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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6화 (6/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6화

“이르비아 지역의 정보입니다, 자작님.”

아르가는 자신의 최측근인 디엘이 내민 보고서를 받아 들었다.

디엘은 이제 열여덟이었지만, 워낙에 총명한 소년으로 그가 가장 믿는 수족이었다.

분홍색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디엘은 선량하고 곱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일을 시키면 뭐든지 야무지게 잘해냈다.

전달 받은 보고서에는 열세 살이 된 금발 머리에 초록색 눈을 가진 여자 아이들의 목록이 빼곡 하게 적혀 있었다.

“입양되었거나 보육원에 등록된 적이 있는 이름은 붉은색으로 표 시해 두었습니다.”

“수고했다.”

“이번에도 직접 가시려고요?”

“그래야지.”

아르가는 지친 눈을 비비며 단호하게 말했다.

“친자 검사에는 내가 꼭 필요하 니까.”

아르가의 상단은 온 대륙을 돌 아다니며 올해 열세 살이 된,친모를 쏙 빼닮은 금발에 녹안인 여자아이들을 모두 다 직접 뒤지고 있었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딸이었으나 어쨌든 그를 닮거나 친모를 닮은 구석이 하나라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모로 의심이 되는 아이가 발견되면 그는 즉시 친자 검사에 돌입했다.

친자 검사는 여러 가지 반응을 봐야 하므로 기간이 상당히 오래 걸렸다.

이렇게 마구잡이로,아무런 단 서 없이 무작정 딸을 찾느라 시 간을 소모할 만큼 그는 하나뿐인 딸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디엘이 살짝 망설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금발에 녹안은 확실한 정보인지……”

“이시더 남작이 분명 그렇게 말 했다.”

아르가는 보고서의 이름을 하나 하나 읽으며 말했다.

“제 어미를 쏙 빼닮은 금발 머리에 나뭇잎 같은 초록색 눈이었다고.”

시오니 나니아 라베리.

아르가의 부인이었던 그녀는 임 신 7개월 차에 어머니의 생신 연회에 참석하겠다며 혼자 나들이 를 나섰다.

그때 아르가는 황실의 중요한 의학 연구에 투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열흘의 차이를 두고 뒤따를 예정이었다.

그의 백작 위가 달려 있던 연구라 시오니는 부득불 걱정스러워 하는 그를 두고 생신 연회에 늦을 순 없다며 먼저 집을 나섰다.

아르가는 직접 진료하여 복중 태아가 건강한 딸이며,조산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까지 몇 번이고 확인한 후에야 그녀를 먼저 보내 주었다.

시오니의 친정은 라베리섬으로, 아름답고 한적하며 그림 같은 곳 이었지만 수도에서 굉장히 멀었다.

하지만 그곳에 가기 위해 이시더 남작 영지의 항구에 들른 시오니는 조산을 하고 말았다.

다행히 이시더 남작은 의사는 아니지만 의학적 지식이 풍부하여 아이를 잘 받아 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 몸을 푼 시오니는 남의 영지에서 민폐를 오래 끼칠 수 없다며,갓난아이 를 데리고 섬으로 가는 배를 탔다.

그리고 그들은 그대로 사라졌다. 말 그대로 실종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이시더 남작에게 들은 시오니와 딸의 행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대륙의 아주 외진 의외의 곳에서 시오니의 시체가 발견됐다.

그러나 주변에 갓난아이의 시체는 없었다.

결국 반쯤 미쳐 버린 페렐르만 자작은 연구고 백작 위고 다 때려쳤다.

생사도 불분명한 하나뿐인 딸을 찾겠다고 대륙을 쥐 잡듯이 뒤지기 시작한 건 그 직후부터였다.

그렇게 13년이 흐른 것이었다.

“이시더 남작은 세르이어스 공작 부인의 친동생이지. 게다가 내 딸을 직접 받아 주기까지 했 어.”

아르가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조산 가능성이 없다는 오진마저 하고 말았는데.”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그 말을 할 때마다 아르가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런 중요한 정보를 잘못 알려 줄 리가 없다.”

디엘은 어쩔 수 없이 천천히 고 개를 끄덕이고 화제를 바꿨다.

“조수를 새로 받으셨다면서요.”

“뭐, 새삼.”

아르가가 어깨를 으쓱했다.

“매일 바뀌는 게 조수인데.”

“이번엔 그래도…… 따님 방을 주셨다고.”

디엘의 말에 아르가가 피식 웃었다.

그 맹랑한 조수에게 딸의 방을 준 것은 다소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의학적 지식도 놀랄 정도지만, 열세 살짜리가 자신이 천재라며 당당한 것도 꼭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았다.

비록 갈색 머리였지만, 반짝반짝한 녹색 눈이 시오니를 닮은 것 같기도 해서 낡은 옷차림이 살짝 신경 쓰였다.

어차피 때가 되면 또 버릴 옷이다.

이 아이에게 주어야겠다 생각하 다가 그 방까지 쓰게 한 것이었다.

“꽤 똑똑하고 야무져 보였거든. 오래 부려 먹고 싶어서 그래.”

아르가가 차마 자신의 어릴 적 을 보는 것 같다는 말은 못 하고,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여기서 편히 지내야 다른 데 가겠다는 소리를 못 하지.”

“다른 데요?”

“그 정도 지식이면 당장 의원을 열어도 이상하지 않아. 잘 가르쳐서 여기 오래 있게 하면, 내가 내 딸을 찾아다닐 수 있는 시간이 늘겠지.”

“처음인데요. 조수가 마음에 드 신 적은 없으셨잖아요?”

아르가가 도끼눈을 떴다.

“딱히 마음에 든 애는 아냐.”

“뭐…… 그렇겠죠.”

디엘이 떨떠름하게 턱을 긁었다.

***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정원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올라가 이시더 남작과 웨데릭이 떠나는 모습 을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그들은 사흘간 머물고 이제 떠나려던 참이었다.

그래서 페텔르만 자작이 공작 부인과 에르안에게는 내일 인사를 드리자고 한 것이었다.

‘둘 다 반란군이었지. 에르안이 죽자마자 홀랑 세르이어스 공작 령을 차지한 게 다 계획적인 걸 거야.’

에르안이 떠나는 주인을 바라보는 개처럼 시무룩한 표정으로 마 차의 뒤꽁무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복장이 터져 왔다.

내가 에르안과 대화를 나누며 느낀 것은 웨데릭에 대한 심리적 의존도가 지나치게 크다는 점이었다.

그러다 보니 페렐르만 자작과 웨데릭이 정반대의 말을 할 때 그는 웨데릭의 말만 따랐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지.’

나는 동네 의원에서 있었던 경험으로 어린 환자와의 친밀한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랑 더 친하게 만들어야지. 그래서 내 말을 더 믿도록 해야 돼.’

문제는 웨데릭과 에르안이 지냈던 7년의 세월을 내가 어떻게 이기느냐였다.

하지만 내게는 아주 유리한 조건이 있었다.

웨데릭은 주기적으 로 찾아오는 손님이었지만,나는 공작성에 살고 있다는 것!

‘그것도 같은 층!’

게다가 웨데릭은 에르안과 네 살 차이가 나지만 우리는 동갑!

나는 에르안이 축 처져서 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지켜본 뒤 재빨리 나무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시간을 잘 맞추어,내 방에 들어가려던 찰나 복도에서 아주 ‘우연히’ 마주쳤다.

터덜터덜 걸어오는 에르안을 보며 내가 반갑다는 듯이 웃었다.

“에르안 님?”

“어? 자주 마주치네.”

에르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방엔 왜 들어가?”

“여기요? 페렐르만 자작님이 이 방을 쓰라고 하셨거든요.”

“뭐?”

새까만 검은 눈이 미심쩍다는 둣 깜빡였다.

“확실해? 거긴……”

“알아요. 하지만 정말로 따님의 방을 주셨어요.”

“..............”

“아마도 제가 마음에 드셨나 봐요.”

에르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페렐르만 자작은 누군가를 애초에 마음에 들어 하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거봐요, 저 여기 오래 있을 거라니까요. 다른 조수들하고는 급이 다르죠. 이제 좀 믿기세요?”

아까 마주쳤을 때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미심쩍은 눈빛을 풀지 않던 에르안이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안 님,저녁은 드셨어요?”

“아직.”

에르안이 눈을 내리깔았다.

“웨데릭 형이 없으니…… 혼자 먹어야겠지.”

공작 부인은 워낙에 바빠서 매일 에르안과 저녁을 같이 먹어 줄 수가 없었다.

‘둘의 사이가 그다지 살가운 것 같지도 않고.’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친한 척을 했다.

“그럼 저랑 같이 드실래요?”

“너랑?”

에르안은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예! 혼자 드시기 싫으시면 제가 말동무 해 드릴게요.”

“……좋아.”

그렇게 나는 그와 만난 지 하루 만에 저녁을 함께 먹게 되었다.

이참에 좀 친해져야겠다고 생각 한 나는 당황스러운 상황에 닥치 고 말았다.

‘뭐야,귀족들은 방에서 밥을 먹어?’

당연히 페렐르만 자작과 함께 한 오찬처럼 식당에서 먹을 줄 알았는데,에르안이 안내한 곳은 바로 자신의 방이었다.

하녀가 내 몫까지 2인분의 음식을 직접 갖다 주었다.

나는 꽤 놀랐지만,복도 끝에 있는 에르안의 방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럴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졸 지에 그의 방에서 단둘이 있게 된 것이었다.

상당히 넓은 방 안쪽에는 혼자 자기엔 너무 넓어 보이는 침대가 있었고, 그 바로 옆의 벽면에는 빼곡한 책장에 책이 가득 차 있 었다.

“책이 진짜 많네요. 다 읽으신 거예요?”

“옛날엔. 요새는 안 읽어.”

“네? 왜요?”

“웨데릭 형이 책 읽으면 두통 온댔어. 내가 아프면 여러 사람 귀찮잖아.”

정확한 진료는 해 보지 않았지만,적어도 그다지 신빙성이 있 는 말은 아니었다.

게다가 옛날에는 읽었다니, 저 어려운 책들을 훨씬 더 어렸을 때 이해할 수 있었다는 얘긴가?

“특히 너처럼 조수로 온 애들은 내가 아프면 상당히 성가셔했어.”

“뭐라고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커다랗게 반문했다.

“잡다한 일이 많이 생기니까. 다 내가 아픈 탓이라고,웨데릭 형이 기분 나빠하지 말랬어.”

“페렐르만 자작님께 말씀드렸어야지요. 조수의 자질이 없는데요.”

“어차피 얼마 안 되어 쫓겨날 텐데,뭐.”

그가 나를 보는 눈빛에 아직도 경계심이 스며 있는 이유가 있었다.

에르안의 어조가 담담한 것이 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게 해 주었다.

먹으면서 좀 더 물어보려고 스테이크를 썰던 나는 에르안이 나이프를 놓는 것올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에르안 님.”

에르안은 음식을 거의 안 먹고 있었다.

“왜 이렇게 안 드세요?”

“웨데릭 형이 나는 많이 먹으면 살이 찌는 체질이라고 해서.”

예상했지만 공놀이에 이어,독서에 식습관까지 웨데릭이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더 이상 웨데릭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그의 길쭉한 팔을 바라보 며 단호하게 말했다.

“네? 지금도 너무 마르셨는걸 요. 더 드셔야 해요. 게다가 성장기잖아요.”

“하지만 그러면 다들 우습게 본다고 했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 웨데릭 님보다 제가 더 똑 똑해요. 제 말 들으세요. 책도 이 제 다시 읽으시고, 식사도 다 하시고,운동도 꾸준히 하셔야 해 요.”

“웨데릭 형은 내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야.”

“제가 훨씬 더 에르안 님을 걱 정할걸요.”

나는 에르안의 접시를 가져다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스테이크 를 숙숙 썬 뒤,포크에 찍어 에 르안의 입에 가져다 댔다.

“아, 하세요.”

“어?”

“지금은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성년이 될 때까지 꼭 기억해 두세요. 반드시.”

나는 에르안의 눈을 똑바로 바 라보며 말했다.

웨데릭과 에르안에게 7년의 시간이 있다면,나 역시 성년까지 그와 지낼 수 있는 6년의 시간이 있었다.

그때까지 웨데릭만큼이나 열심히 나의 가치를 주입시켜야 했다.

내가 백날 올바른 처방을 해도 본인이 안 들어먹으면 계속 이 모양 이 꼴일 테니까.

“저는 에르안 님 주변에 있는 사람 중 제일 똑똑하고 영리하며 거짓말도 절대 안 하고……”

나는 정말로 사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지금 미래를 아는 건 나뿐이고, 그러니까 세상에서 가장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에르안 님을 가장 위하는 사람 이라고요. 아마 이 세상에서 유일할 정도로요.”

그의 새까만 눈이 나를 뻔히 바 라보았다.

“……뭐, 알았어.”

내가 내민 스테이크 조각을 물고, 그가 천천히 삼키더니 느릿하게 대답했다.

“절대 잊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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