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외전 6화
누가 그러자고 이야기한 것도 아닌데, 다프네와 페이지 부인은 어느덧 겨울의 들판 위에 멈추어 서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프네는 부인의 지혜를 바랐다.
페이지 부인은 시간이 주는 어른의 지혜가 있는 분이니, 분명 어떻게 행동해야 공작 부인에 걸맞은 행동을 할 수 있을지 알려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실망하게 두어요.’
하지만 어째 돌아온 답은 그녀가 기대하던 것과 아주 달랐다.
‘그야, 어쩔 수 없지요.’
“어떻게 그렇게 하겠어요!”
‘아기씨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할 테죠. 주인님을 닮아서 성실한 분이니까.’
페이지 부인은 다프네의 보닛 리본을 꼼꼼히 당겨 주며 빙긋 웃었다.
‘그러니 그걸 받아들이는 다른 사람의 마음마저 전부 떠안을 필요가 있나요?’
“……하지만.”
다프네는 잠시 우물거렸다. 부인의 이야기는 분명 옳았지만, 간단히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저마저 제게 실망하게 되면요? 그때는 어떻게 해요?”
‘아프지 않고서 자라는 사람은 없어요, 아기씨.’
“그래도…….”
‘아기씨는요.’
부인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싸늘한 바람에 다프네가 감기에 걸릴까 걱정이 된 듯했다.
‘자기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위할 때, 더욱 큰 힘을 내는 사람이죠. 그래서 난 아기씨가 공작 부인이 될 거라고 했을 때 조금도 놀라지 않았어요.’
“설마요.”
‘슬로언 공작님은 최고의 공작 부인을 찾아내신 거예요.’
“모르겠어요. 그분은 상냥하시니까 아마…….”
다프네는 리암이 결혼을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믿는다. 설령 그녀가 대단치 못한 공작 부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하지만 다프네는 이 결혼에서 오직 그의 마음만을 생각할 수는 없었다.
이미 그녀가 갖게 될 지위에 따라 주변의 시선부터 달라지기 시작하지 않았나. 대단하신 백작께서 이 먼 곳까지 인사를 올 정도로.
이에 어울리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문제는 대체 그 ‘훌륭한 사람’이 어떤 것인지 그녀 자신도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는 사실이었다.
영지 사람을 면밀하게 살피고, 귀족들의 추앙을 받고, 왕가의 관심을 두둑이 받으면 훌륭한 공작 부인이 되는 걸까.
아니, 애초에 출신 신분부터 틀려먹었다며, 배척만 받는 것이 아닐까.
‘모르는 세계가 두려운 건 당연해요. 하지만 어차피 우리는 손이 닿는 일마다 가능한 만큼의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할 수 없지요.’
“부인, 정말로…… 제가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세요?”
다프네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건넨 질문에, 부인은 엷은 미소를 지운 채로 무척 진지하게 대답해 주었다.
‘네.’
깊은 신뢰가 깃든 시선에 다프네는 무어라 답하지 못한 채로 잠시 입술만 깨물었다.
‘……혹시,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요.’
그러자 다시 배시시 웃은 페이지 부인이 다른 이야기를 덧붙였다.
‘이 할멈에게 돌아와요.’
“부인…….”
‘공작님만큼 부유하지는 못해도, 우리 아기씨를 웃게 하는 법은 아마 내가 더 많이 알지요.’
그 말은 정답이었다.
실제로 ‘돌아와요.’라는 말을 들은 이후로 다프네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으니.
‘너무 애쓰지 말아요. 어디에서도 아가씨의 전부를 걸 필요는 없어요. 몸을 돌보면서 가능한 만큼의 최선을 다해요.’
“그러다 감당이 안 되면, 부인에게 돌아오고요?”
‘그럼요. 돌아와서 내게 한마디만 해요, 베리 잼을 만들어 달라고. 아주 잔뜩 먹게 해 줄 테니.’
그건 정말 참을 수 없는 커다란 행복이었다.
다프네는 ‘훌륭한 사람’의 정의를 찾느라 미지의 허공을 허우적거리던 두 발에, 비로소 단단하고 달콤한 지면이 닿는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에는 하나의 깨달음이 있었다.
앞으로 다프네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시작 지점은 반드시 여기라는 것.
설령 어딘가에서 길을 잃게 되더라도, 페이지 부인이 만든 하얀 빵과 베리 잼의 냄새를 잊어버리는 일은 없을 테니 그녀는 언제든 여기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이제 돌아가요.’
“벌써요?”
‘줄 것이 있어요. 떠날 때 드리려고 했는데, 지금이 좋겠어요.’
부인은 얼른 몸을 돌려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뭔데요?”
다프네가 얼른 그녀의 뒤로 따라붙으며 물었지만, 부인은 손가락을 입술 위로 가져다 댄 채로 웃을 뿐이었다.
* * *
페이지 부인이 준비한 선물은 하얀 머리 리본이었다. 리본 끝에는 푸른색으로 서튼의 머리글자가 자수로 놓여 있었다.
한편으로는 슬로언의 머리글자인 것 같기도 했는데, 다프네가 어느 쪽이냐고 물어보아도 페이지 부인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다프네는 이 소중한 선물을 반드시 예식 때 착용하겠다고 약속했다.
아마 부인도 내심 그것을 바라고 푸른색 글씨로 자수를 놓았던 모양이니까.
줄곧 고민했던 문제가 조금이나마 사라진 자리는 금방 페이지 부인의 애정으로 가득 채워졌다.
다프네는 그 따스함을 품은 채로 오린샤이어에서의 느긋한 생활을 만끽했다.
하지만 허락된 시간은 오고 가는 시간을 포함하여 사흘, 제대로 부인과 시간을 보낸 것은 하루뿐이었다.
이제 다프네는 클롯모어로 돌아가, 정말로 결혼식 막바지 준비를 해야 했다.
‘금방 만날 텐데요.’
페이지 부인은 역까지 다프네를 배웅하며 마지막까지 다프네의 마음을 헤아려 주었다.
“부인의 자리는 가장 좋은 자리예요. 꼭 오셔서 절 지켜봐 주셔야 해요?”
‘걱정하지 말아요, 사무엘 도련님과 두 손 꼭 붙잡고 지켜볼 테니.’
그리고 부인은 커다란 손가방에서 종이봉투를 하나 건네주었다.
‘이거 먹어요, 기차에서는 배고프면 안 돼.’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굉장히 따듯했기 때문에 다프네는 이를 제 가슴 근처로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남기지 않고 전부 맛있게 먹을게요.”
‘당연히 그래야죠. 아휴, 아기씨가 도착할 때까지는 눈이 오지 말아야 할 텐데…….’
그렇지 않아도 어느 지역에서는 이미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는 기사가 있었기 때문에, 다프네도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수도를 거쳐서 열차를 바꾸어 타고 갈 거예요. 다소 돌아가는 길이 되겠지만, 가장 안전한 방법일 것 같아서요.”
수도와 가까운 열차 길은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날씨 등의 재해에도 재빠르게 대응해 준다는 장점이 있었다.
비록 수도에서 1시간 정도 멀어진 후에는 그런 장점을 누릴 수가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다프네는 어떻게든 클롯모어에 늦지 않게 도착하고 싶었다. 대왕비 전하와 무사히 만나기 위해서라도. 대단히 좋은 인상은 드리지 못하더라도, 그녀와의 만남에 지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느새 멀리에서 기차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다프네와 페이지 부인은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 * *
눈이 많이 온다는 예보 때문인지 기차에는 비교적 사람이 적었다. 다프네는 리디아와 함께 페이지 부인이 준비해 준 간식을 나누어 먹기도 하고, 때로는 여행의 피로를 이기지 못해 잠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다행히 수도 중앙역까지는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역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클롯모어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이때 즈음부터는 걱정했던 대로 커다란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으나, 운행은 차질 없이 이루어졌다.
그들이 탑승하는 삼등석에는 오린샤이어행과 비교하면 꽤 사람이 있었다. 적어도 창가마다 한 사람씩은 꼭 앉아 있었을 정도로.
노인과 아이 그리고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그 연령대도 무척 다양했다. 어떤 상인은 다프네의 결혼식에 맞추어 클롯모어에서 장사판을 크게 벌려 볼 생각이라며 자랑스레 떠들어 대기도 했다.
그녀의 결혼식이 꼭 축제나 다름없이 생각되는 것이 왠지 재미있기도 했다.
“좋은 분이더군요.”
열차가 출발하여 한참을 가던 중 줄곧 뜨개질에 열중하던 리디아가 이야기를 건넸다. 짙은 구름에 가려져 태양이 완전히 사라진 탓에 뜨개질을 이어 가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삼등석은 문 쪽을 제외하면 따로 전등을 켜 주지 않으니까.
“네?”
“페이지 부인 말입니다. 지혜로운 분입니다. 당신을 다루는 방법을 완벽하게 알고 계시더군요.”
“그야, 저를 키우셨으니까요.”
“키웠다고 하여 누구나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이렇게 어른이 된 후로는 더욱.”
“리디아 님도 앨러스테어 님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계시잖아요?”
“글쎄요.”
리디아가 잠시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었는데, 다프네는 그녀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부인을 다시 만나면 지혜를 여쭈어야겠습니다. 혹시 괜찮다면 대화를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 제가 두 분의 대화를 도울 수 있어요.”
다프네는 얼른 대답하며 괜히 어깨를 으쓱였다. 리디아가 페이지 부인의 대단한 점을 제대로 알아주는 것이 왠지 자랑스럽기도 해서.
“의지가 되는군요.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그보다 눈송이가 점점 굵어지는 것 같은데…….”
다프네는 창문 너머를 걱정스럽게 내다보았다. 이제 겨우 저녁에 가까운 시간인데도, 태양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짙은 그림자 위로 회색빛의 눈이 끊임없이 내려 온 세상을 전부 덮고 있었다.
거기에 때때로 멈추어 서는 기차의 이상한 움직임 탓에 어째 그녀의 걱정은 점점 깊어지기만 했다.
“괜찮을 겁니다.”
리디아가 위로하듯 건넨 이야기에 다프네도 작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네, 괜찮아야죠.”
하지만 그 간절한 바람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완전히 깨어지고 말았다.
끼익!
순간 온몸이 앞으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더니 열차는 곧 끔찍한 굉음과 함께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좌석 짐칸에 쌓아 놓은 커다란 짐이 우당탕 떨어지기 시작하여, 다프네는 황급히 제 두 머리를 감싸 쥔 채로 몸을 숙였다.
“아악!”
누군가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올 때, 삼등석의 문 위로 밝혀 놓은 유일한 전기 조명도 팡 소리와 함께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