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3화
“이,이 방을 주신다고요?”
곧바로 내게는 제니라는 하녀가 하나 배정되었다.
제니는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선량해 보이는 40대 중반의 푸근한 인상의 하녀였다.
페렐르만 자작과 자작저에서부터 함께 올라왔다고 했다.
“늘 비어 있는 방인데, 뭐.”
페렐르만 자작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너무나 소녀스러운 방에 살짝 놀랐다.
딱 내 또래의 귀족 영애가 쓸 만한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방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타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그냥 거기 있는 옷도 마음대로 입어.”
나는 조심스럽게 옷장을 열어 보고 깜짝 놀랐다.
새것 같아 보이는 아이의 옷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하지만……”
왜인지 모르겠지만 제니는 살짝 당황한 듯했다.
그 당황함을 무시하며 페렐르만 자작이 씁쓸하게 말했다.
“어차피 이번 계절이 지나면 다 버리려고 했던 옷들 아닌가. 또 래 여자애가 왔으니 입으면 좋지.”
“가,감사합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이 예쁜 옷 들을 모두 준다고 하니 나는 냉큼 인사했다.
페렐르만 자작이 또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딱히 네가 마음에 들어서 주는 건 아냐. 버릴 옷들인데 맞는 여자아이가 와서 그냥 주는 거지. 이 공작성에는 네 또래 어린 여자애들이 없으니.”
“아…… 네.”
“똑똑히 알아 둬. 그냥 버릴 옷 주는 거라고.”
“네, 자작님이 이 옷들을 제게 버렸다는 사실을 잘 인지해 두겠습니다.”
내가 즉시 대답하자 페렐르만 자작이 외알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필수로 봐야 할 책들을 보낼 테니 내일까지 다 외우도록 해.”
“네.”
“몇 권인지 안 물어봐? 양이 얼마나 되는지?”
“상관없어요.”
나는 어깨를 으쑥했다.
“전 한 번 읽은 의학서는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외울 수 있어요.”
페렐르만 자작은 어이없다는 둣 이 피식 웃고 나서 인사도 없이 나가 버렸다.
잠시 후, 나와 단둘이 남은 제 니가 조심스럽게 내게 물어왔다.
“저 아가씨……, 자작님은 조수들에게 거의 책을 몇십 권씩 외우게 시켰어요. 지금이라도 내일 은 무리라고 말씀드리는 게 어때요?”
“무리 아니에요.”
나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저는 천재거든요.”
그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굳이 숨길 생각이 없었다.
열아흡까지의 지식을 가졌기 때 문에 오히려 멍청한 척을 했다가는 개연성이 더 없어졌다.
제니는 황당하다는 표정 대신 뭔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웃어 보였다.
“세상에…… 페렐르만 자작님 어릴 때랑 너무 똑같네요. 자작님이 아가씨만 할 때 달고 살았던 말인데. 자기 천재라고.”
“네?”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똑같다고? 내가 그 성격 더러운 인간이랑?
“네, 왜 아가씨께 따님의 방을 주셨나 했더니……”
“뭐라고요?”
나는 ‘따님의 방’이라는 소리에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이 예쁘고 안락한 방이 바로 페렐르만 자작의 딸이 쓰던 방이라 는 건가?
‘그럼 저 소녀들이 입을 법한 드레스들도……
“아, 정확히 말하면…… 잃어버린 딸이요.”
하지만 그런 말은 회귀 전에도 들은 적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제니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제니는 다소 씁쓸한 표 정으로 간단히 설명했다.
“얼굴도 못 본 채로 잃어버린 따님이 계시거든요. 그 일에 자책을 많이 하셔서, 공작님께서 세르이어스 공작성에 따님의 방을 만드는 걸 허용해 주셨어요. 희망을 버리지 말고 기다리라고요.”
“아…… 그렇군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페렐르만 상단이 상당히 돈을 쓸어 담고 있으니 살아만 있다면 꽤 돈벼락을 맞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 이 복도의 끝에는 소공자 님 방이 있어요.”
제니는 엉망인 나의 머리를 다시 묶어 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에르안 세르이어스 공자님 말 하는 거죠?”
“예.”
그가 바로 내가 어떻게 해서든 살려야 하는 애였다.
비쩍 말라서 비실비실한 모습으로 기침을 하던 열아흡의 소공자를 떠올리며 나는 열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부터 천천히 지켜보며 지병의 원인을 찾고 고쳐 줘야 했다.
‘같은 층이라니까,우연히 마주 치기도 딱 좋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머나,예뻐라.”
제니는 내 몸에 맞는 드레스를 골라서 입히고 어울리는 장신구 까지 달아 주며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꾸며 놓으니까 완전 귀족가 아가씨 같네요.”
“꾸며 놓으면 다 귀족가 아가씨 같아지지요.”
나는 책장을 팔랑팔랑 넘기며 대답했다.
“물론 제 피부가 희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덕도 있겠지만요.”
내 똑 부러진 말에 제니가 웃음 을 참지 못했다.
제니는 또래보다 체구가 작은 거울 속의 나를 다시 한번 바라 보면서 중얼거렸다.
“자작님의 소녀 버전을 보는 것 같아요.”
“……그거 욕 아닌가요?”
열다섯 번째 책을 테이블에 쌓아 놓은 나는 기지개를 켰다.
혹시 몰라서 배달된 책들을 다 훌어보긴 했지만 역시 모르는 내용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6년 전 지식들이라 실제로 내가 아는 게 더 많았다.
사실 이제 내 역량은 대륙에 이미 존재하는 지식을 아는 것보다 새로운 걸 밝혀내는 것에 달려 있었다.
“자작님은 상당히 바쁘세요. 알고 계시겠지만 페렐르만 상단도 운영 중이셔서.”
“네, 알고 있어요.”
“늘 공작가에 붙어 있을 수가 없으니 세르이어스 공작가의 주치의를 그만두고 싶다고 여러 번 사의를 표명했지만, 마님이 계속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머물고 계세요.”
“왜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세르이어스 공작가 정도면 상주 의사를 쓰는 게 더 좋을 텐데요.”
“자작님의 실력을 믿는 거죠.”
제니가 내 머리를 매만져 주며 말했다.
“자작님이 떠나시고 새로운 주치의를 맞이하자마자 세르이어스 공작님께서 돌아가셨으니까요. ”
“아.”
맞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가며 고개 를 끄덕였다.
페렐르만 자작이 도저히 바빠서 주치의를 할 수 없다고 잠시 그만둔 동안에,그나마 삶을 이어 오던 세르이어스 공작이 죽었다.
그래서 지금은 공작 부인이 여러 모로 영지 관리를 하고 있었는데, 아마 외아들 에르안이 성 년이 되면 그에게 공작위가 내려질 예정이었다.
“에르안 님마저 그렇게 보낼 수는 없으니 필사적으로 붙잡고 계신 거지요.”
“에르안 소공자님도 몸이 약하 시죠?”
“네, 요 몇 달 사이에도 몇 번 돌아가실 뻔한 걸 자작님이 간신히 살려 내셨어요.”
페렐르만 자작은 실력도 좋은데다가 세르이어스 공작가에 충성 했다.
그런 그가 결국 에르안을 못 살려 냈다면 분명히 꽤나 까다로운 질병이 틀림없었다.
‘진짜, 최대한 빨리 내가 살펴봐야겠어. 어릴 때부터 관리해야 하는 질병일지도 모르니까.’
나는 다시 한번 내 목적을 상기 했다.
“자, 이제 일어나실까요?”
제니가 내 손을 잡아 주며 빙긋 웃었다.
“자작님과 오찬이 예정되어 있거든요.”
“오찬이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제니 는 살짝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예. 대다수의 조수들이…… 이 첫 오찬을 넘기지 못하고 이 성을 나갔어요.”
페렐르만 자작의 거친 성미에 대해서는 어제도 겪은 바가 있기 때문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 였다.
“하지만 왠지 아가씨께서는 무난하게 다시 돌아오실 것 같네
“그렇겠지요.”
내가 태연하게 대답하자 제니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드하린 풀과 호박즙을 섞으면.”
“근육통의 일시적인 완화 효과가 있습니다.”
“갑자기 두통을 호소하며 경련을 일으키면.”
“일단 시드꽃즙을 투약한 뒤 반응을 보아 추후 처방을 결정합니다.”
식사는 훌륭했다.
보육원에서 자라서 개인 의원의 조수로 6년을 버티다가 막 의원을 열었던 나는 회귀하기 전에 이토록 귀한 음식을 먹어 본 적 이 없었다.
페렐르만 자작은 어제 보내온 책들의 내용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했고,나는 태연하게 대답하며 접시를 꼬박꼬박 비워 냈다.
물론 나 아닌 다른 지원자들은 한 입도 못 먹었겠다 싶을 만큼 얼음장 같은 분위기기는 했다.
페렐르만 자작이 아무 안부 인사 없이 질문만 쏟아 냈으며, 하나라도 대답을 못 하면 안 될 것 같은 냉담한 눈빛을 쏘아댔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는 디저트가 나올 때까지 막힘없이 대답했다.
페렐르만 자작은 내가 푸딩을 먹기 시작한 후에야 질문 세례를 멈췄다.
“쓸 만하군.”
식사 내내 온갖 질문을 쏟아 내 고 모두 대답을 받아 낸 그의 소감이었다.
“쓸 만하다 뿐이겠어요?”
나는 푸딩을 조금씩 아껴 먹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런 인재는 대륙 어디에서도 구하기 힘들어요.”
지금 내가 열셋의 나이인데다가 확연한 목적이 있어서 조수로 들어온 것뿐이지, 누구의 밑에 들어갈 실력은 아니었다.
“아주 솔직하군.”
“의사의 덕목이죠.”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저는 거짓말은 안 해요.”
그건 사실이었다.
“엄청 착하고 인류애도 넘치고요.”
아무리 생각해도,혼자 튈 수 있었는데 이 영지 사람들을 모두 살리겠다고 여기 들어온 내 마음 씨가 너무 따뜻해서 감탄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
페렐르만 자작이 피식 웃었다.
“나랑 비슷한 성격이구나. 나도 굉장히 정직하고 선량하거든.”
‘대체 어디가! 말투랑 분위기부터가 인류애가 하나도 없게 생긴 사람인데 잘난 척은!’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그가 정색을 하며 내게 말했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그 생각이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이야.”
아무래도 페렐르만 자작과 나는 아주 잘 맞거나 아주 안 맞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