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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4화 (4/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씀니다 4화

“알고 있겠지만 나는 상단 운영 중이라 꽤 바빠. 긴급 상황에는 당연히 돌아오지만 공작성에 늘 붙어 있지는 않는다.”

간단한 테스트가 끝나자, 페렐 르만 자작은 나를 바라보며 낮고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네.”

나는 얌전히 대답하며 주워들은 사실을 입력했다.

“개인적으로 바쁜 일도 있고.”

바쁜 일이라는 건 아마 딸을 찾는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내 조수가 늘 공작성에 머물면서,혹시나 사안이 있으면 긴급 처방을 하고 나를 불러야 해. 그러려면 절대 멍청하면 안 되겠지.”

“당연하죠.”

나는 푸딩의 마지막 조각을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가 멍청하면 큰일 나죠.”

“보니까 다행히 멍청한 것 같지는 않으니 내일쯤 마님과 소공자이신 에르안 님께 소개를 드려 주마.”

자작은 하인에게 손짓을 해서 뭐라고 말했다.

곧 내 앞으로 푸딩이 세 개나 더 올라왔다.

“맛있으면 아껴 먹지 말고 더 달라고 해. 없어 보이니까.”

없어 보인다니.

그는 참 고맙다는 말을 하기 어렵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아까도 쓸 만하다기보다는 잘 한다는 말을 해 주면 좀 좋잖아?’

그는 내 뚱한 표정을 잘못 이해 했는지 다른 말을 했다.

“오늘은 곤란해. 이시더 남작과 그 영식이신 웨데릭 님이 오셔서 두 분 다 바쁘시니까.”

푸딩을 입에 가득 물고 우물거리던 나는 잘못해서 혀를 씹을 뻔했다.

‘웨데릭이라면 이 영지를 대놓고 몰락에 빠트린 에르안의 사 촌!’

내가 의사로서의 사명감만 없었어도 지금 웨데릭을 어떻게든 죽일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어쨌든 의사는 독에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쓸데없이 생명 존중 사상이 너무 강했다.

‘사람을 살리려고 배운 의학이지, 죽이려고 배운 의학은 아니지.’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을 죽이는 데 의학적 지식을 쓸 수는 없었다.

‘어쨌든 웨데릭과 그 부친이 와 있구나.’

에르안이 죽고,그들이 얼마나 빠르게 이 영지를 장악했는지 떠올리니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수상하긴 해. 마치 예전부터 노린 것처럼……. 잠깐, 예전부터?’

그러고 보면 이상했다.

에르안이 죽자마자 기다렸다는 둣 웨데릭이 유일한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작성에 입성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몇 달씩 걸리기로 유명한, 복잡한 귀족들의 상속 절차도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심지어 그 바로 다음날인가 반 란군에 합류한다는 선언을 했었 고……’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오랫 동안 준비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빠르게 착착 이루어질 리가 없다 는 말이다.

나는 입안에 남아 있던 푸딩을 꿀꺽 삼키며 생각했다.

‘그럼…… 설마?’

***

식사가 끝나고 나서 나는 제니 와 함께 공작성 구경을 시작했다.

이렇게 대귀족의 거처에 머무는 것은 처음이라, 나는 획획 돌아 가는 시선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곳이 화려하고 정돈되어 있었으며,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이렇게 멋진 곳이 완전히 초토 화됐었지……’

당시의 나는 웨데릭과 그 측근들의 명령에 아무 소리도 못하고 반란군들을 치료했었다.

별달리 대우도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사람을 살리려고 묵묵히 일했던 기억이 났다.

쓸데없는 회한에 젖어서 걷고 있는데 제니가 싱긋 웃었다.

“역시, 오찬은 성공적이셨나 봐요.”

“딱히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었어요. 어차피 마님과 공자님은 내일 뵙기로 했고.”

“그럼 엄청나게 성공적인 거예요.”

제니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 며 말했다.

“보통은 엄청나게 눈물을 쏙 뺀 다음에 일주일 정도 호되게 가르치신 다음,그걸 버틴 조수들만 소개해 주시거든요. 아가씨에게 역시 확신이 드셨나 봐요.”

“그럴 만하죠. 저는 이미 의사의 자질을 모두 갖췄으니까요.”

지식과 인성과 자세 모두.

나는 당연하다는 둣이 대답했고,제니는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둣 깔깔거 리며 웃었다.

“자작님께서는 많이 바쁘세요. 믿음직한 조수 한 분을 여기 두고 가시면 조금 마음이 편하시겠 지요.”

“상단 때문이시죠?”

제니는 한숨을 쉬며 아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실…… 상단은 그냥 필요 이상으로 잘되고 있는 것뿐이고, 따님을 찾으려고 대륙 여기저기를 수소문하고 계신 거예요.”

“아……”

거대한 페렐르만 상단 뒤에 그 런 마음 아픈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러다가 친한 친구였던 세르이어스 공작님이 위독하실 때 곁에 없으셔서……. 그 죄책감으로 이곳도 떠나지 못하고 계시죠.”

제니는 씁쓸하게 웃었다.

“많이 불쌍하신 분이에요. 아가씨가 훌륭한 조수가 되셔서 자작 님의 짐을 덜어 주셨으면 좋겠네요.”

하기야,매년 자신의 딸 나이에 맞추어 옷을 죄 사다 놓고 버린다고 했던가.

나는 딸을 찾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알 수 있었다.

회귀 전에 그의 딸에 대한 소문은 듣지 못했으니,결국 딸을 찾지 못하고 웨데릭의 손에 죽은 셈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에르안에게 찰싹 붙어서 어떻게 해서든 살릴 예정이라,어쩌면 그도 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 까칠하기 그지없는 성깔도 좀 죽으려나.’

이런 아름답고 이타적인 생각을 하며 정원을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아주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르안, 이런 공도 못 잡으면 어떡해. 역시 너는 뭔가 좀 이상 해. 그냥 몸을 음직이지 않는 게 좋겠어.”

에르안?

나는 내내 찾던 인물의 이름에 고개를 홱 돌렸다.

“남들이 우습게 본다고.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운동 같은 건 특히나 하지 마. 비웃음거리가 될 테니까. 가뜩이나 어릴 때부터 계속 아파 왔잖아.”

잠깐. 그런데 지금 누가 누구를 가스라이팅 중이야?

내가 도끼눈을 하며 쳐다본 곳에서는 열세 살의 비쩍 마른 에르안을 앞에 두고 빈정거리고 있 는 열일곱의 소년이 있었다.

열은 갈색 머리에 검붉은 색 눈동자.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를 보아 하니 웨데릭이 분명했다.

그리고 시무룩하게 공을 안고 있는, 나보다도 키가 작은 에르안의 뒷모습이 보였다.

“넌 그리고 조금만 먹어도 살이 비대하게 찔 거야. 너처럼 아파서 계속 누워 있는 애들의 특징이기도 해.”

웨데릭은 못마땅한 얼굴로 끊임 없이 가스라이팅을 시도했다.

“그렇구나……”

에르안은 고개를 푹 숙이고 웅얼거렸다.

“그러니 최대한 음식은 먹지 마. 돼지가 되는 건 싫지? 배고프면 형이 준 이 과자나 몰래 먹 어.”

아니,이 자식이? 보자보자 하 니까?

나는 잡고 있던 제니의 손을 놓았다.

“아가씨?”

제니는 내가 손을 놓자 깜짝 놀 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먼저 가세요. 전 잠시 갈 데가 있으니까.”

“갑자기요?”

“네”

“아니,공작성은 복잡한데……”

“이미 지리 다 외웠어요.”

제니를 뒤로 두고, 나는 성큼성 큼 정원을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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