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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화 (1/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유나진

프롤로그

“이게 다…… 에르안 소공자님이 돌아가셔서 생긴 일이야.”

“그냥,에르안 소공자님이 공작 위만 물려받으셨어도……”

“그러면 그 미친 웨데릭이 세르이어스 공작으로 오진 않았겠 지.”

옆 감옥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르이어스 공작령은 반년 전, 안정된 후계자였던 에르안 일리아드 세르이어스를 잃었다.

성년이 되고 나서도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해 계속 작위를 물려 받지 못했던 그는 결국 소공자의 신분으로 죽었다.

후임으로 온 새로운 공작은 에 르안의 사촌인 웨데릭 비세스 이시더였다.

그리고 그는 공작위에 오르자마 자 반란군에 합류하며 세르이어스를 순식간에 전쟁터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명분도 능력도 없는 반란은 황실에 의해서 간단히 진압되었다.

하지만 세르이어스 공작령의 젊은이들은 거의 대부분 죽거나 다쳤으며,우리는 엄청난 책임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적극적으로 반란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교수형 신세가 되었다.

문제는 나 역시 교수형을 받았다는 것이랄까.

“……말도 안 돼.”

나는 손을 벌벌 멸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나는 이제 고작 열아흡이었다.

“내가,내가 왜……”

나는 그저 영지에서 가장 실력 있는 의사였을 뿐이다.

그저 수많은 영지민들을 치료해 주었을 뿐인데,황실은 내게 ‘반란군의 병력 확장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죄목을 씌웠다.

하지만 어쨌든 감옥에 갇혀 버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열세 살부터 천재라며 칭송받아 온 나는 막 성년이 된 얼마 전부터 독립된 의원을 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드디어 명성도 좀 얻고 돈 좀 벌고 있나 싶었는데…….

“억울해……”

나 같은 보통 사람은 황실이나 공작령에 대한 충성심 같은 건 없었다.

그냥 하루하루 평온하게 살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반란군에 합류되 었다.

사람을 살리라고 해서 살렸을 뿐인데. 정말 억울해서 팔짝 뛸 지경이었다.

“아가씨.”

내가 훌쩍거리고 있자 나와 같은 감옥에 갇혀있던 할머니가 은근슬쩍 말을 걸었다.

“그렇게 억울해?”

“당연히 억울하죠.”

나는 말해 뭐 하냐는 듯이 부루통하게 대답했다.

“갑자기 웃대가리 바뀌어서 사람 살리다 죽게 생겼는데. 그렇다고 의사가 죽어 가는 사람 두고 도망갈 수도 없잖아요.”

그러자 거적때기를 입고 있는 할머니는 은근슬쩍 내게 다가왔다.

“아가씨,의사야?”

“……네.”

나는 수상한 눈으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세르이어스 영지 사람이라면 천재 의사로 소문난 나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어쩌다 함께 갇혀 버린 외지인이 분명했다.

“그것도 엄청 능력 있는 의사예요. 죽는 게 너무 아까울 정도로요.”

“그래?”

할머니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내가 매일 이유 없는 편두통 때문에 너무 힘들거든. 혹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까?”

“손 좀 줘 보세요.”

당장 내일 처형당할 운명이었지만, 나는 의사다운 사명감으로 할머니의 손을 잡고 몇몇 문진을 시작했다.

“마력이 안에서 충돌해서 생긴 통중이에요. 혹시 남의 마력을 함부로 받아들인 적이 있나요? 그것도 엄청난 힘을 가진 마력.”

흔한 질병은 아니었지만,나의 질문에 할머니의 눈이 커졌다.

“어,어떻게 알았지? 그 어떤 의원에 가도 원인을 모르던데”

“전 이 근방에서 천재라고 소문난 의사예요.”

나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달맞이꽃차를 아침마다 드시고,소고기를 끊으세요. 패랭이꽃과 이사르풀을 섞어서 환으로 드 시면 더 좋고요. 그럼 부작용이 좀 사라지실 거예요.”

“오, 그래?”

“애초에 이상한 마력을 함부로 몸에 한껏 받아들이면 안 돼요.

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나는 간단히 처방한 뒤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내일 사형당할 나와 함께 갇힌 걸 보면 이 할머니도 곧 죽을 게 뻔했다.

이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고 있는데 할머니가 눈을 빛냈다.

“고맙수, 천재 의사 아가씨. 혹시 필요한 게 있을까? 뭐든 말만 해요.”

“저요?”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말했다.

“그럼 살려 주세요.”

“그건…… 내가 황제는 아니라서. 다른 걸 말해 봐요.”

뭐든 말만 하라면서…….

나는 그 다음 간절해진 것을 말했다.

“저, 보육원 출신인데 친부모를 몰라요. 알려 줄 수 있어요?”

사형 선고를 받아 감옥에 갇힌 지금에도 나를 찾아올 가족이 아무도 없다는 건 슬픈 일이었다.

내 죽음에 오열할 사람 한 명 없이 이렇게 외롭게 죽는 것이 내 운명이었다니, 서러웠다.

“아이고…… 내 수정 구슬이 여기 오면서 깨져 버리는 바람에. 그것만 있으면 찾아 줄 수 있을 텐데.”

뭐든 말만 하라더니, 그냥 빈말이잖아.

내일 죽을 마당에 더 이상 원하 는 걸 구구절절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성의 없이 대꾸했다.

“그럼 뭐, 더 이상은 바라는 게 없는데요. 됐어요,할머니. 제가 지금 뭐가 필요하겠어요.”

할머니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아가씨를 살려 주지는 못 하지만 살 기회를 줄 수는 있지.”

“네?”

“이 미래를 바꿔 봐,아가씨.”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시간을 돌려 줄 테니.”

***

그게 내 열아흡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 대화를 끝으로 정신 차려 보니, 나는 무려 다시 열셋으로 회귀해 버렸다.

“말도 안 돼……”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갈색 단발머리에 초록색 눈을

가진 조그만 여자애가 황당한 얼 굴로 서 있었다.

감옥에서 만난 할머니가 말한 ‘살 기회’란 건 이런 것인가!

시간을 돌렸으니 나는 세트이어스 영지에서 뭉개다가 반란에 휩싸여 처형되는 것이 아닌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래.”

옷차림을 보니 아직 여름이었다.

나는 이 옷차림을 기억하고 있 었다. 내가 세르이어스 영지 구석에 있는 보육원에서 나가, 동네 의원의 조수로 들어가기로 한 바로 그날이었다.

“그냥 도망치자.”

어차피 곧 보육원을 나가서 일자리를 얻어야 한다.

엄청난 의료 지식이 가득한 나는 안 그래도 천재 의사였으므로 어디 가서 굶어 죽을 일은 없었다.

의원이야 어딜 가도 있으니 취직자리도 널려 있겠다, 뭐.

“세르이어스 영지를 벗어나서 그냥 안전한 데로 튀는 거지.”

나는 얼마 안 되는 짐을 들고 결연하게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언니! 우리 잊으면 안 돼!”

“자주 놀러 와야 돼,누나.”

“열세 살이 되면 나가야 된다는 건 아는데,서운해……”

“언니가 성격은 좋지 않아도 엄 청 똑똑했는데……”

“아냐,성격이 별로라도 우리한테 잘해 줬다고.”

보육원에서 함께 자라 온 동생들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리체, 지트반 선생님의 조수로 가기로 했다며?”

거기에 나를 친동생처럼 예뻐해 준 엘번 선생님까지…….

엘번 선생님은 강물에 흘러가는 바구니 속의 아기였던 나를 목숨 걸고 구해서 ‘리체’라는 이름까지 붙여 준 사람이었다.

“정말 약소하지만,그래도 선물이란다. 꿈대로 정말 훌륭한 의사가 되렴.”

엘번 선생님은 갈색 머리카락을 넘기며 노트와 펜을 내게 건넸다.

붉은 눈동자가 상냥하게 웃는다.

이렇게 고급 노트와 펜을 사 려면 몇 달 용돈을 모았을 것이다.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 낌이었다.

이 사람들은 나중에 황실의 군대가 세르이어스 영지를 휩쓸 때 모두 죽는다.

나 혼자 살겠다고 그냥 튀어 버리는 게 옳은 선택일까?

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내게 소중한 보육원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비록 부모님은 없었지만, 보육원에서 나는 꽤 괜찮게 살았던 것이다.

“저는……”

노트와 펜을 받아 들며 나는 심호흡을 했다.

도저히 이 영지의 미래를 알면서 그냥 튈 수가 없었다.

“……지트반 선생님 말고, 세르이어스 성으로 가려고요.”

“뭐?”

엘번 선생님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거기를 왜?”

“세르이어스 공작님의 주치의, 아르가 님이 조수를 찾고 있다고 들었어요.”

“아르가 님은 언제나 조수를 찾 고 계시잖아.”

내 말에 아이 중 하나가 볼멘소 리로 말했다.

“다들 일주일도 안 되어서 쫓겨 나서 문제지.”

“난 안 쫓겨날 거야.”

나는 고개를 치켜들며 무심하게 말했다.

“왜?”

“난 천재니까.”

열아흡까지의 의료 지식을 모두 갖고 있는 나였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아이 하나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근데 굳이 왜 그 심보가 고약한 아르가 님한테 간다는 거야?”

“그건.”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너무 착하고 마음이 여리 기 때문이야.”

혼자 튀어도 될 걸,너희들이 마음에 걸려서 세르이어스 영지를 위해 내린 선택이라고 장황하게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엘번 선생님이 떨떠름한 눈으로 나를 보며 대답했다.

“그,그래. 우리 리체가 똑똑하고 착하긴 하지.”

그렇게 나는 보육원을 떠나 세르이어스 공작성으로 향했다.

세르이어스 공작성의 주치의, 아르가 에이트 페렐르만 자작은 상당히 능력 있는 의원이었다.

무엇보다 커다란 약초 상단을 운영하고 있었고, 항상 조수가 필요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물론, 워낙에 기준이 높고 성격이 나빠서 일주일 이상 붙어 있는 아이가 없다던가.

“……그 성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니까.”

나는 결국 참된 의료인의 결정을 한 것이다.

나 혼자 살자고 도망가는 게 아니라,세르이어스 영지를 그 미친 반란군의 손아귀에 넘겨주지 않기 위해.

그러려면 웨데릭이 하루아침에 세르이어스 공작으로 오는 것을 막아야 했고……

“에르안 세르이어스를 살려야 돼. 어떻게 해서든.”

열아흡에 갑자기 사망한 에르안을,그러니까 나와 동갑내기일 그 에르안 소공자를 살려 내야 했다.

“마지막에 볼 때 어땠더라……”

마지막으로 먼발치에서 막 성년이 된 에르안이 떠올랐다.

그는 비쩍 말라서 계속 기침을 했다.

‘그땐 어련히 페렐르만 자작이 알아서 치료할까 싶어 제대로 보 지도 않았지.’

“어릴 때부터 면역력을 키우고…… 자세히 관찰하는 게 좋겠어.”

에르안만 살려 내면,그래서 무사히 공작령을 물려받게 한다면 이 영지가 어이없는 반란에 휩싸일 일이 없었다.

“모든 게 다 잘 끝나서 할 일이 없어지면……”

어차피 주치의는 페렐르만 자작이고, 그는 이제 30대 중반이니 내가 공작가의 공식 주치의가 될 가능성도 없었다.

“……부모님이나 찾아보든가 가족이라는 걸 만들어 보는 것도 괜찮겠지.”

나는 부모를 몰랐다. 뭐, 워낙에 영리하니 부모님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회귀 전, 죽을 때가 되니 평생 궁금하지 않았던 부모님이 궁금했다.

나를 버린 걸까? 아니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잃어버린 걸까? 어쨌든 죽는다고 생각하니 뿌리 를 알고 싶었다.

만일 찾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지난 생과는 달리 결혼해서 가족 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일단은 에르안부터 어떻게든 해 보자.”

나는 당당히, 얼마 안 되는 짐 을 가지고 세르이어스 공작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엘번 선생님이 다급하게 써 준 ‘조수 추천서’를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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