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외전 5화
그래도 다프네가 오린샤이어로 떠나기 전까지는 아직 닷새 정도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빠듯하게나마 대왕비 전하를 위해서 무언가를 준비해 볼 생각이었다.
시간을 내어 공작가의 음악실을 빌린 것은 그런 이유였다.
아카데미에 다닐 때 합창단의 반주를 맡은 바 있었을 정도였으니, 분명히 조금만 연습하면 그럴싸한 연주곡을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로맨틱한 음률로 모두의 사랑을 받는 그런 곡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녀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현재 슬로언 저택에는 2주 후의 예식을 준비하기 위해 미리 도착한 친인척들이 무척 많다는 사실이었고, 그중에는 어린이 손님도 있었다.
호기심이 많은 꼬마 손님들은 딩동딩동 소리가 울리는 음악실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고, 다프네는 기꺼이 그들에게 건반을 내주었다.
그 쿵쾅거리는 거친 연주 소리에 이끌려 곧 앨러스테어가 음악실로 찾아왔다. 제발 제대로 된 소리로 연주를 해 달라며.
다프네는 아이들을 피아노 의자에 앉힌 채로 뚱땅거리며 즐겁게 동요를 연주했다. 수도에서 자라는 평범한 아이라면 모두가 아는 노래였다.
‘거짓말쟁이 아저씨가 개똥에 철퍼덕 넘어졌네!’라는 자극적인 가사로 사랑을 받는 곡이기도 했다.
무릇 아동은 분비물에 관한 이야기나 노래에 흥미를 느끼는 법이니, 친척 아이들은 다프네가 가르쳐 주는 경쾌한 노래를 금방 배워서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는 피오나가 배를 잡고 웃으면서 나타나 바이올린을 켜 주었다. 앨러스테어는 그 옆에서 개똥을 씹은 얼굴로 트라이앵글을 탱탱 쳐 주었다.
‘개똥’이라는 노랫말이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근엄한 저택 전체로 울려 퍼질 때.
“대체 무엇을 연습하는 겁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난 리디아가 나타나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음 날부터는 다프네의 음악실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아이들이 ‘언제 또 노래할 수 있어요?’라며 그 충격적인 노래에 열광했기 때문이다.
다프네는 그 노래는 아이들이 부르기에 딱 좋은 노래라고 생각했지만, ‘슬로언 가문의 아이가 되어서 개의 분비물을 장난삼아 노래하면 안 됩니다!’라는 리디아의 철학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 이후로 뭔가 다른 특기를 찾아 연습할 시간도 없이, 다프네가 리디아와 함께 오린샤이어에 가는 날이 되었다.
다프네는 우아한 태생의 리디아라면 좁고 복닥거리는 삼등석 자리를 무척 싫어하며 불평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런 예상을 깨부수듯 그녀는 자연스럽게 뜨개바늘을 부지런히 놀리며 평범하게 여행할 뿐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허름한 차림의 상인들을 향해 불편한 내색을 보이는 일도 없었다. 도리어 어디까지 가느냐며 먼저 질문을 건네기도 하고, 요즘 장사에 어려운 점은 없는지 귀를 기울여 이야기를 듣기도 할 정도였다.
“왜 계속 흘끔흘끔 쳐다봅니까?”
신기해하며 바라보는 시선이 신경 쓰였을까. 몇 개의 역을 지나며 기차 안이 다소 한가로워졌을 때, 리디아가 책을 내려놓으며 다프네를 돌아보았다.
“아, 죄송해요.”
다프네는 얼른 사과부터 건넸다.
“제가 리디아 님을 너무 오해했구나 싶어서요. 이런 자리를……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건, 제가 싫어할 줄 알면서 이 자리를 예약했다는 뜻입니까?”
“아, 아뇨! 삼등석을 택한 건 심심하게 가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다만 리디아 님이 모르는 분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군요.”
리디아는 짧아진 털실을 당기며 다시 편물로 시선을 내렸다.
“이 땅에서 사람들이 먹고사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건 슬로언의 의무입니다. 그걸 ‘즐거운 이야기’라고 부르다니…… 당신이 앞으로 어떤 자리에 오르게 될지 자각이 있기나 한지 걱정입니다.”
리디아의 이야기는 따끔하지만, 너무나도 옳은 말이었기 때문에 다프네는 금방 부끄러움을 느끼고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예, 짧습니다.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럴게요.”
그렇게 대답한 후에는 그녀 주변에 앉은 다른 사람들을 모두 둘러보았다. 생각해 보니, 기차야말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장소였다.
“슬로언 공작님도 그렇지만.”
다프네가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리디아가 조용히 다시 이야기를 걸어왔다.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삼등석을 이용하는 귀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때로는 신분을 숨기기도 하지요.”
“하긴, 기차에서는 낯선 사람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하니까요.”
“예, 맞습니다.”
이즈음에 기차가 멈추었고, 그들 맞은편에 새로운 여행객이 앉았기 때문에 다프네와 리디아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멈추었다.
반나절 이상의 시간이 걸려서 오린샤이어에 도착하니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역무원은커녕 간이 승강장에 작은 글씨로 ‘오린샤이어’라고 적혀 있는 것이 전부인 작은 역이었다.
워낙에 인구가 적고, 조용한 곳이라 그런지 다프네가 지난 생에 보았던 모습에서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녀를 내려 준 기차가 지나가자, 곧 승강장과 이어진 길에서 페이지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사실 그건 소리가 아니었다.
페이지 부인은 손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분이니까. 하지만 다프네의 귓가에는 분명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기씨!’라며 기쁘게 반겨 주는 목소리가.
다프네는 가방도 챙기지 않은 채로 그녀에게 달려가 와락 안겨들었다.
“페이지 부인!”
다프네는 오래도록 그리워했던 부인의 따듯한 냄새에 파묻혔다.
* * *
다프네는 페이지 부인의 방에서 짐을 풀었다. 여기에서 지내는 이틀 동안은 꼭 함께 붙어서 지내기로 했다. 밤에 잠을 자는 시간까지도 말이다.
리디아의 방은 그들과 바로 이웃한 방이었다. 비록 누추하지만,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페이지 부인이 열심히 쓸고 닦아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귀한 부인께서 쓰시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페이지 부인은 몇 번이나 굽실거리며 수화로 사죄의 말을 건네었고, 다프네가 바로 옆에서 의미를 전달해 주었다.
“아뇨, 귀한 부인은 제가 아니라 공작님의 배필을 키워 내신 당신입니다. 공작님께서 이에 어울리는 경의를 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리디아는 어디에서도 변하지 않는 우아한 자세로 페이지 부인에게 허리를 숙여 존경을 표했다.
고귀한 자리에서 평생 살아온 그녀가, 고작해야 하녀에게 머리를 숙이는 일인데도 딱히 자존심 상해하는 인상은 없었다.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듯 덤덤하기만 했다.
‘아이고, 아이고, 이러지 마세요.’
페이지 부인은 얼른 리디아를 만류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기씨를 키워 내신 건 서튼 주인님이죠. 난 겨우 빵만 구워 준 게 다예요.’
“그 빵이 엄청 맛있었죠. 베리 잼도요. 제 피의 반은 부인의 베리 잼으로 되어 있을 거예요.”
‘맙소사, 아기씨가 날 부끄럽게 하려고 작정했네요.’
그 후에는 페이지 부인이 미리 만들어 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다프네는 부인의 좁은 침대에 같이 들어가서, 그녀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금방 잠이 들었다. 아마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따듯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 *
다음 날에는 놀라운 손님이 페이지 부인의 집을 찾아왔다.
“공작 부인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찾아와 주셔서 무어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바로 오린샤이어와 이 주변을 다스리는 영주로, 이 ‘백작’이라는 남자를 다프네는 오늘에서야 처음 보았다.
사라진 시간에서는 마을 온실 수리 문제로 도움을 청하기도 했지만, 기다리라는 흔한 답장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공작 부인이라고 하기에는 이릅니다.”
그 시간에 쌓아 둔 원망 탓인지, 다프네는 어째 그를 친근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속도 모르고 남자는 손바닥을 비비며 무척 친근한 척 이야기를 건네어 왔다.
“아휴, 이르기는요. 이럴 것이 아니라 저희 거처로 가시죠. 연회를 준비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그 하녀도 데리고 가셔도 됩니다.”
그가 턱 끝으로 페이지 부인을 가리킬 때, 다프네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낼 뻔했다. 눈치가 빠른 리디아가 다프네의 앞을 막아서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공작님의 약혼녀이신 서튼 님께는 이미 정해진 일정이 있습니다. 백작님의 환대에 대해서는 저 리디아 슬로언이 반드시 공작님께 전달하겠습니다.”
그건 정말로 완벽한 대응이었다. 백작의 초대를 거절하고도, 오히려 그의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비록 리디아가 리암에게 보고할 때 백작에 대해 좋은 말을 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고맙습니다, 리디아 님.”
백작이 떠나고, 다프네는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비록 리디아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곤 방으로 돌아가 버렸지만 말이다.
“어려운 것 같아요.”
다프네가 복잡한 기분이 된 것을 알았는지 페이지 부인은 그녀를 이끌고서 마을을 함께 산책하자고 권했다. 오늘따라 햇살이 적어 다소 쌀쌀하긴 했지만, 바깥을 다니기에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 전에 리디아 님이 나서 주지 않았다면, 저는 분명히 공작가에 누가 될 반응을 했을 거예요.”
다프네는 페이지 부인의 팔짱을 끼운 채로 조심스레 이야기를 건넸다.
“기차에서도 리디아 님은 다스리는 사람의 의무감을 안고 있었어요. 전…… 기차에서 그런 건 생각도 해 본 적 없었는데.”
페이지 부인은 딱히 무어라 대답하지 않은 채 가만히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높은 분들께 잘 보일 수 있을지도 걱정돼요. 저 같은 중간 계급 출신을 그들이 정말로 받아들여 줄까요?”
다프네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하얀 입김이 차가운 공기 사이로 떠오르고 사르르 흩어졌다.
“요즘은 제 부족함만 깨닫게 되는 것 같아요.”
어느새 부인은 다프네의 손등을 다정하게 토닥토닥 두드려 주고 있었다.
그 온화함에 다프네는 최근 얼마간 줄곧 홀로 생각해 온 두려움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런 제게…… 모두가 제게 실망하면 어떻게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