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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7화 (7/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7화

다음날 아침,페렐르만 자작이 진료 일지를 건넸다.

“오후에 마님과 에르안 공자님 께 인사를 드리러 갈 건데, 그전 까지 다 읽고 숙지해 놓도록 해.”

책상 위에 잔뜩 쌓인 진료 일지 를 보며 제니가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자작님…… 이 많은 양을…… 애초에 어제 주시지 그러 셨어요.”

“아니에요.”

나는 유유히 말했다.

“충분히 가능해요.”

자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 고 그대로 나가 버렸다.

제니가 예쁜 옷을 골라 입혀 주고 머리카락을 손질해 줄 동안 나는 진료 일지를 찬찬히 보기 시작했다.

“너무하시네요.”

제니는 한숨을 쉬었다.

“온 지 3일 된 조수에게 이렇게 진료 일지를 외우라고 하신 적은 없으셨는데.”

“당연한 거예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언제 나갈지 모르는 조수한테 공작가의 개인 정보를 마구 넘길 수는 없는 거니까.”

“그럼 아가씨께는 왜……”

“전 계속 여기 있을 거거든요. 적어도 6년? 자작님께서도 그 사실을 눈치채신 모양이죠,뭐.”

구체적인 숫자까지 말한 나는 태연하게 다음 진료 일지를 읽기 시작했다.

공작 부인의 경우 만성 두통과 간헐적인 복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증상만 보면 스트레스성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페렐르만 자작은 아주 적절한 처방을 내렸다.

확실히 훌륭한 의사는 훌륭한 의사였다.

내가 회귀 전에 만난 의사들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그런데 왜 6년 후에 급사하지? 처방은 정말 적절한데……”

물론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에르안이었다.

원인 불명의 복통, 두통, 치통에 가끔 발작과 함께 고열이 찾아온다고 했다.

물론 그때마다 페렐르만 자작은 에르안을 훌륭하게 살려 내긴 했 지만,원인을 모르니 다 일시적인 방편일 뿐이었다.

‘페렐르만 자작은 딸에 정신이 팔려서 매일같이 에르안에게 붙어 있지 못해. 내가 붙어서 자세히 살펴보면 원인을 알 수 있을 지도 모르지.’

나의 무조건적인 목표였다.

‘그러면 치료법을 어떻게 해서 든 개발할 수 있을 거야. 6년이 라는 시간이 있으니까 충분해.’

그러려면 내가 연구를 좀 해야 했고, 연구에 필요한 약초 등을 원활하게 받으려면 페렐르만 자 작의 지원이 필요했다.

미래를 안다고 하면 미친 애 취 급을 받으며 쫓겨날 게 뻔했다.

‘페렐르만 자작의 연구실을 마 음껏 쓸 수 있어야 해. 적어도 자작이 외출 시에는 말이야.’

어차피 내 능력을 인정받으면,딸을 찾으러 한동안 떠날 사람이다.

그러면 그 시기에 온갖 약초 와 고급 실험 기구가 다 있을 그 연구실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게 두 번째 목표지. 연구실 출입 가능하게 하기.’

진료 일지를 모두 본 나는 마지 막 장을 덮으며 결의에 불탔다.

***

“새로 온 조수입니다.”

페렐르만 자작은 별다른 예도 갖추지 않고 성의 없게 나를 소개했다.

나는 제니가 공들여 꾸며 놓은 보람이 있도록 예의 바르게 치맛 자락을 잡고 인사했다.

“리체 에스텔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의외군요.”

공작 부인,이사벨 세실리아 세르이어스는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하지만 30대 후반의 나이보다는 훨씬 어려 보였고, 매끈한 은발 에 새까만 검은 눈을 가진 미인 이었다.

이상하게 눈매가 서늘한 것이 에르안과 꽤 닮아 있었다.

페렐르만 자작의 무뚝뚝한 말을 그다지 지적하지는 않았으나,워낙에 냉랭하다고 알려진 성격답게 표정이 거의 없었다.

“3일 만에 새로운 조수를 소개 하다니요. 보통 소개시키기도 전 에 거의 다 그만두도록 하지 않 았나요?”

공작 부인이 나를 날카롭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상당히 어려 보이는데.”

“열셋입니다.”

페렐르만 자작이 대수롭지 않게 차를 마시며 대답했다.

“그리고 나이와 지능은 무조건 비례하는 게 아닙니다. 전 열셋 때 지금의 의학 지식을 거의 다 완성했거든요.”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칼에 베일 것 같은 시선이었지 만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저도 그래요.”

공작 부인의 옆에 앉아 있던 에 르안이 나를 보며 살짝 웃었다.

나는 늘 사실만 말하는데 제니도 에르안도 왜 피식피식 웃는지 알 수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공작 부인의 시선에서 영 못 미덥다는 기색이 묻어났다.

물론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 니었다. 페렐르만 자작도, 에르안도,제니마저도 날 처음 봤을 때 다 저런 눈빛이었으니까.

‘‘뭐.”

공작 부인은 눈을 내리깔았다.

“조수야 전적으로 주치의의 소관이니까요. 어련히 잘하셨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뭐든 잘하죠.”

“조수를 자르는 것도요.”

“멍청함에 대한 인내심은 좀 없 는 편이라서.”

나는 그 말이 이해가 되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페렐르만 자작이 무표정으로 화제를 돌렸다.

“근래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딱히 없어요. 그냥 매일같이 두통이 좀 있고, 우유를 마시면 복통이 생기고.”

“리체.”

페렐르만 자작이 바로 내 이름을 불렀다.

“어떻게 처방하면 되겠나.”

나는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평상시에 자작님께서 처방하시는 대로 오이시스 풀과 대론 뿌 리를 달여서 약으로 드리면 될 것 같습니다. 유제품을 최대한 피하고,피치 못할 경우에는 제 크론의 꽃잎을 추가 처방하면 되 지 않을까요?”

“그래도 두통이 멈추지 않으면.”

“에스타 케렐로니 요법을 씁니다.”

페렐르만 자작은 고개를 끄덕이 고 나서 에르안을 바라보았다.

“공자님은 불편하신 데 없으시고요?”

“예.”

“식사량과 운동은 잘 조절하고 계십니까?”

“예.”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둘 다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페렐르만 자작에게 거짓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된 듯했다.

“리체, 만일 공자님이 갑자기 쓰러지시면 어떻게 할 거지?”

“증상에 따라 다르겠지만,‘제벨론 의술서’에 있는 기본 방침을 따르고 자작님께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원인 불명이니까요.”

“그래.”

진료 일지를 보고 나서 느낀 건 데,나와 페렐르만 자작의 처방은 거의 유사했다.

아마 같은 질병에 대해 같은 소 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페렐르만 자작은 아주 살짝 입 꼬리를 올렸을 뿐이지만, 3일간 그를 본 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는 내 대답이 상당히 마음에 드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부터 당분간 리체가 진료를 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혹 시 몸이 불편하시면 리체에게 연 락하세요.”

“뭐라고요?”

공작 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3일 된,열세 살짜리 조수에게 공작가의 진료를 맡긴다고요?”

그녀의 어조에서 날카로움이 묻 어났다.

“확신이 들 때까지 제가 지켜볼 겁니다. 그리고 충분히 신뢰가 쌓이면……”

페렐르만 자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이르비아 지역에 다녀올까 합니다.”

이르비아는 배를 타고 꽤 먼 바다를 건너야 하는 남부 지역이었다.

공작 부인이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을 봐서 그의 딸을 찾으러 가 는 듯했다.

애초에 그게 계약 조건이었다고 하니까.

“계속 지켜보았는데 아무래도 못 미더우시면 말씀하십시오. 제 가 더 머물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공작 부인은 어쩔 수 없이 고개 를 끄덕였다.

“친자 확인을 위해서라면 직접 가야 하니까,사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절대 나를 못 믿겠다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당황스럽기 그지없군요. 솔직히 아무리 주치의로 전권을 맡겼다고 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입니다.”

그 말에 나는 눈을 깜빡이며 대 답했다.

“걱정되시는 바는 충분히 이해 하지만,일단 당분간만 믿어 주세요.”

아무리 공작 부인이 냉랭해도 별달리 걱정은 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실력으로 공작 부인에게 신뢰를 잃을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저는 정말 뛰어나거든요.”

“……하.”

공작 부인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다는 둣이 한숨을 쉬었다.

나는 정말 맞는 말만 하지 만… 어차피 믿음은 내가 실력으로 쌓아야 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설득하는 대신 나는 다른 계획을 속으로 세웠다.

‘페렐르만 자작이 곧 이르비아 로 딸을 찾으러 갈 계획이구나.’

이르비아는 꽤 멀고, 거기서 친자 검사를 하는 데에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그 안에 연구실 허가만 받아 놓 으면 실컷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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