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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5화 (5/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5화

에르안은 사촌 형 웨데릭이 좋 았다.

몇 년 전 공작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어머니인 공작 부인은 이유 모를 두통으로 늘 고 통스러워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영지 관리 때문에 바빴다.

게다가 자신 역시 몸이 약해서 툭하면 쓰러져 침대에 누워 있곤했는데, 형제도 없어 늘 혼자 있던 그에게 웨데릭은 아주 어릴 때부터 그와 놀아 준 단 하나의 형이었다.

게다가 웨데릭은 늘 자신을 걱 정해주고,맞는 말만 했다.

“너, 기사 수업 같은 거 받다가는 내일 머리가 더 아플걸.”

“하지만 제프리 경이 나 잘한다고 했는데……”

“두고 봐. 진짜 내일 두통이 끔 찍할 테니까.”

웨데릭이 그렇게 말하면 다음날은 정말로 끔찍한 두통이 찾아 오곤 했다.

“고기나 야채 같은 건 너무 많이 먹지 마. 살이 오르면 다 너를 무시한다고.”

“페렐르만 자작님은 음식 남기 지 말라고 하셨는데……”

“글쎄,너 그거 다 먹고 나면 배 아플걸.”

웨데릭의 말대로 그 이후에는 꼭 배가 아프곤 했다.

그래서 에르안은 자꾸 웨데릭의 말을 더 잘 듣게 되었다.

주치의인 페렐르만 자작은 자주 움직이고 잘 먹는 것을 권했지만 워낙에 사람이 딱딱하고 제 할 말만 하는지라 잘 와 닿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그 말을 듣지 않았을 때 웨데릭이 다시 오지 않을까 봐 무서웠다.

웨데릭은 그 에게 단 하나의 형제이자 친구였던 것이다.

“물론 내가 이렇게 말했다는 거 자작님이나 네 어머니에게 말하면 안 돼.”

“왜?”

“페렐르만 자작님은 자기 말을 안 듣게 했다고 날 너랑 못 놀게 할 거니까. 그럼 자작님의 말만 따르는 고모님도 날 못 오게 할 거야.”

“진짜?”

“그럼 넌 공놀이를 해 줄 사람도 없고 같이 대화해 줄 사람도 없어지는 거라고.”

세르이어스 공작이 죽었을 때 에르안의 나이는 여섯 살이었다.

그때, 공작 부인은 남편을 잃은 패닉과 갑자기 맡게 된 영지 살림이 버거워 에르안올 잘 보살펴 줄 상황이 아니었다.

여섯 살 꼬마에게는 무섭게 생 긴 아르가의 말보다는 자주 찾아 와 자신과 놀아 주는 웨데릭의 말이 더 믿음직스러웠다.

그리고 그렇게 7년이 홀러 열셋이 되었다.

그동안 에르안은 웨데릭의 말대 로 남들의 웃음거리가 될까 봐 실컷 뛰놀지도 않았고,살이 비대하게 찔까 봐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두통이 올 거라는 말에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열셋이 되도록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기사단에게 검술을 배우지도 않았다.

워낙에 생사를 오가는 상황이 많아 무언가를 연속적으로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아르가는 그럴 때마다 그를 어떻게든 살려 내고,또박또박 처방만 할 뿐이지 생활 습관을 강제하지는 않았다.

그의 역할은 훌륭한 의사로서 몸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었지 보육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역시 에르안에게 신경을 쓸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반쯤 미쳐서 딸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세르이어스 공작이 죽지만 않았더라도, 그래서 그 냉랭한 공작 부인이 눈물로 잡지만 않았더라도 그는 이 공작성에 붙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어른들의 무관심과 방관 속에서 에르안은 서서히 약해지고있었다.

가뜩이나 지병도 있는데, 잘 먹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아서 발육이 또래보다 상당히 느렸다.

그날도 에르안은 간만에 온 웨데릭과 공놀이를 하다가 더 이상 공놀이는 하지말자는 웨데릭의 말에 축 어깨를 내려트린 상황이었다.

역시 나는 아무것도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에르안이 의기소침해 있을 때였다.

“공자님은 열셋이잖아요.”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갈색 단발머리에 초록색 눈을 한 예쁜 여자애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랑또랑 하게 말하고 있었다.

“열일곱인 웨데릭 도련님하고 발육이 똑같을 수는 없지요.”

그 말에 대답한 건 웨데릭이었다.

“넌 누구지? 공작성에서 처음 보는데……”

예쁘고 고급스러운 옷을 보아하니 성에서 일하는 여자애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알기로 공작성에 있을 법한 또래의 여자아이는 없었다.

그 여자아이는 웨데릭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웨데릭 님, 아까 얼핏 들었는 데 이시더 남작님이 찾으시는 것 같았어요. 가 보셔야 하지 않을 까요?”

웨데릭은 미심쩍어 하면서도 그 여자애의 옷이 워낙에 고급스러 워서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당당한 말투에 비싼 장신구까지, 어느 주변 지역 귀족 영애인가 싶기도 했다.

“급하신 것 같던데. 얼른 가 보세요.”

처음 보는 애인데,이시더 남작 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걸 봐서 어쨌든 헛소리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알겠다.”

웨데릭은 에르안의 주머니에 과자를 한 움큼 넣어 준 뒤,그대 로 뒤를 돌아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에르안을 보며 그 여자 애가 활짝 웃었다.

“저도 열세 살인데, 저랑 같이 공놀이 하실래요?”

공작성 안에서만 누워 있던 에르안은 동갑의 여자아이를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

그 자리에서 멱살을 잡은 채 정강이를 걷어차고 싶었지만,어쨌든 나는 평민이고 웨데릭은 귀족 이었다.

어쩔 수 없이 거짓말로 웨데릭을 쫓아낸 나는 그제야 에르안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아,잠깐.’

나를 빤히 바라보는 에르안의 눈이 밤하늘처럼 새까맣고 깊었다.

발육이 좋지 않아 나보다 키는 좀 작았지만,생각보다 또렷한 이목구비에 나는 살짝 당황했다.

옛날에 멀리서 비리비리한 모습 을 볼 때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정말 잘 키우면 꽤나 미남이 될 것 같은 서늘한 분위기의 소년이었던 것이다.

‘어릴 땐 잘생겼었구나……’

나는 회귀 전에 본 비실비실했던 깡마른 남자를 생각하며 당황스러운 마음올 가라앉혔다.

“공놀이?”

“네.”

“너,내가 누군지 알아?”

경계심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럼요.”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에르안 일리아드 세르이어스 소공자님이 잖아요.”

그의 풀 네임을 똑똑하게 읊자 그가 떨떠름하게 입을 다물었다.

“저랑 한번 해 봐요,공놀이.”

웨데릭이 놔두고 간 라켓을 집 어 들고,나는 에르안과 간단한 렐리를 했다.

잠시 후. 비쩍 마른 데다가 몸 집도 작고 웨데릭에게 무시당하 는 에르안을 만만하게 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얘 왜 이래?’

생각보다 너무 잘했던 것이다.

나 역시 운동 신경이 아주 없지는 않았는데도 계속 그가 보낸 공을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도 쩔쩔매는 것은 에르안이었다.

“미안……”

“네? 뭐가요?”

“역시 내가 잘못해서……”

“무슨 소리예요?”

나는 황당해서 허리에 손을 얹었다.

“공자님이 너무 잘해서 제가 못 받아 내는 것뿐이에요.”

“하지만 웨데릭 형은 내가 잘못 하는 거라고……”

“지가 열세 살짜리의 공도 못 받아 내는 거면서 어쯤잖게 뒤집 어씌우긴.”

어이가 없어 한번 중얼거리고 난 뒤,나는 라켓을 내려놓고 에 르안의 앞에 섰다.

“에르안 님.”

“응?”

“앞으로 공놀이 저랑 해요. 웨데릭 님 말고요.”

“웨데릭 형이 그런 거 남하고 하면 무시당할 거라고……”

“아뇨. 에르안 님은 너무 잘하 시는데요.”

그건 사실이었다.

나는 비쩍 마른 에르안의 체형을 다시 한번 훌어보았다.

“전 진짜 거짓말 안 해요. 정직하고 올곧은 성격이라. 물론 이것도 사실이고요.”

“그래?”

잘 안 먹는 것 같은데도 소근육 과 대근육 발달도 잘 되어 있는 것 같고, 길쭉길쭉한 팔다리의 비율도 좋았다.

에르안은 나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처음의 경계심 어린 목소리가 살짝 누그러진 상태였다.

“넌 누구야?”

“아, 저는요.”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성 안으로 이끌면서 씩 웃었다.

“페렐르만 자작님의 새로운 조수예요. 리체 에스텔이라고 하는데, 편하게 리체라고 불러 주세”요

“아……”

내 대답에 에르안이 실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어차피 오래 못 있겠네.”

“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쳐다보자 에르안은 조그만한 목소 리로 대답했다.

“자작의 조수들은 원래 보름을 못 버텨.”

“전 안 그래요.”

아아. 난 또 뭐라고.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둣 가볍 게 대답했다.

“훨씬 똑똑하고 잘났거든요.”

그래도 에르안의 표정에 미심쩍음이 가득해서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거짓말 안 한다고 했잖아요. 두고 봐요. 오래 있는지 아닌 지.”

“뭐, 알았어.”

별로 믿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냉큼 대답하는 모양새가 귀여운 꼬맹이를 보는 기분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났다.

“공자님,그럼 저랑 약속 하나 해요.”

“뭔데?”

“제가 절대로 안 쫓겨나고,공 자님하고 공놀이도 하고 공부도 하고 하여간 계속 같이 있을게 요. 그러면……”

나는 에르안의 까만 눈을 바라 보며 단단히 일렀다.

“제 말 믿고,제가 시키는 대로 해 주세요.”

“뭐? 내가 왜?”

“말했잖아요. 저는 을곧고, 아주 정직하고, 똑똑한데다가 잘났다고요. 그러니까 제 말을 들으셔 야죠. 아마 대다수가 페렐르만 자작님의 처방과 비슷하겠지만……”

일단 에르안이 가진 지병의 원 인도 잘 모르겠고, 어떤 방식으로 악화되는지도 알 수 없었으니 추적 관찰이 필요했다.

어떤 지병이든 면역력이 큰 변수니까. 성장기에 잘 먹고 잘 뛰는 것도 당연히 중요했고.

보니까 유일한 또래이자 친척인 웨데릭에게 이런 식으로 오랫동안 세뇌당한 것 같은데,나랑 제일 친하게 지내도록 하는 것이 첫 번째인 것 같았다.

“어쨌든 두고 봐요.”

나는 그의 머리에 붙어 있는 나뭇잎을 떼어 주면서 말했다.

“공자님이 무사히 건강한 공작님이 되실 때까지,저는 계속 여기 있을 테니까요.”

“리체.”

에르안이 아직 내가 못 미덥다 는 눈으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나중에 공작이 되면?”

“네?”

“그러면 리체는 여기 없어?”

“어…… 음……”

그 이후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도 열아홈 이후의 삶을 살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어떻게든 가족을 찾거나 만드는 것 정도?

“건강해지시면,뭐 굳이?”

“네가 가장 똑똑하고 잘났다며. 그럼 세르이어스 공작가에 계속 있어야 하는 것 아냐? 우리는 황실과 비견될 정도로 커다란 가문이야.”

‘네 사촌이 말아먹기 전엔 그랬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뭐, 주치의로는 페렐르 만 자작님도 계시니까……”

“페렐르만 자작은 따님을 찾도록 놓아드리고 말이야.”

그의 똑 부러진 말에 할 대답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갑자기 왜 논리 왕이 됐지?’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 에르안이 내 손을 꽉 잡았다.

나는 그냥 어설프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건 뭐,그때 생각해 보죠.”

유약해 보이던 열아홉의 에르안 을 떠올리며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그때까지 잘 키우고,아예 맹탕은 아닌 것 같으니 가능하다면 영지도 잘 다스리라고 공부도 좀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애에서 파생된 일종의 서비스 정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성년까지는 멀었으니까요.”

뭐, 성년 이후라면 별일이야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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