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외전 1화
다프네가 공작가에서 나와 클롯모어의 단층 주택에서 살기 시작한 것도 벌써 1년, 어느덧 그녀는 훌륭한 23살 아가씨가 되었다.
이쯤 되면 새벽에 일어나는 사용인의 습성이 사라질 법도 한데, 그녀의 아침은 여전히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시작되었다.
알람의 도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켠 그녀는 전날 밤에 미리 가져다 놓은 미지근한 물로 세수를 했다.
이는 겨울의 아침을 조금이나마 온화하게 맞이하기 위한 지혜였다. 아침에 새로 물을 받으면 너무나도 차가워서 손가락 관절이 오므라들 정도로 괴로웠으니까.
그 후에는 얼른 불가에서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섰다. 턱에서부터 얼굴까지 침구에 눌린 선 자국이 나 있었다.
“이게 뭐람.”
다프네는 보습 크림을 두껍게 바르며 얼굴에 남은 붉은 자국 주변을 이리저리 문질러 보았다. 하지만 그 끔찍한 선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안 지워지네…….”
다프네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긴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은발은 무척 드문 색으로, 이 마을에서는 이제 은발은 그녀를 나타내는 상징처럼 되었다.
그 후에는 털모자와 장갑 그리고 도톰한 장화를 신고서 빗자루를 챙겨 들었다. 그녀의 아침은 정원을 깔끔하게 정돈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실 정원이라곤 해도 열 개의 디딤돌과 다섯 개의 계단을 청소하는 정도였지만 말이다.
비질로 하루 만에 쌓인 먼지나 흙을 싹싹 쓸어내고 있으니, 부지런한 아침을 맞이한 이웃이 마침 그 앞을 지나갔다. 여전히 공작님의 저택에서 일하는 브리였다.
그녀는 평소보다 늦잠을 잤는지 두꺼운 코트를 입은 채로 저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브리!”
다프네는 얼른 빗자루를 벽에 세워 두고서, 정원 한편에 둔 자전거에 올라탔다.
브리가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돌아볼 때, 다프네는 얼른 페달을 밟아 그녀의 앞으로 다가섰다.
“타요, 태워 줄 테니까.”
브리는 ‘하지만…….’이라며 망설이지 않았다. 괜히 그렇게 시간을 끄는 것이 다프네를 더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자전거 뒷자리에 그녀가 앉자 다프네는 바로 페달을 밟았다. 처음에는 조금 무거운가 싶었는데, 나아가는 힘이 강해지며 점점 더 발놀림이 가벼워졌다.
기분 좋은 내리막길을 내려가며 거주 구역을 벗어나자, 길은 상업지구로 이어졌다.
다프네와 브리는 배달로 바쁜 식료품점 사장님, 가게 앞을 쓸고 있는 빵집 사장님과도 손을 흔들어 인사를 나누며 여러 가게 앞을 지나갔다.
차악.
그리고 저택으로 향하는 언덕 아래에서, 다프네는 자전거를 획 돌려세웠다. 여기부터는 자전거로 가는 것이 더 오래 걸릴 테니까.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다프네는 어깨를 으쓱이곤 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확인했다.
“걸어가도 충분한 시간이에요. 뛰지 말고요.”
“알았어요, 이따가 퇴근 후에 만나요. 알았죠?”
브리는 다시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언덕을 올라갔다. 다프네는 잠시 그 모습을 올려다보다가, 자전거 핸들에 머리를 기대어 푹 한숨을 쉬었다.
아침부터 식사도 하지 않고 운동부터 했더니 힘이 쭉 빠져 버린 것이다.
“흐으.”
그렇게 잠시 늘어져 있자, 언덕 위에서 익숙한 엔진음이 들려왔다. 다프네는 얼른 자전거를 밀어서 갓길로 물렀다.
검은색 차량은 부드럽게 언덕을 내려와 다프네의 앞을 슥 지나갔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자동차가 멈추었다.
곧 운전석의 문이 열리고, 다프네도 익히 잘 아는 사람이 씩씩거리며 내렸다.
“아 진짜! 뭐 하는 겁니까?”
아셔 마플이었다. 슬로언 공작의 오른팔로 활약하는 클롯모어의 잘난 척쟁이 말이다.
“……?”
다프네는 자전거 핸들을 쥔 채로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갑자기 차에서 내리며 소리를 지르다니, 누가 보면 다프네가 일부러 그의 자동차에 사고라도 낸 듯 보일 것이다.
“저는 차가 내려오기 전에 갓길로 피했습니다. 안 부딪쳤습니다.”
“뭐라고요?!”
그는 기가 막힌다는 듯 또 소리를 지르고는 다프네의 앞으로 저벅저벅 다가왔다.
“그러니까 내 말은, 왜 그렇게 힘이 빠져서 비척비척…… 아 몰라요. 일단 타요, 타고 말합시다.”
그는 다프네의 자전거를 번쩍 들어 차량 뒤편에 철컥 고정했다. 비싼 인질이 잡혔으니, 다프네는 별수 없이 그가 운전하는 차에 꼼짝없이 탑승할 수밖에 없었다.
“아프면 쉬어야지 왜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닙니까?”
운전석으로 돌아온 아셔는 다프네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
이제야 그가 하려던 말을 이해하게 되어, 다프네는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어째 그녀의 추측이 틀렸던 모양이다.
“제가 미쳤습니까?”
그가 질색하면서 답하는 것을 보면.
“공작님의 저택 앞에 수상해 보이는 자가 어슬렁거리는 게 싫을 뿐입니다.”
그는 흥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인 후, 그제야 차를 출발시켰다.
“전 수상하지 않은데요.”
“행동거지가 그렇지 않습니까. 자전거를 들고서 기우뚱기우뚱! 그러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힉, 얼굴에 그 자국은 또 뭡니까?”
“이불 자국이죠.”
“정말이지.”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멈춘 자동차 앞으로 아침 산책을 나온 목장의 개들이 부리나케 지나갔다.
“이불 자국을 얼굴에 찍고 돌아다니는 인물을 안주인으로 세우겠다며 불철주야 돌아다니시는 공작님의 노고에 제가 다 눈물이 납니다.”
“어…… 그렇게 흉측해요?”
“괴수 같습니다.”
다프네는 자동차 측면에 달린 거울을 향해 고개를 기울여 제 얼굴을 확인했다. 조금 눈에 띄기는 해도 아셔가 말하는 것처럼 끔찍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다프네는 자세를 바로 고쳐 앉으며 아셔를 돌아보았다. 마침 개들이 모두 지나가 그는 서서히 차를 출발시키고 있었다.
“여전히 가문 회의에서는 제가 매력적인 결혼 상대로 보이지는 않는 모양이네요.”
“그야 그렇죠.”
아셔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 회의에서 굳이 쌍지팡이를 들고서 다프네를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 리암의 의지가 워낙에 확고하기도 했고, 그들에게 서튼이란 여전히 ‘대마법사의 자손’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프네가 매력적인 안주인이냐고 묻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결혼은 가장 쓸모 있는 계약이죠. 게다가 그 신용도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가문의 부흥을 위해서는 다소 필요에 따른 결혼을 추구한다. 외국의 귀족과 인연을 맺어 특별히 관세를 면제받은 지역도 있다고 하지 않는가.
“아셔는 어떻게 생각해요?”
“그야, 당연히 당신이 안일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침 그의 차가 다프네의 집 앞에 도착했기 때문에, 그는 갓길에 잠시 차를 세워 두었다.
“내가 당신이라면 여기에서 비척거릴 것이 아니라 결혼식 전까지 수도에서 공을 세우든 해서, 왕가에서 칭호라도 하나 받아오겠습니다. 공작님이 저들에게 고개를 빳빳하게 들 수 있도록 말입니다!”
“어, 그건.”
다프네는 잠시 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아셔가 딱히 저를 반대한다는 이야기는 아닌 거네요?”
“하.”
그는 안경을 고쳐 쓰고는 삐딱한 미소를 흘렸다.
“걱정하지 마시길, 당신에 대한 공작님의 흥미가 식는 날에는 누구보다도 먼저 바깥으로 내쫓아 드릴 겁니다.”
그 불경한 말이 다프네의 귀에는 어째 ‘평생 다프네를 반대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들려왔다.
이 정도로 리암의 마음을 확신하고 있었던가?
다프네는 당연한 듯 그리 생각하는 자신이 신기하기도 하여 왠지 부드러운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보던 아셔는 턱 끝으로 차량 손잡이를 가리켰다.
“어서 가시죠. 저는 역으로 손님을 마중 가야 해서 바쁩니다.”
“누가 오세요?”
“제기랄!”
그는 또 어째 화를 내면서 핸들에 머리를 처박았다.
“……당신의 웨딩드레스가 옵니다.”
“아하. 금방 왔네요. 예식은 2주나 남았는데.”
“그야 금방 오죠! 당신이 얼마나 값비싼 걸 골랐는지 알고 있습니까? 디자이너가 신이 나서 수도의 솜씨 있는 침모를 모두 모아…… 아, 됐습니다. 정말이지 결혼은 돈을 잡아먹는 괴물입니다! 두 번 다시는 안 할 겁니다!”
그건 참 고마운 말이었다.
아셔는 리암이 값비싼 결혼식을 치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다프네를 안주인으로 계속 인정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고마워요, 아셔.”
“됐습니다. 내일 입어 보러 오시기나 하시죠. 그때는 얼굴에 끔찍한 자국이 없기를 바랍니다.”
아셔는 먼저 차에서 내려 차에 실어 두었던 자전거를 내려 그녀의 집 앞에 세워 두었다.
“아하하,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서 갈게요.”
다프네도 차에서 내렸다.
“그 부분은 제가 리디아 님께 전해 두겠습니다.”
그는 조금 정중한 모습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곧 리암과 결혼할 다프네에게 그 나름대로 예의를 차리는 것이다. 비록 얼굴은 썩은 무를 씹어 먹은 표정이지만 말이다.
“태워 줘서 고마웠어요.”
“됐습니다.”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툴툴거리며 차량에 탑승했다.
‘음…….’
다프네는 자전거를 정원 안쪽으로 옮겨 놓고서, 아침에 하다가 그만두었던 정원 청소를 시작했다.
마을은 이제야 활기가 돌기 시작하여,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터로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다프네는 눈길을 마주치는 사람마다 모두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야말로 다프네의 삶은 평범한 서민의 생활이었다.
이렇게 되기 전에는 리암의 곁에서 공작령의 영주들과 연락을 주고받기도 하는 특별한 수행원 역할을 했었지만, 이제는 그 업무에서 완전히 벗어 난 후였다.
「내가 당신이라면 결혼식 전까지 수도에서 공을 세우든 해서, 왕가에서 칭호라도 하나 받아오겠습니다. 공작님이 저들에게 고개를 빳빳하게 들 수 있도록 말입니다!」
조금 전의 아셔가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이런 평범한 내가, 왕가의 칭호 같은 것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