까지는 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공작 부인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손을 놓지는 않았다.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의 눈이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넌 내가 안 무섭니?”
“네.”
영지민들이 와서 판결을 바라거나 사용인들이 잘못을 하였을 때 그녀는 항상 ‘과하다’ 싶은 처분을 내렸다.
게다가 항상 싸늘한 얼굴이니 다들 슬슬 피하곤 했다.
하지만...
“저는 제 할 일을 잘할 자신이 있는데, 왜 마님을 무서워하겠어요?”
내가 무서워할 이유는 없지.
“..............”
“결국엔 믿고 맡겨 주시게 될거예요.”
나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쓰 다듬어 주었다.
의사는 마법사가 아니어서 직접 마법을 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뛰어난 의사라면 사람 몸에 흐르는 마력의 흐름을 진단하거나 조종할 수 있었다.
특히 마력을 집어넣는다는 건 아주 세심하게 다루어야 하는 일 이었다.
정말로 실력이 있는 의사가 아니라면 할 수 없었다.
‘예를 들면 나 같은.’
살짝 잠에 취한 목소리로 공작 부인이 중얼거렸다.
“오랜만이구나.”
“……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잠든다는 것 말이야.”
나는 그녀에게 따뜻한 마력을 주입하면서 낮게 대답했다.
“저는 처음이에요.”
“뭐가?”
“누군가의 방에서 그 사람의 손 을 잡고 잠드는 것을 기다리는거요.”
“..............”
“전 보육원에서 자라서요.”
회귀 전, 본격적으로 의원에서 일하며 의료 지식을 쌓았을 때도 누군가의 집에 출장 진료를 간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완전히 누군가 가 잠드는 모습을 기다리는 건 처음이었다.
보육원에서는 모두 모여서 자기 도 했고,모두 다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나면 지쳐 쓰러지기 일쑤였다.
당연히 부모님이 궁금했지만, 누군지 몰라도 똑똑한 사람들이 라고 생각했다.
안 그러면 내가 이렇게 영리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 똑똑한 사람들이 왜 나를 잃어버렸을까.’
잃어버린 건 맞는지, 나를 두고 요절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부모님이 없어도 잘 살 수 있겠 지만,당연히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번 생에는 제발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어차피 잘 자랄 거니까, 사정이 어찌 되었든 살아만 있다면 원망 하지 않고 잘해 줄 수 있는데.
그마저도 실패한다면 새롭게 가 족을 만들어서라도 나 스스로 좋 은 부모가 되어 줄 생각이었다.
“리체.”
공작 부인이 살짝 잠에 취한 목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는 건 처 음이었기에 조금 놀랐다.
아까 오후에, 그녀는 자신의 아들인 에르안에게조차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네?”
“부모님의 얼굴조차 모르니?”
“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도 가족이 있으면 좋겠어요.”
다시 침묵이 흐르고, 공작 부인이 속삭이듯 웅얼거렸다.
확실히 잠이 들고 있는 목소리였다.
“고맙다. 잠이 오는구나.”
“당연하죠. 수면 효과가 있는 처방이니까.”
“……아주 오랜만에.”
그 말을 끝으로 공작 부인은 고개를 완전히 떨어뜨렸다.
어느새 그녀가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아마 내일 일어나면 머 리가 아주 맑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