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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49)화 (149/152)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외전 8화

차장은 몇 번인가 더 신호탄을 벽과 바닥에 긁어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더 연기는 피어오르지 않았다.

그는 잔뜩 울상을 지은 채로 다프네를 돌아보았다.

“어, 어떻게 하죠? 아, 아…….”

아무래도 신호탄은 망가졌거나 불량품인 듯했다.

다프네는 시간을 확인하고, 눈앞에 펼쳐진 열차 길을 확인했다.

근처 마을에서 벗어나며 급격한 커브로 이어지는 구간이었다.

여기에서 아무런 신호도 보내지 않으면,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열차가 이 뒤로 충돌하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되리라.

혹시 정차하지 않고 지나온 간이역에서 굉음을 듣고 사고를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불현듯 그런 소망이 들었지만, 다프네는 고개를 저었다. 우연에 기대어 기다리기만 하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때, 일등석에 있던 귀족 여성과 몇 명의 승객이 그들을 따라와 상황을 물었다. 다프네는 터지지 않은 신호탄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조금 전에 지나온 간이역으로 직접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어느 역이든 비상 연락 수단은 있을 테니.”

“전부 이동하는 건 어려울 겁니다. 승객은 노인이 대부분이고, 부상자에 어린아이도 있습니다.”

귀족 여성의 이야기에 다프네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임산부도 있었죠. 그러니까 다음 열차가 근접해 오기 전까지 우리가 멈추어 서 있다는 것만 알리면 돼요. 부상이 없는 젊은 분과 함께 제가 갈게요.”

다프네가 선뜻 나서자 차장이 얼른 나섰다.

“저도 가겠습니다!”

“아뇨, 한 명뿐인 차장이 열차에서 사라지면 승객들의 혼란이 더욱 깊어질 뿐이에요. 남아서 상황을 설명하고, 부상자를 돌봐 주세요.”

“……하지만.”

차장이 미련스레 중얼거리자, 다프네가 재차 설명을 덧붙였다.

“저는 슬로언 공작의 약혼녀입니다. 구조대를 재촉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구실은 없을 테죠. 걱정하지 마세요.”

마침 인물 중 젊은 남성 한 명이 마을까지 함께 가겠다며 자원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죠.”

그리고 다프네는 일등석에서 온 귀족 여성을 돌아보았다.

“부탁이 있어요. 삼등석 자리가 많이 불편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추려서 앞쪽 칸의 편안한 자리로 옮겨 주실 수 있으세요? 구조가 길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바로 시작하죠.”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서 삼등석으로 통하는 문으로 사라졌다.

이제 다프네는 여기까지 나와 준 삼등석의 승객들을 바라보았다. 그중에는 다프네와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던 노부인도 있었다. 떨어지는 짐에 팔을 맞았던 부인 말이다.

“이렇게 다녀도 괜찮으셔요?”

다프네가 걱정스레 묻자,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낡은 외투를 벗어서 다프네의 어깨 위로 얹어 주었다.

“여기는 걱정하지 말아요, 귀한 아가씨. 이걸 입고 가요.”

그녀가 건넨 옷에 녹아든 그녀의 체온 덕분인지 다프네는 깊은 따스함을 느꼈다.

다프네는 자신과 함께 가겠노라 나섰던 건장한 남성과 함께 기차 뒤편으로 향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가시죠.”

철제 계단을 내려가자 어느새 발등까지 쌓인 눈이 푹 밟혀 왔다.

“서두르죠.”

“예.”

두 사람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서, 긴 선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눈발이 내리치는 터라 몇 걸음도 채 가지 않아서 추위에 떨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는데 낯선 노부인이 입혀 준 옷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저 따스하기만 했다.

꼭 누군가 온열 마법이라도 걸어 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 * *

간이역에서 열차가 지나온 지 오 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선로를 따라서 조금만 걸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방 간이역에 도착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열차와 인간의 걸음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서, 벌써 열차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나왔는데도 간이역은 보이지 않았다.

비탈진 산길 아래, 눈에 반쯤 가려진 선로를 따라 그녀는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괜찮으십니까?”

다프네가 걱정되었는지, 함께 가던 남성이 걱정스레 이야기를 건네어 왔다.

“네, 거뜬해요.”

“제 뒤로 따라오시면 한결 체력을 비축하실 수 있습니다.”

남자가 몇 걸음 더 앞서나가며 건넨 제안을 다프네는 거절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떻게든 마을까지 무사히 가는 것만을 생각해야 했으므로.

다프네는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르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이 있었다.

남자의 자세와 걸음이 참 곧다는 것 말이다.

아무것도 아닌 사실 같지만, 이런 사소한 움직임에서 그 인물이 지닌 진정한 품위가 드러나는 법이었다. 그가 입은 다소 낡은 옷도 그 우아함을 전부 가리지 못했다.

‘혹시…….’

다프네는 그가 무예나 예법을 깊이 익힌 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세가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어째서 나서셨습니까?”

다프네가 그를 의심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알았는지, 그가 먼저 질문을 건넸다.

“……?”

다프네는 뭐라 대답하지 못한 채로 그의 뒤로 종종걸음을 쳤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였다.

‘왜 나섰지?’

그냥 정신을 차렸을 때는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아니 사실 그때의 다프네도 너무나도 놀라 정신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침착함을 가장한 채로 행동한 것뿐.

“그러게요.”

다프네는 별수 없이 이렇게 답하고 말았다. 그녀도 답을 알 수 없었으므로.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시는 분인가 봅니다.”

“제가 그런 사람인가 봅니다.”

한숨을 섞어 답하자 그가 조금 웃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다프네도 슬그머니 웃음 지었다. 이런 상황이지만 조금이라도 미소를 지으니 왠지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힘내서 서둘러 가 보죠.”

다프네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커브 길만 지나가면 간이역이 나올 테니,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멀리 어렴풋이 마을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보이는 듯싶었다. 비록 눈과 바람이 점점 더 거세진 탓에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윽.”

심상치 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순간 불어온 거센 바람에 그는 몸을 숙인 채 멈추어 서야 했다.

“얼굴을 가리고 몸을 숙이세요!”

그의 외침에 다프네는 얼른 두 팔에 얼굴을 묻었다. 얼음 알갱이에 가까운 눈덩이를 머금은 돌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한 것이다.

“큭.”

한차례 바람이 지나가면 나아질까 싶었지만, 어째 이 잔혹한 바람은 점점 더 거세져 저절로 몸이 뒤로 쓸려나갈 것 같았다.

“휩쓸리면 안 됩니다!”

남자가 다프네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들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기는커녕,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마저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 좁은 산길이 만들어 낸 돌풍에 머뭇거리고 있으면 시간만 지체될 뿐이었다.

서둘러야 했다. 뒤따라오는 열차에 소식을 전하는 것은 물론이고, 불편한 기차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에게 하루 빨리 구조대도 보내어야 한다.

이렇게 차가운 겨울 산에 그들을 두었다가 후에 어떤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웠다.

“가야 해요!”

다프네가 남자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바람 소리가 워낙 커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다프네의 표정에서 의미를 읽어 내었는지,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씩, 조금씩만 갑시다.”

그들은 여전히 몸을 숙인 채로 조금씩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끼익, 끼익.

그리고 거의 같은 순간, 짙은 바람결 사이에서 쇠의 마찰음이 조금씩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걸까 싶었으나, 점차 소용돌이가 잦아들며 그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져 갔다.

끼익, 끼익.

“무슨…… 소리죠?”

다프네가 그렇게 물을 때 즈음에는 새하얀 눈발 사이에서 새카만 그림자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철도용 핸드카였다.

레일 위에서 짐을 옮길 때 사용하는 작은 차량으로, 그 위에 탄 사람들이 부지런히 레버를 번갈아 누르며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다프네는 손을 높이 들었다.

여기예요! 라고 외치자 역무원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그녀를 금방 발견하고서 함께 손을 들어 올렸다.

* * *

핸드카에 탑승하자 역으로 돌아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여기까지 나온 역무원들은 멀리에서 들리는 굉음을 듣고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나가는 길이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만약 거기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했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겁니다. 먼저 나와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들은 수도 중앙역은 물론 뒤이어 오는 차량에도 소식을 전했다.

“슬로언 공작님께도 전보를 보내 주세요. 저 다프네 서튼이 탄 열차가 사고를 당했다고요.”

“아, 아, 예! 서튼 양…… 아, 그 약혼녀 서튼 양이요?!”

역무원이 놀라서 되물었다.

추위와 바람에 엉망이 된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추레하여 도무지 ‘공작의 약혼녀’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네, 맞아요. 제가 있다고 이야기해 주세요.”

“네, 네! 빠르게 전하겠습니다!”

다프네는 리암이 공정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다. 그러니 아마 다프네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재해 사고에는 최선을 다하여 임해 줄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그녀의 이름을 굳이 이야기했던 것은 리암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직접 사건 정황을 전달할 정도면, 다프네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그가 금방 알아차릴 테니까.

그러니까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침착하고 꼼꼼하게, 곤란에 빠진 사람들을 도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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