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외전 11화
“……?!”
다프네는 놀라서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다가 곧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왕실 기사단에서 사람을 파견한 것에는 역시 이유가 있었다.
또한 삼등석에 있던 인물 대부분은 대왕비의 사람들이었으리라. 다프네와 함께 역으로 이동해 준 남자를 포함해서.
리디아와 다프네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말이다.
다프네는 자신이 그들에게 멋대로 명령 같은 말을 했던 장면이 연이어 떠올랐다.
“저, 전하…… 제가 무지하여…….”
다프네가 새파랗게 질린 채로 사죄의 말을 건네려고 했으나, 도리어 대왕비가 사과했다.
“미안하네, 서튼. 그대를 지켜보는 것이 즐거워서 진실을 이야기할 새가 없었거든.”
“……아, 아닙니다.”
“어떤 이가 목석같은 공작을 그리도 애달프게 만드는지 꽤 궁금했었는데.”
그녀는 주름진 얼굴에 몹시 흥미로워하는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용맹한 아가씨였을 줄이야.”
“제 약혼녀의 용맹함은 여느 기사에게도 지지 않을 겁니다.”
리암이 쓸데없이 자랑스러워하며 답했다. 다프네는 두 손안에 얼굴을 묻어 버렸지만 말이다.
“약속하지, 서튼.”
대왕비가 다가오기에, 다프네는 이제야 뒤늦게 무릎을 꿇었다.
“예식 날에는 그대에게 마땅한 호칭을 내리겠다.”
“……!”
다프네는 이 영광스러운 일에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던 탓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무엇이 좋을까. 공작은 어떻게 생각하지?”
그녀가 돌아보며 묻자 리암은 오래 생각하지도 않고 금방 답했다.
“전 은빛의 요정이 좋겠습니다.”
“무릇 사랑에 빠진 사내란 죄다 쓸모없는 법이지. 내가 진리를 깜빡했군. 창피한 말을 듣게 해서 미안하네, 서튼.”
은빛의 요정이라니 그건 정말로 끔찍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으므로 다프네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왕실에서 특별히 관심을 두는 인물에게 붙이는 호칭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보통은 해당 인물의 업적이나 특성을 고려하여 정해진다.
가령 천상의 목소리라든가 피아노의 신 혹은 성벽의 수호자처럼 말이다.
“나는 그대를 설원의 희망이라고 부르겠다.”
대왕비는 다프네의 어깨에 손을 가만히 올려 두었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겨울은 찾아오지. 그대가 그들의 희망이 되어 주었으면 하네.”
“……전하.”
“영원할 것 같았던 슬로언 공작의 겨울에 그대가 결국에는 봄을 가져왔던 것과 같이.”
그리고 대왕비는 다프네를 자리에서 일으켜 리암과 나란히 마주 서도록 했다.
대왕비는 그들의 사이에서 꼭 사제들이 그러하듯 가볍게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나는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엄숙하게 선포합니다.”
조금 당황하여 리암과 다프네가 그녀를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곤 불만스럽게 팔짱을 끼웠다.
“……설마 예식 순서를 모르는 건가?”
다프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순서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 선포 뒤로는 맹세의 키스가 이어져야 했다.
“하지만 저희…….”
‘키스는 이미 했는데요?’라고 이야기하려는 찰나, 갑자기 다가온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
두 눈을 휘둥그레 뜬 다프네의 시야로 잔뜩 즐거워하는 리암의 눈매가 보였고 그 너머로는 어느새 떠오른 강렬한 새벽의 햇살이 보였다.
어쩌면…… 이제는 눈이 멈추었을지도 모른다.
다프네는 이제야 안심하고서 두 눈을 사르르 감았다.
* * *
“누나, 천천히 세 번만 호흡해 봐. 우리 대장님이 그러시는데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된대. 스읍, 하아. 스읍, 하아.”
페이지 부인이 선물해 준 리본으로 머리카락을 고정하고, 하얀색 드레스를 입은 다프네는 두 발을 동동거리는 사무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참 커다란 가슴을 부풀리고 긴 숨을 내쉬던 사무엘은 다프네가 가만히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다시 그녀에게 심호흡을 재촉했다.
“아이참, 이렇게 해야 안정이 된다니까? 응? 그만 떨고 이제 날 따라 해 봐.”
“사무엘.”
“스읍, 하아.”
“나 안 떨어.”
“뭐? 하지만 조금 전에 내가 누나 손을 잡았을 때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떨고 있었는데?”
그건 사무엘이 스스로 떨고 있던 것뿐이었다. 다프네는 제 무고함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한 손을 들고서 그의 얼굴 앞에 내어 보였다.
“안 떨지?”
“저, 정말이네. 역시 누나는 굉장해. 멋있어…… 역시 누나는 설원의 희망이야.”
사무엘이 갑자기 부끄러운 칭호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다프네는 얼른 동생의 등짝을 세게 때려 주었다.
“아, 아야…… 누나 손 괜찮아?!”
“너, 내가 그거 말하지 말라고 했지!”
“왜에, 난 너무 근사하다고 생각해. 열차 사고에서 승객들은 물론이고 대왕비 전하까지 구하다니…… 역시 누나는 내 영웅이야.”
“창피하단 말이야.”
“누나는 너무 겸손해.”
겸손한 것이 아니었다.
다프네가 열차를 타고 클롯모어로 돌아온 것은 예식이 있는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그녀가 리암과 함께 역에서 내릴 때 결혼식을 위해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모두가 역으로 마중을 나왔고, 대왕비께서는 몸소 나서서 다프네와 열차에서 활약한 이들의 공을 치하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프네에게 왕실의 칭호를 내리겠노라 발표했다.
“수많은 사람이 나를 바라보면서 설원의 희망이라고 외치는데 어디 들어가서 숨어 버리고 싶었어.”
그나마 리암이 제안한 은발의 요정이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그런 끔찍한 칭호가 붙었다면, 역에 모여든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참느라 고생을 했을 테니까.
“난 정말로 누나가 자랑스러웠는데.”
“…….”
“물론 난 누나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자랑스럽지만.”
“으이그.”
다프네는 고마운 동생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사무엘은 기다렸다는 듯 달려 다프네를 꼭 안아 주었다.
“누나, 정말로 축하해.”
“응. 네 축하가 가장 기뻐.”
“왜냐하면, 나보다 더 누나를 진심으로 축하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거든.”
“고마워. 아, 예식 동안 페이지 부인을 잘 챙겨 드릴 거지? 내가 정신이 없을 것 같아서…….”
“걱정하지 마. 아마 부인께서 나를 더 챙겨 주시겠지만.”
행복한 남매의 시간 사이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다프네가 사무엘을 가볍게 밀어내며 답하자, 곧 문이 열렸는데 찾아온 사람은 놀랍게도 리암이었다.
“어, 형?”
사무엘이 놀라서 얼른 다프네의 앞을 막아섰다. 신랑은 결혼식 전에 신부를 만날 수 없다는 규칙을 떠올린 것이다.
“아, 규칙 때문이라면 괜찮아.”
검은색 예복을 갖추어 입은 그가 긴 상의 자락을 휘날리며 사무엘의 앞으로 다가와 근사하게 미소 지었다.
“난 그냥 다프네가 보고 싶을 뿐이니까.”
그 여유로운 목소리 뒤로, 오늘의 경사와 어울리지 않는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아악!”
아셔였다. 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다프네의 대기실로 들어와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고, 공작님! 예식 전에 여길 오시면 안 된다고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음.”
“불길하다고요! 그렇지 않아도 저 여자는!”
아셔는 평소 습관대로 다프네에게 손가락질했으나, 날카로워지는 두 남자의 눈초리에 얼른 손 모양을 공손한 것으로 바꾸었다.
“저분…… 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날씨가 인정한 사고뭉치…… 흐, 으음. 각종 재해를 관장하는 여신님이나 다름없는 분입니다!”
아셔는 어떻게든 좋은 식으로 이야기하려는 듯했지만, 그 내용이 다프네를 격렬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월급 도둑보다 더 심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공작님이 규칙을 어기신다면 앞으로 이 땅에는 더욱더 많은 재해가……! 그렇게 되면 제 업무도 늘어나겠죠. 제가 지난 사흘 동안 고생한 거 아십니까?”
그가 두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두려워하기에 리암은 그의 어깨를 툭 두드려 주었다.
“걱정하지 마, 결혼식이라면 이미 했으니까.”
“예? 그게 무슨…….”
“그러니까, 그대가 또 서류로 밤을 지새울 일은 없도록 하겠다는 뜻이야. 재해 대책은 매해 꾸준하게 세우고 있기도 하고.”
“그야 그렇…… 아니, 그래서 결혼식을 이미 하셨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인데요?!”
아셔가 다시 물을 때는 문 너머의 예배당에서 성가대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마 사제들이 입장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리암은 사무엘을 빙글 돌아 드디어 그리도 만나고 싶었던 하얀 드레스의 다프네와 마주 서게 되었다.
“손을 주시겠어요, 내 공작 부인?”
그가 손을 내밀며 건넨 이야기에, 다프네가 반문했다.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우리는 어디든 함께 가죠.”
“그건…… 그렇지만요.”
다프네는 그의 팔을 붙잡으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신랑과 신부가 함께 입장하는 결혼식이라니.
이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던 아셔는 결국 ‘모르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시죠.’라며 양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어느덧 노랫소리가 한차례 멈추었다.
사제들이 모두 예배당에 들어온 것이리라. 예식을 알리는 그들의 경건한 목소리가 넓은 공간에 울려 퍼지기 시작할 때, 리암과 다프네는 대기실에서 빠져나와 아무도 없는 하얀 복도를 함께 걸었다.
“다들 놀라지 않을까요?”
다프네가 흘긋 올려다보며 묻는 말에, 리암은 잠시 제 턱을 매만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함께 있을 때 더 눈부신 빛을 내거든. 예식의 시작부터 그 빛을 볼 수 있어서 모두 기뻐하겠지.”
“썩은 무도 안 할 것 같은 소리를 여전히 하시네요.”
“그대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평생 이야기할 수 있지.”
초를 받쳐 든 수습 사제들이 얼른 그들의 앞으로 헐레벌떡 달려와 정렬했고, 마침내 리암과 다프네는 예배당 앞에 나란히 섰다.
성가대가 그들의 시작을 위해 노래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리암과 다프네의 시선이 짧게 스쳤다.
순간 다프네는 지금까지 줄곧 마음에 쌓아 왔던 어떤 불안과 염려도 녹아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시선에서 깊은 확신을 느낀 것이다. 정말로 단단하고 절대적인…….
「고마워, 그대의 확신은 내 유일한 구원이지.」
다프네는 이제야 얼마 전에 리암이 했던 말의 진짜 의미를 깨달았다.
그녀는 리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 더 망설임은 없었다.
이제 그들은 완전히 같은 순간에 첫걸음을 내디뎠다. 서로를 지탱해 줄 유일한 확신과 함께.
― 외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