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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2화 (2/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2화

1. 공작성의 새로운 조수

“그래.”

세르이어스 공작성의 주치의, 아르가 에이트 페렐르만 자작은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을 가진 30 대 중반의 젊은 남자였다.

그가 외알 안경을 치켜올리며 나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제하 보육원〉을 지금 막 나왔 는데,바로 내 조수가 되겠다고?”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페렐르만 자작이 어이없다는 둣이 피식 웃었다.

“다른 의원에서 충분히 공부하고 온 열다섯,열여섯 먹은 애들도 일주일을 못 버티는데”, 고작 보육원 선생의 추천서만 가지고 내 조수를 하겠다?”

“네

“그 추천서의 내용이 뭔지는 알고?”

“어…… 똑똑하고 야무지다 정도겠죠?”

공작성의 하녀가 가져다준 차를 호로록 마시며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세르이어스 공작성의 사람들은 다 오만하기 그지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직 직접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세르이어스 공작 부인도 상당히 성격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세르이어스 공작이 돌아가시고 난 뒤 영지 경영을 맡은 그녀는 작은 잘못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가 막 대리인이 되었을 때, 처음 반년간은 매일같이 성문에 사용인들이나 가신들의 시체가 매달리곤 했다.

물론 그런 공포 정치로 인해 공작의 사후에 갑자기 횡행했던 절도와 사기,횡령 둥이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유능하고 일처리가 깔끔해서 영지민들이 믿고 살기엔 괜찮았다.

어느 날 갑자기 외아들 에르안 과 함께 급사한 뒤가 문제였다.

‘잠깐. 둘 다 급사…… 그 이후 바로 웨데릭이 공작 위에 오르잖아. 그러고 나서 바로 반란군 합류……. 뭔가 이상한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어쨌든 그건 차차 알아보면 되는 문제였다.

“참……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건방지다고 해야 할지.”

페렐르만 자작은 혀를 끌끌 차며 내계 추천서를 내밀었다.

[리체 에스텔을 자작님의 조수로 추천합니다.

다소 자만하다 보일지 몰라도, 그래도 매우 영리하고 야무진 아이입니다.

말투가 애늙은이 같긴 하지만,그래도 보면 볼수록 귀엽지 않나요?

-〈제하 보육원〉,엘번 카이트.]

엘번 선생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건 알고 있지만,정말 주치의의 조수로 임명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추천서였다.

“엘번 선생님께서 추천서를 쓰 는 재주는 별로 없으셔서요.”

어깨를 으쓱하는 나를 보며 페렐르만 자작이 코웃음을 쳤다.

공작성의 주치의를 하고 있지만,그는 대륙에서 손꼽히는 부 자였다.

페렐르만 약초 상단이 거의 독과점 형태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반란군을 끌고 온 웨데릭에게 반항하다가 일찌감치 죽고 말지만.

‘죽기엔 아깝네.’

나는 그의 빈정거림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홀리며 생각했다.

‘성격은 더럽지만 그 나이 치고 꽤 잘생겼는데.’

찻잔을 내려놓고 나는 고개를 치켜들며 자신있게 물었다.

“의원 경험이 없고,나이가 어린 것이 문제인가요? 하지만 나이 많고 의원 경험이 있는 다른 애들보다 제가 나을걸요.”

“뭐?”

“제게 확신이 없으시면 시험해 보셔도 좋아요.”

“그래.”

페렐르만 자작은 약초 상자를 꺼내며 한숨을 쉬었다.

“시건방진 애는 현실을 마주해 봐야 정신을 좀 차리겠지.”

그는 약초 다섯 개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불친절하게 말했다.

“이름을 말해 봐라.”

“달달이풀, 아람초, 베히꽃, 히라테의 뿌리, 애민들레요.”

나는 즉시 대답했다.

예상치 못했다는 둣 페렐르만 자작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가 조금 더 진지한 얼굴로 약 초 상자의 밑에서 다른 약초 다섯 개를 꺼냈다.

“살레꽃, 제비원추리, 데이지아풀,지카나무의 잎,명지초의 열매요.”

물론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 고 모두 다 대답해 냈다.

페렐르만 자작의 눈이 황당하다 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너, 너…… 뭐지? 명지초의 열매는 대륙에서 본 사람도 얼마 없을 텐데.”

“책에 나와요.”

“명지초의 열매는 어디에 쓰이지?”

“마력 부작용에 의한 복통이고 부작용은 고혈압이요. 주로 데라포스 산에서 봄에만 채취할 수 있어요.”

묻지 않은 것까지 물 흐르듯이 설명한 나는 그것 보라는 둣이 씩 웃었다.

“그럼 살레꽃과 제비원추리를 섞으면?”

“초기 감기에 좋아요. 물론 어느 정도 진행된 다음에는 효과가 없고요.”

“네가 본 열 개의 약초 중 지혈과 관계있는 약초는 뭐지?”

“지카나무의 잎이요. 물론 히라 테의 뿌리도 비슷한 효과를 내긴 하는데,아무래도 비싸고 희귀하니까 지카나무의 잎을 쓰는 게 낫죠.”

페렐르만 자작은 외알 안경을 잠시 닦더니 나를 가만히 바라보 았다.

“열셋이라고?”

“네.”

“의원 경험도 없고?”

사실 의원을 열어 본 경험도 있었지만 나는 열세 살에 맞추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네.”

“그런데 이런 걸 다 어떻게 알지?”

“전 천재니까요.”

내가 당당하게 말하자 페렐르만 자작의 눈이 순식간에 가늘어졌다.

“진짜요.”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정말로 그것뿐이었다.

이상하게 뭔가 누그러진 목소리로 페렐르만 자작이 천천히 물었다.

“그럼…… 대체 왜 내 조수로 있겠다는 거지?”

나는 살짝 망설이다가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더 천재이신 분의 밑에 있고 싶어서요.”

“크흠,큼!”

그건 사실이었다.

페렐르만 자작은 이 근방에서 가장 뛰어난 의원으로 유명했고, 약초학의 지식이 워낙에 풍부하니 사업도 크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뭐지?’

나는 살짝 귀가 붉어진 페렐르만 자작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표정이 아까보다 풀어진 것 같은데.’

페렐르만 자작은 입꼬리를 억지 로 내리며 선심 쓴다는 둣이 말했다.

“……일단은 내 조수로 등록해 두도록 하지. 하지만 내 맘에 안 들면 그대로 공작성을 나가야 해.”

“알고 있어요.”

‘당신의 성격이 참으로 더럽다 는 것도.’

그의 거만한 말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따라와. 공작성에서 지낼 방을 알려 줄 테니까.”

페렐르만 자작이 일어서자 옆에 있던 하녀가 기겁을 하며 끼어들었다.

“자작님,저희가 안내해도 됩니다. 직접 하실 필요는……”

“딱히 얘가 마음에 들어서 내가 직접 방을 안내해 주려는 건 아 냐.”

나도 부담스러워서 엉거주춤 일어나는데, 페렐르만 자작이 차갑게 하녀의 말을 끊었다.

“저녁 식사 전에 간식을 좀 푸짐하게 올려 주도록 해.”

하녀가 어안이 벙벙하여 물었다.

페렐르만 자작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열셋이 키가 이렇게 작 고,바짝 말랐어? 보육원에서는 아무것도 안 먹여?”

나는 그냥 선천적으로 키가 작을 뿐이었다.

나중에 다 커서도 키가 작았다.

내 체격을 비난하는 건가 싶어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페렐르만 자작을 바라보니,그가 다시 공격적인 어투로 물었다.

“뭐 좋아해? 어떤 음식 좋아하느냐고.”

“어…… 달콤한 것들이요.”

“종류별로 다 올려 보내면 되겠군.”

“네?”

“보육원에서 왔다며. 거기서 뭘 먹었겠어.”

이건 분명히 나를 무시하는 발언이라 발끈하려던 찰나였다.

“공작성에 있는 것들을 다 먹어 봐야 네 취향을 알 거 아냐. 제일 맛있는 걸 잘 골라서 배고프면 요청하도록 해. 주방에 내가 말해 둘 테니.”

나는 뭔가 좀 햇갈려서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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