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39화
다프네가 천천히 눈을 뜨자,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자신을 오롯하게 바라보는 보라색 눈동자가 보였다. 얇은 레이스 커튼을 지난 예쁜 모양 그림자가 그의 눈가로 아른거렸다.
그 지긋한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을 리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햇살이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이미 아침인 모양이었고.
하지만 다프네는 여전히 자신을 잡아당기는 잠의 마수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더 자.”
게다가 리암도 그렇게 말해 주었기 때문에, 다프네는 다시 온몸을 축 늘어뜨렸다. 잠과 현실의 애매한 사이에서 기분 좋은 나른함이 몰려왔다.
다프네는 작게 하품하며 방향을 바꾸어 누웠다. 한쪽으로 자느라 뻐근했던 어깨가 사르르 풀리며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흐.”
하지만 시원한 것은 어깨뿐, 다른 곳은 어째 아프다며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그 불편함을 알았는지, 커다란 손이 그녀의 뒷덜미를 쥐어 살살 눌러 주었다. 대체 그가 어디에서 이런 걸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시원했다.
아마 평소라면 이런 손길을 느끼며 편안하게 잠이 들었을 테지만, 오늘은 불가능했다. 목덜미 외에도 다프네를 괴롭히는 신체 통증은 얼마든지 더 있었으므로.
비록 이를 함께 밤을 지낸 남자에게 직접 호소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미안해.”
짧게 사과한 그는 뒷덜미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며, 이제 어깨와 팔을 차례로 눌러 주었다.
“괜찮아?”
그가 다정하게 묻는 말에 다프네는 대답할 기운조차 없어서 고개만 살살 끄덕였다.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어제의 열렬했던 키스는 서재의 창가에서 시작되어 나중에는 한편으로 치워 두었던 벨벳 소파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가 계단을 올라가던 중에도 여러 가지 일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들어온 가장 가까운 침실에서 그들은 오랜 외로움을 달래는 듯 서로를 안았다.
뜨겁고 비밀스러운 위로의 시간에서 리암은 몇 번이고 애정의 말을 들려주었다. 가득 쌓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여 흘러나오는 듯한 고백이 좋아서, 그때마다 다프네는 그의 등을 꽉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이.
그때의 충족감에 다프네는 시간이 꽤 늦은 새벽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마저 잊은 채였다.
‘이렇게 아플 줄도 모르고.’
도톰한 겨울 이불을 모아서 가슴 앞에 끌어안은 채로 다프네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허리에 움푹 파인 곳을 부드럽게 눌러 주던 리암이 재차 사과했다. 더듬거리는 변명과 함께.
“내가 좀…… 이성이 끊어져서.”
솔직히 다프네가 봐도 그런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런 리암을 보는 것이 좋았으므로 딱히 원망할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의 눈이 돌아가게 만든 건 다프네였다. 더 많은 위로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를 자극할 말을 하고 말았으니까.
「소용없다는 거…… 아는데.」
어제의 그는 오랫동안 마음에 눌러 온 죄책감을 고백했다.
「그 시간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면 내가 한심해져.」
다프네는 제 위를 차지한 남자의 두 뺨을 다정하게 쥐며 웃었다.
「그 시간의 공작님은 절 알지도 못했는걸요.」
「그게 미칠 것 같다는 거야. 그 자식이 그대를 얼마나…… 괴롭게 했을지.」
「하지만.」
다프네는 손을 옮겨 그의 목덜미를 푹 끌어안았다. 다시 맞붙은 몸에 쉼 없이 내달리는 맥동이 함께 울렸다.
「그 시간에서 울던 저는…… 아직도 여기에 있어요.」
「…….」
「그러니까, 더 많이…….」
안아 달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부터 그가 다시 다프네의 몸을 완전히 감싸 안았다. 리암이 말하는 ‘이성이 끊어져서’라는 건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았다.
“괜찮아요.”
다프네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조용히 답을 건네었다.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있었다.
“물 가져다줄까?”
다프네는 살살 고개를 저었다. 물을 마시는 동작도 하기 싫었다.
“더 자, 아직 몇 시간 못 잤어.”
그는 고개를 깊이 숙여 다프네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몇 시…… 죠?”
“아직 밤이야.”
“햇살이 눈을 찌르는데 그런 거짓말이 잘도 나오시는군요.”
뾰족하게 건넨 말에 그는 눈초리가 잔뜩 휠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햇살 정도는 그냥 못 본 척하고 내 거짓말에 어울려 주면 좋을 텐데.”
“싫습니다.”
“그렇게 딱 잘라서 거절하면 조금 쓸쓸해져.”
“받아들이세요.”
“아, 정말 매정해!”
리암은 말은 그렇게 해도 다프네를 꽉 끌어안으며 뺨을 비벼 대었다. 좋아서 어찌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그대와 아주 하나로 살았으면 좋을 텐데.”
그 소망 어딘가에는 리암이 품은 묘한 외로움이 느껴졌다.
아마 꽤 오래된 것으로 보였다. 때때로 그가 지닌 마음의 그림자가 짙어지는 것을 느꼈으니까.
“저어.”
다프네는 조금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질문을 건넸다.
“……제가 잊어버린 거죠? 공작님의 어떤…… 외로운 기억을.”
깊은 사죄의 마음을 담아서 살짝 고개를 숙여 건넨 이야기에도 리암은 웃고만 있었다.
“하지만 다프네.”
그리고 어째 그녀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답을 들려주었다.
“그 시간에 울던 나는 여기, 그대 앞에 있어. 그러니까…….”
어제와 같은 말이 이제는 반대로 돌아왔다. 그 심정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다프네는 고개를 들어 그에게 스치듯 입을 맞추었다.
“더 많이, 안아 드리겠습니다.”
약속의 말을 건넨 것은 다프네였는데, 우습게도 리암이 먼저 그녀를 꽉 안았다.
어제의 열기가 아직도 그대로 남은 그의 품에서 다프네는 손을 뻗어 그의 단단한 등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이제 혼자서 우는 이는 없었다.
* * *
모처럼 수도에 올라온 사이에 다프네는 몇 가지 일을 더 처리했다.
일단 오랫동안 비워 둔 그녀의 집에 드디어 세입자를 얻었다. 운 좋게도 사업을 키우기 위해서 지방에서 왔다는 똑똑한 아가씨와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바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다프네는 연간 소득이 증가했다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사냥꾼의 요람에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시 추운 겨울이 오고 있었으므로 사무엘의 겨울용품을 잔뜩 사 두어야 했으니까. 지난해보다 더 큰 치수의 모자와 장갑을 구매했다. 그리고 올해도 양말 세 켤레를 사자 인심 좋은 사장님은 네 켤레를 덤으로 주셨다.
그리고.
리암과 함께 애슐리 사건을 처리했던 치안대장을 만났다.
그는 다프네에게 무서운 사건을 파헤치고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서 감사하다는 뜻을 전하고, 왕이 직접 적었다는 감사장도 전해 주었다.
“전하께서 직접 전해 주지 못해서 안타깝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뇨! 저 같은 사람에게 전하께서 시간을 쓰실 필요는 전혀 없는걸요.”
다프네의 대답에 어째 리암이 이상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서튼 양이 이렇게 말했다고 반드시 전하게. 서튼 양을 위해 시간을 쓸 필요는 개미 더듬이만큼도, 아니 그 끝에 달린 먼지만큼도 없다고.”
“예에……? 이, 일단 그렇게 하겠습니다.”
치안대장은 떨떠름하게 답하고는 미리 가져온 주머니 하나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압수 기간이 끝나서 압수된 물건을 주인들에게 물건을 돌려 드리고 있습니다.”
“압수된 물건…… 이요?”
치안대장은 대답 대신 주머니를 가리켰다. 어서 열어 보라는 뜻인 듯했다.
주머니를 손바닥 위로 기울이자, 툭 하고 익숙한 금속제 로켓 목걸이가 떨어졌다.
“이건.”
아버지의 목걸이였다.
“애슐리 슬로언의 자택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치안대원의 설명에 다프네는 얼마 전에 리암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버지를 살해한 것도 애슐리였다고.
“정말…… 이었군요.”
그 이야기를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아버지가 절대로 품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던 물건을 이렇게 만나게 되자 새삼 실감이 들었다.
다프네는 익숙한 표면을 쓰다듬다가 조심스레 버튼을 눌러 이를 열어 보았다.
어린 시절의 다프네와 사무엘이 있었다.
그리고 붉은 핏자국이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의 손자국이 아닐까. 다프네는 그 위로 제 손가락 끝을 조심스레 겹쳐 보았다.
아버지, 라며 작게 속삭일 때 리암은 그녀의 양쪽 어깨를 가볍게 짚어 함께 있음을 알려 주었다.
* * *
다프네는 목걸이를 빨리 사무엘에게 보여 주고 싶었으므로, 예정보다 조금 일찍 클롯모어로 돌아가는 열차에 탑승했다.
이번에는 수도 주택에 세입자가 생긴 기념으로 일등석을 타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오늘따라 만석이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이번에도 삼등석을 타고 돌아가게 되었다. 리암도 함께.
북적이는 플랫폼에서 그들은 특대 치수의 팝콘과 치즈를 더블로 추가한 핫도그를 각자 챙겨 들고서 열차에 올랐다. 행복한 귀가에 먹을 것이 빠진다면 섭섭할 테니까.
하지만 그들의 먹성은 점점 더 굉장해져서, 이제는 열차가 출발도 하기 전에 핫도그는 전부 거덜 냈고, 팝콘은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다프네는 금방 아쉬워졌다. 팝콘을 한 통 더 사거나, 노릇노릇 구운 구황작물이라도 하나 더 봉투에 담아 올 것을 그랬다며 후회하면서.
“걱정하지 마, 간식 카트가 금방 지나갈 테니까.”
아쉬움을 알아차린 리암은 손수건을 꺼내어 빵과 치즈 가루가 묻은 다프네의 손을 꼼꼼하게 닦아 주기 시작했다.
“스스로 할 수 있습니다.”
“알아, 그러니까 해 주는 거야. 그리고 대체 언제까지 내게 그런 말투로 이야기할 거지?”
“설마 제가 모시는 주인님께 편안한 말투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싫은가?”
“그게 아니라…….”
사용인에 불과한 다프네가 리암에게 깍듯하게 대하지 않으면, 여러모로 이상해 보일 것이다.
그녀가 망설이자 리암이 어깨를 으쓱이며 먼저 말했다.
“뭐, 그대가 편한 대로 하셔야겠죠. 강요하지는 않을 겁니다.”
“고, 공작님의 말투가 이상해졌는데요?”
“어느 한쪽만 정중하게 말하는 건 이상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묻는 그의 말투가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에, 다프네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절대 하지 마세요! 끔찍합니다!”
“……그게 그렇게 질색까지 할 일인가.”
만족할 만큼 손을 닦아 낸 그는 다프네의 손등 위로 살짝 키스했다.
“어머나.”
깜짝 놀라는 소리가 들려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어 보니, 복도를 지나던 부인이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수도에 올 때 맞은편에 앉았던 바로 그 부인 말이다.
“또 마주쳤네요.”
부인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고, 리암이 얼른 그녀에게 맞은편의 자리를 권했다. 그러자 그녀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늘은 저도 일행이 있답니다. 그보다…….”
그녀는 몹시 흥미로워하는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살짝 허리를 숙이며 질문했다.
“드디어, 두 분은 연인이신가요?”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잠시 바라보는 것도 잠시.
다프네와 리암은 곧 이 어렵지 않은 물음에 기꺼이 즐거운 미소와 함께 답했다.
“네, 연인입니다.”
동시에 나온 말에 부인이 ‘축하해요.’라며 손뼉을 쳐 주었는데, 놀랍게도 이 손뼉은 금방 열차 한 칸을 가득 메워 버리고 말았다.
리암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한 인사를 올릴 때는 그들을 축하하는 환호성까지 있었다.
곧 클롯모어행 급행열차가 우렁찬 엔진 소리를 울리며 순조롭게 출발하기 시작했다.