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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51)화 (151/152)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외전 10화

피곤하기 때문일까, 다프네는 평소보다 훨씬 선명한 꿈을 꾸었다.

「하지만 언젠가 마주할 용기가 생긴다면, 그대에게 가장 먼저 말할게.」

「애슐리 슬로언은 어린 시절의 나를 몇 년이나 학대했어.」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 그녀가 잃어버렸던 기억 일부임을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실망…… 하지 않았나?」

「말도 안 되는 말씀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아, 제기랄. 그대가 좋아, 다프네 서튼.」

그가 무심결에 뱉어 버린 듯한 이야기에 다프네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 당시는 물론이고, 다시 떠올리는 지금도.

다프네는 잠에서 어설프게 깨어난 채로, 새롭게 떠오른 기억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실은 지금까지 리암이 애슐리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어렴풋이 하고 있었다. 그에게 품은 반발심이 무척 깊었으니까.

‘학대를 당했던 거구나.’

다프네가 아는 애슐리라면 아마, 모두의 눈을 피해서 괴롭히는 생활을 이어 왔으리라. 미숙한 리암은 자신이 몹쓸 짓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로 엉망이 된 유년 시절을 지냈을 테고.

‘……만나고 싶어.’

불현듯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당장 만나기만 한다면, 아주 깊이 안아 줄 텐데.

하지만 어렴풋이 보이는 창문 너머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고, 날씨는 여전히 싸늘…….

……하지 않았다.

냉기가 감돌았던 그녀의 자리는 어느새 따듯한 온기로 휩싸여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을 때는 조금 더 정신이 돌아왔고, 다프네는 자신이 어딘가에 온몸을 기댄 채로 잠이 들어 있었음을 알았다.

“……?”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어 보니, 바로 위로 리암의 옆얼굴이 보였다.

“안녕.”

그가 속삭이듯 건넨 인사에, 다프네는 깜짝 놀라며 얼른 제 몸을 바로 세워 앉았다.

그녀가 ‘왜 여기에?!’라며 소리를 지르려는 것을 알아차린 리암이 얼른 손가락 하나를 그녀의 입술 위로 올려 두었다.

이곳은 많은 사람이 잠들어 있는 예배당 내부였다.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자리에서 힘들게 잠이 들었을 사람들을 깨워서는 안 될 테니까.

다프네는 놀란 마음을 다스리듯 얼른 입을 크게 벌려 호흡하고는 그를 응시했다.

“왜…… 여기 계세요?”

그리고 입술 끝만을 움직여 겨우 건넨 질문에 그는 가볍게 미간을 구겼다.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눈이 와서요.”

“그렇다고 해도 와야지.”

그는 엉망으로 흘러내린 다프네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이마부터 턱 끝까지 살피는 듯한 눈길은 곧 그녀의 목덜미와 손가락 끝으로 쭉 이어졌다.

혹시 다친 곳이 없는지 걱정하는 듯했다.

“전 다치지 않았어요. 제 이름으로 소식을 보냈으니 아실 줄 알았는데…….”

“여기 상처가 있는데.”

그가 손등을 부드럽게 쥐며 말했다.

“별것 아니에요.”

다프네는 얼른 손을 빼내어 등 뒤로 감추고서 배시시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불가능해, 나는 그대를 걱정해야지.”

다프네는 왜요? 라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왠지 그 답을 알 것 같아서.

하지만 그는 묻지도 않은 질문에 성실할 정도로 차분히 답을 들려주었다.

“사랑하고 있으니까, 다프네 서튼을.”

“……안 여쭤봤습니다.”

“듣고 싶어 하는 기색이라. 아니었나?”

그건 도무지 반발할 수 없는 말이었으므로, 다프네는 입술만 꾹 깨물어야 했다.

“아, 그리고.”

리암은 품을 뒤져 작은 종이를 하나 꺼내 들었다.

“아셔가 그대에게 전해 주라고 하던데.”

“설마 아셔도 절 걱정했나요?”

“그야 물론이지, 미래의 남편으로서는 조금 걱정이 들 정도야.”

다프네는 심술쟁이 아셔가 어떤 걱정하는 말을 적어 보냈을지 기대하며 조심스레 편지를 열어 보았다. 그 감동적인 첫머리에는 수려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사고뭉치 같으니! 어째 조용한 날이 하루도 없습니까?]

참 익숙한 말이었다. 자연스레 그의 목소리가 떠오를 만큼 말이다.

[당신 결혼식이 평범하게 치러지리라 생각한 제가 바보였습니다. 대체 무슨 악운을 타고 나서 날씨마저 이따위입니까?]

어째 좀 억울하다 싶을 정도의 악담이 계속되었다.

[아무쪼록 예식의 순서를 정리해서 보내드리니, 당일에는 실수 없이 해내시길 바랍니다. 공작 부인으로서 하는 첫 인사말의 초안도 보냈으니 참고하시고요. 만약 제대로 해내지 못할 시에는…….]

못 할 때는 뭐?

다프네는 긴장하며 종이를 넘겼다.

[뭐 어쩌겠습니까. 저 같은 아랫것들이 망하는 거죠. 저 앓는 꼴 구경하시게 되겠습니다. 좋겠네요.]

“쿡.”

다프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조금 흘러나오고 말았다.

“그렇게 다정한 말이 적혀 있나? 웃음이 나올 만큼?”

“아, 예. 역시 아셔는 저를 움직이는 법을 잘 아는 것 같아요.”

아셔를 비롯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부터 다프네는 필사적인 힘으로 그가 보내 준 예식 순서와 인사말을 외우게 될 것이다.

“예식 순서를 정리해서 보내 줬어요. 고맙게도요.”

다프네는 아셔가 깔끔하게 정리, 요약해 준 종이를 리암의 앞으로 내밀었다.

“아아.”

“공작님은 다 외우셨…… 아, 정말.”

무심결에 또 흘러나오고 만 호칭에 다프네는 얼른 제 입을 꽉 틀어막고서 울상을 지었다.

“……설마 이런 현장에서도 그 규칙이 적용되는 건 아니겠죠?”

그 애잔한 표정이 통했던 건지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는 건지, 리암은 틀린 호칭을 지적하지 않았다.

“물론, 거의 다 외웠지.”

“그럴 줄 알았어요. 인사말은 물론이고 예식 중에 사제님들이 하시는 말씀까지 다 외우셨을 테죠?”

“그대에게 실수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으니까.”

역시 전부 암기한 모양이다. 다프네는 지독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 남자의 옆에서 더듬거리며 인사말을 하게 될 자신의 모습이 벌써 그려지는 것 같았다.

“저는 실수하는 모습만 보여드릴 것 같은데.”

“내 천재 아가씨가 그럴 리 있나, 이리 와 봐.”

그는 다프네의 허리를 당겨 기어코 그의 바로 옆에 바짝 앉혀 두었다.

“다프네 앤 서튼.”

그리고 더욱 작게 속삭이는 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가볍게 이마를 기대어 왔다.

“자애로운 신께서 정하신 운명의 배필을 평생 존경하고, 그의 존엄함을 긍정하겠습니까?”

“아…….”

다프네는 대답 대신에 감탄하는 말만 건네었다.

“정말로 외우셨네요. 좋으시겠어요.”

“……여기에서는 ‘네, 맹세합니다.’라고 답하는 거야. 물론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네, 압니다.”

그가 무언가를 바라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기에, 다프네는 조심스레 답을 건네주었다.

“어…… ‘예, 맹세합니다.’ 이렇게 하라고요?”

거의 억지로 쥐어 짜낸 답이었는데도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낮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래. 그대가 그렇게 답하면 사제님이 이제 내게도 물으실 거야.”

“리암 마티아스 슬로언.”

다프네는 그의 말을 빼앗듯이 끼어들어, 사제의 질문을 대신했다.

“자애로운 신께서 정하신 운명의 배필을 평생 존경하고…….”

다만 질문의 한가운데에서 다프네의 이야기는 잠시 멈추었다.

사제가 신을 대신하여 건넨다는 저 질문이 아니라 왠지 다른 말을 묻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정말로 제가 적합하다고 생각하세요?”

“그렇지 않을 거라는 의심은 해 본 적도 없어.”

“전…… 확신할 수 없어요.”

“나도 날 확신하지는 못해. 아마 누구라도 그럴걸.”

“거짓말.”

다프네는 그와 맞닿아 있던 이마를 떨어뜨렸다. 조금 더 그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

마침 긴 창문 너머에서 하얀 빛이 떨어져 그의 얼굴을 선명하게 비추어 주고 있었다.

“정말이야. 내가 좋은 공작 노릇을 하고 있다는 확신은 없어.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뿐이지.”

“물론 당신은 아주 훌륭해요.”

“고마워, 그대의 확신은 내 유일한 구원이지.”

그는 다프네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부디, 내 확신도 그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

“…….”

“맹세해, 그대 외에는 없어.”

그는 한쪽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누구보다도 타인을 위하는 상냥함과 명석한 두뇌 그리고 나를 훌륭한 공작으로 존재하게 할 유일한 인물이야.”

“……전.”

“난 그대가 어떤 인물이라고 해도 반해 버렸을 테지. 분명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당당하게 물어보도록 해.”

그가 물어보라고 하는 것은 조금 전에 다프네가 멈추어 버린 예식에서의 질문이리라.

“리암 마티아스 슬로언.”

다프네는 조금 느릿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생각했다. 존경과 존엄도 중요하지만, 왠지 이번 결혼 연습에서는 더 중요한 말을 묻고 싶었다.

“평생을…… 사랑하실 건가요?”

바뀐 질문에도 그는 당황하지 않고서, 다프네의 두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답해 주었다.

“예, 제가 가진 영원에 이르도록.”

맹세를 마친 예비부부에게는 결혼의 성립을 알리는 중요한 의식을 맞이하게 된다.

지금은 진짜 결혼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예행연습일 뿐이니 그런 것까지 굳이 예습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서로 입술을 겹치고 말았다. 지금의 맹세를 꼭 진정한 것으로 만들겠다는 듯이.

“……지금을 결혼식으로 하자고 이야기하면 혼날까?”

입술을 스치며 리암이 건넨 질문에, 다프네는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상당히 혼날 것 같긴 해요.”

리디아와 아셔 그리고 앨러스테어까지 화를 낼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러니까 오늘의 결혼식은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행사로 남게 될 모양이었다.

그들은 한참 후에야 입술을 떨어뜨리곤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늦은 새벽, 고요한 예배당의 한구석에서 꼭 도둑 결혼이라도 치르는 기분이 든 탓이었다.

“지금이 너무 완벽해서 아쉬운데.”

리암은 안타까워하며 다프네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실은 저도 그래요.”

다프네가 제 뺨을 살짝 긁으며 답했을 때.

“그렇다면 내가 증인을 서지.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그들이 몸을 숨긴 기둥 너머에서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다프네에게 외투를 빌려주었던 노부인이었다.

“부, 부인. 이 시간에 여기로 오시면…….”

다프네는 당황하여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잠자리가 불편하셨나요? 아니면 팔이 아프셔서……? 아, 그렇지. 이쪽은요.”

횡설수설 이야기하는 다프네를 향해 노부인은 빙긋 웃으며 그들 앞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물론 알고 있지요, 슬로언 공작.”

생각해 보니 부인은 귀족 집안에서 하녀까지 했으니, 수도 귀빈들의 얼굴을 어느 정도 익혀 두었을 터였다. 다프네는 이제 리암에게 부인을 소개하려고 했다.

하지만 다프네가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는 부인의 앞에 무릎을 꿇고서, 그녀의 손등 위로 이마를 기울였다.

그건 신하가 주인에게 하는 충성의 행위였다.

“삼등석을 즐기신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제 결혼식까지 그렇게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대왕비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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